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적이되 동시적이지 않은
‘광속’으로 왔으나 800년 걸려 도달한 북극성 별빛처럼
주체·관찰자의 근본적 관점차를 보여주는 그녀의 사과
짧고 간결했다고 말하기도 뭣할 정도로 짧 아도 너무 짧았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 부터 계속돼온 인사 논란이었다. 공식 낙마 자 수만 7명이다. 역대 어느 정부와 비교하 더라도 양과 질에서 단연 최악이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대리인이 대독하는 형식으 로, 딱 17초를 할애해 빠르게 사과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북극성은 지구 로부터 800광년 떨어져 있다. 그러니까 북 극성의 발광은 800년 전에 반짝인 것이 오 늘에야 도착한 것이다. 오늘 본 북극성의 반 짝임은 1213년 어느 날에 출발한 셈이다. 고 려 제23조 고종 즉위 원년이다. 우리가 흔히 ‘무신정권’ 시대라고 배웠던 때다.
하지만 우리는 그 빛의 속도를 ‘광속’이라 고 부른다. 800년을 거쳐야 도달하는 세월 과 ‘광속’이라는 명사의 거리감은 그야말로 까마득하다. 전혀 동시적이지 않다고 여겨진 다. 하지만 그 빛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동시적인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민심의 거리도 이런 것이 아닐까. 동시적이면서 또한 전혀 동시적이 지 않은. 말하자면 박근혜 대통령은 800광 년 떨어진 북극성이고, 우리는 지금 그걸 바 라보고 있는 것이다. 17초 사과는 세상을 바 라보는 청와대의 시공간 개념이 청와대를 향 한 공감각적 아우성과 서로 전혀 다른 시간 대에서 헤매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그래서 그 17초 사과는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상대 성이론’처럼 동시적이되 동시적이지 않음에 서 오는 근본적 관점차를 드러내는 사건처 럼 보인다.
정부는 어찌되었건 사과를 했다. 했으니 됐다. 대통령 입장에서 사과를 했다는 것은 불변의 절대적인 사실이다. 하지만 받아들 이는 입장에선 전혀 다르다. 그건 차라리 사 과를 하지 않은 것이다. 안 하느니만 못한, 차라리 사과를 하고 싶지 않다는 것만 보여 준 사과였다. 그래서 사과라는 행위가 존재 했던 것은 맞지만, 주체와 관찰자의 관점에 서 이 행위는 서로 전혀 다른 의미다. 800년 의 세월을 흘러왔는데, 광속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의 사실이 다층적 의미를 띨 수 있다 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정치는 출발한다. 정치는 절대적인 객관을 갖는 과학의 세계 가 아니라 엔(n)개의 복수적 입장을 만족시 키는 다원성의 세계(여야 한)다. 이 상호주관 성을 절대자가, 독단자의 힘으로 무너뜨리면 정치는 불안하고 위협적인 것이 된다. 민주 적 권력자는 민심의 입장에 최대한 복무하 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존재를 유지해야 하 고, 신뢰를 획득해야 한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그걸 버렸다. 17초 사 과를 끝으로, 마치 그런 일은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이는 그 자체로 반정치적인 것이고, 자신의 행위를 절대화한다는 점에 서 위험한 불통이다. 설령, 스스로를 북극성 이라 믿어도 정국을 ‘무신정권’ 시절처럼 운 영해선 곤란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김완 <미디어스> 기자
고개 숙이되 책임지지 않는
사과의 기본 상식 이탈한 박근혜 스타일의 파격
‘보수의 구원자’는커녕 위기 부채질하는 무능함 드러내
[%%IMAGE3%%]지난주 트위터는 ‘17초 대독 사과’로 뜨 거웠다. 허태열 청와대 비서실장의 명의로 김행 대변인이 ‘대독’한 대국민 사과문이 오히려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라는 지적이 었다. 사과를 하려면 물의를 일으킨 당사 자가 나와서 해야 한다. 사과의 내용을 보 면 사과를 해야 할 당사자를 알 수 있을 텐 데, 인사 난항에 따른 혼란을 사과하는 것 이었다.
당연히 인사와 관련한 책임자가 직접 사 과하는 것이 원래 취지에 가장 부합하는 일 이다. 그럼에도 박근혜 정부는 이런 상식적 인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대신 택한 것이 ‘대독 사과’라는 특이한 해결책이었다. 이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는데, 대변인이 대독하 는 역할을 했다고 해서 특별히 진정성이 없 다고 말하기 어렵다거나 새누리당용으로 사 과를 한정했기 때문에 ‘대독 사과’를 하더라 도 문제가 없었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런 변명이 궁색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애초에 사과를 해야 한다 말아야 한 다, 갑론을박했던 이유가 바로 인사 난항으 로 인한 새 정부의 신뢰도 하락을 만회하자 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과를 하는 목적이 추락한 신뢰도를 회복하자는 것인데, 오히 려 역효과를 초래한 것이니 아무리 좋게 넘 어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다. 왜 이 런 일이 일어나는지 지금이라도 판단을 해 야 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 은 보수의 자중지란을 한번에 해결할 수 있 는 인물로 그만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위치 에 서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집 권을 이룩한 뒤에 보이는 행보는 고개를 갸 우뚱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 같다. 그토록 강조했던 리더십은 온데간데없고 대통령의 눈치만 보는 측근들만 포진하고 있다는 느 낌이다.
‘17초 대독 사과’를 단순한 해프닝으로 보 기 어려운 까닭이다. 어떤 사안에 대해 책임 지지 않으려는 태도가 읽힌다. 박근혜 정부 가 한국 보수의 구원자이기는커녕 위기를 더욱 부채질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강하 게 들기 시작한 것은 비단 이번만은 아니다. 후보 시절이었다면 능력은 미래의 문제이기 때문에 당장 검증할 수 없었다. 그러나 대통 령이 되고 정부를 운용하기 시작하는 순간 부터 능력은 현실의 잣대를 피해가기 어렵 다. ‘17초 대독 사과’는 이런 문제의식에 박근 혜 정부가 상당히 무지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대통령이 되는 것이 꿈의 전부가 아니었다 는 점에서 박 대통령에 대한 기대는 그 반대 자들조차 거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상황 은 급변하고 있다. 리더십 부재라는 우려를 벗어던질 묘수를 박근혜 정부가 만들어낼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
하나의 사실이 다층적 의미를 띨 수 있다 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정치는 출발한다. 정치는 절대적인 객관을 갖는 과학의 세계 가 아니라 엔(n)개의 복수적 입장을 만족시 키는 다원성의 세계(여야 한)다. 이 상호주관 성을 절대자가, 독단자의 힘으로 무너뜨리면 정치는 불안하고 위협적인 것이 된다. 민주 적 권력자는 민심의 입장에 최대한 복무하 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존재를 유지해야 하 고, 신뢰를 획득해야 한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그걸 버렸다. 17초 사 과를 끝으로, 마치 그런 일은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이는 그 자체로 반정치적인 것이고, 자신의 행위를 절대화한다는 점에 서 위험한 불통이다. 설령, 스스로를 북극성 이라 믿어도 정국을 ‘무신정권’ 시절처럼 운 영해선 곤란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김완 <미디어스>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