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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원세훈-남재준 위험한 말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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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3-25 21:19 수정 : 2013-03-30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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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후보는) 국가정보원 여직원 사태에서 발생한 여성인권 침해에 대해서 한마디 말씀도 없고, 사과도 안 했다. (민주통합당 쪽은) 집주소를 알아내기 위해 고의로 성폭행범이나 하는 수법으로 차를 받았다.” 지난 대선 직전인 12월16일 열린 대선후보 TV토론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남긴 말이다.

“허위 사실 유포에 선제적으로 대처하라”

이명박 정부의 마지막 국가정보원 수장인 원세훈 국정원장(왼쪽)과 박근혜 정부의 첫 국정원장이 될 남재준 후보자가 공유하는 ‘종북몰이 연대’의 끝은 어디일까. 남 후보자의 길은 과연 전임자와 얼마나 다를 것인가. 국회사진기자단
그러나 의혹은 사실로 드러났다. 지난 3월18일 <한겨레> 보도와 진선미 민주당 의원의 폭로를 통해서다. 원세훈 국정원장 취임 직후인 2009년 5월부터 2012년 11월까지 국정원 내부 전산망에 올라온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을 보면 국정원이 지속적·반복적으로 국내 정치에 개입한 흔적이 드러난다.

역시 전가의 보도는 ‘종북’ 낙인이었다. 민주노총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4대강 관련 시민단체, 야당 소속 국회의원과 단체장 등 정치적 반대자들을 ‘종북 세력’으로 규정했다. ‘우리 편’이 아니라면 종교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2011년 2월18일자 ‘말씀’에는 “종북세력 척결과 관련 북한과 싸우는 것보다 민주노총·전교조 등 국내 내부의 적과 싸우는 것이 더욱 어려우므로 확실한 징계를 위해 직원에게 맡기기보다 지부장들이 유관 기관장에게 직접 업무를 협조하기 바람”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천안함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고 주장하던 인물”이라며 최문순 강원도지사를 겨냥했고, 4·11 총선 뒤엔 “다수의 종북 인물들이 국회에 진출함으로써 국가 정체성 흔들기, 원(국정원)에 대한 공세가 예상되니 대처할 것”이라는 주문도 있었다. 같은 해 10·26 재보선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이 당선된 직후에는 “특히 종북 세력들이 선거 정국을 틈타 트위터 등을 통한 허위 사실 유포로 국론 분열을 조장하므로 선제적으로 대처하라”고 지시했다. 국정원 직원 김아무개씨는 이같은 지침에 따라 충실히 댓글 등을 작성해 유포한 셈이다. 여론 조작에 활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계정도 여럿 발견됐다.

현행 국가정보원법 제9조는 국정원장·차장 및 직원이 ‘정당이나 정치단체에 가입하거나 정치활동에 관여하는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직위를 이용하여 특정 정당이나 특정 정치인에 대하여 지지 또는 반대의견을 유포하거나, 그러한 여론을 조성할 목적으로 특정 정당이나 특정 정치인에 대하여 찬양하거나 비방하는 내용의 의견 또는 사실을 유포하는 행위”는 명백한 범죄다. 국정원법은 이를 위반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과 5년 이하의 자격 정지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직권을 남용해 “다른 기관·단체 또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하거나 사람의 권리 행사를 방해하는” 일도 7년 이하의 징역과 7년 이하의 자격 정지에해당하는 금지 사항이다. ‘이명박의 남자’ 원 원장은 이 두 조항을 모두 위반한 셈이다.

국정원에 의해 ‘종북’으로 낙인찍힌 단체들은 그를 국정원법 위반, 명예훼손, 업무방해 혐의 등으로 고소했다. 문희상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원세훈 원장의 구시대적 행태는 민주주의 근본을 파괴하고 국기를 문란케 한 중대한 범죄행위”라고 맹비난했다. 박용진 대변인도 “대선 직전 국정원 불법선거 개입 사건을 감싸고 돌며 살벌하게 야당을 공격했던 박근혜 대통령은 결코 이 사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꼬집었다.

휴전 이후 현재는 ‘전복전 2기’


박근혜 정부의 첫 국정원장은 이명박 정부의 마지막 국정원장과 과연 다른 행보를 보여줄까? 그 주인공인 남재준 국정원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 보고서는 진통 끝에 지난 3월20일 국회 정보위원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그가 보인 행태는 결코 전임자에 뒤지지 않는다. 남 후보자는 현역 군인과 학생군사학교(ROTC) 생도 등을 대상으로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모두 21차례 진행한 특강에서 제주 4·3 항쟁을 “북한의 지령으로 일으킨 무장폭동 내지는 반란”이라고 규정하는 등 심각한 수준의 이념적 편향성을 내보였다.

김현 민주당 의원이 공개한 강연자료 ‘북한의 대남전복전략 실체와 우리의 자세’에 따르면, 남 후보자는 자신만의 전쟁을 고독하게 수행하는 투사형 인물에 가깝다. 그는 현재 한반도의 상황을 ‘전복전 2기’로 규정한다. 해방부터 한국전쟁까지의 시기가 남북체제가 서로 상대방을 무너뜨리려는 ‘전복전 1기’라면, 휴전 이후 현재까지도 이같은 ‘전복전’은 계속되고 있다는 게 남 후보자의 인식이다. 남 후보자는 “6·25 전쟁으로 붕괴 내지는 지하에 잠복했던 좌파 세력은 외형적으로 대한민국의 국민을 대표하는 단체들로 위장하기 위한 필요에서 북한 통전부의 지도하에 조직된 각종 단체들과 연대를 맺음으로써 명실상부한 통일전선을 구축했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민족공조론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감상적 민족주의에 빠져든 결과 좌파들의 친북정책을 암묵적으로 묵인 내지는 동조하고 있어 대한민국 수호를 이야기하면 수구꼴통으로 매도된다”며 “대한민국 수호의 초석이 되는 군에서 민족공조론이 거론된다면 이날이야말로 대한민국 공산화가 완성되는 날로 역사는 기록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시는 좌파들이 발붙이지 못하게…”

남 후보자는 “전교조를 비롯한 사회 일각의 편향된 시각을 가진 이들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학생들을 좌편향적으로 의식화해 6·25는 북침이고 미국이 주적이라고 답하는 학생들이 60~70%에 이르게 됐다”며 “다시는 이 땅에 좌파들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그 토양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고 이들을 뿌리째 뽑아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도대체 뿌리 뽑자는 좌파가 누구냐”는 질문이 나오자, 남 후보자는 “북한의 인민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 좌파”라고 답했다. 불법과 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정치적 반대자를 ‘종북’으로 몰아세우고 정권의 보위만을 위해 애썼던 전임자의 행태가 백일하에 드러난 뒤다. 국정원 전·현직 수장의 인식을 관통하는, 일종의 ‘종북몰이 연대’가 위험해 보인다는 이야기다.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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