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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런 무지개같은정부

부글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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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4-09 17:09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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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제공
오래전에 배운 국어 교과서 속 그림이었어요. 양복 입은 아저씨가 커다란 이민가방 속에 들어가는 장면이었죠. 아저씨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어요. 국어 교과서 띄어쓰기 단원에 있던 이 그림은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와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라는 띄어쓰기의 차이를 알려줬어요. 그때 문득 생각했어요. 가방에 들어가신 아버지는 누가 꺼내주려나. 어쨌든 띄어쓰기는 중요해요. 아버지를 구할 수도 있으니까요.

오랜만에 국어 교과서 속 그림이 떠올랐어요. 청와대가 올바른 띄어쓰기 사용을 걱정하고 나섰거든요. 지난 4월4일 청와대는 국정기조와 국정비전 등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했어요. 각 부처에 내걸 청와대의 각종 이미지 자료를 발표하는 자리였어요. 그런데 김행 청와대 대변인이 난데없이 기자들에게 ‘띄어쓰기 지적질’을 시작했어요. “국립국어원 감수를 받았다. 박근혜 정부는 고유명사다. 띄어쓰지 말고 붙여써야 한다.” 박근혜 정부(X), 박근혜정부(O)라고 친절히 알려줬어요.

깨알 지적은 멈추지 않았어요. 김 대변인은 “정부의 국정비전이 희망의 새 시대이며, 경제부흥, 국민행복, 문화융성, 평화통일 기반 구축이 4대 국정기조”라고 설명한 뒤, “새 시대는 띄어서 써야 하며 평화통일은 붙이고 기반 구축은 띄어서 써야 한다”고 했어요. 국정의 일관성이 중요하대요. 이게 바로 박근혜 대통령이 말했던 내 꿈이 이뤄지는 나라인가봐요. 내가 원하는 띄어쓰기가 이뤄지는 나라, 대한민국 만세! 한글 만세!

국정의 일관성을 강조하고 싶다면 청와대가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해요. ‘내가 원하는 띄어쓰기를 하는 국민’을 만들어봐요. 정부가 전 국민을 대상으로 띄어쓰기 부분을 특화한 한국어능력시험을 내도록 해요. ‘제2의 새마을운동’은 올바른 한글 사용부터 시작하는 건지도 모르니까요. 자, 맛보기 1단계 문제 다 함께 풀어봐요.

문제: 다음 중 올바른 띄어쓰기를 강조하는 박근혜정부 시대의 올바른 표현을 고르시오.

① 박근혜 정부는 복지 공약을 까먹었다. ②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를 설명하지 못한다. ③ 박근혜 정부는 정수장학회를 좋아한다. ④ 5·16은 쿠데타다.

딴생각 말고 보기 내용보다 띄어쓰기에만 집중하면 문제를 풀 수 있어요. 이번에는 난이도 높은 2단계 문제로 넘어가도록 해요.

문제: 다음 중 올바른 띄어쓰기만 강조하는 박근혜 정부가 과연 알고나 있을까 하는 사실을 고르시오.


①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대한문 앞 천막농성을 했던 건, 쌍용차 국정조사를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② 제주 4·3 유족회는 지난 4월3일 위령제에 박 대통령의 참석을 요청했다. ③ 폐업 논란을 겪고 있는 진주의료원에는 서민 환자가 많다. ④ 정답 없음.

왜 띄어쓰기 문제가 아니냐고요? 자세히 보세요. ‘쌍용차 해고노동자’가 맞는지 ‘쌍용차해고노동자’가 맞는지 말이죠. 그나저나 한가롭게 띄어쓰기 타령만 하고 있는 박근혜정부, 참 무지개같은정부 같네요. 띄어쓰기 만세!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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