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합헌’ 제조기 이동흡, 헌재소장 임명

944
등록 : 2013-01-07 16:02 수정 : 2013-01-11 10:12

크게 작게

어떤 의미에서 그는 가장 예측 가능한 다수 의견이자 소수 의견이었다. 우리 사회가 한발 더 나아가야 할 순간에 다른 이들과 함께 과거를 지지했고, 다른 이들이 한발 앞으로 나갈 때조차 홀로 과거에 남았다. 그의 선택지를 예상하는 것은 내기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랬던 그가 박근혜 정부 5년보다 긴 임기 6년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로 지명됐다.

2006년 한나라당 몫으로 선임

새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로 지명된 이동흡 전 헌법재판관.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협의한 결과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이명박 대통령은 1월3일 새 헌법재판소장으로 이동흡(62·사법시험 15회) 전 헌법재판관을 임명했다. 헌법은 대통령, 국회, 대법원장에게 헌법재판관 3명씩을 임명·선출·지명하는 권한을 주고 있다. 헌재 소장을 포함해 헌법재판관 9명의 임명 권한은 대통령에게 있다. 청와대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쪽과도 상의했다”고 했고, 박 당선인 쪽도 “청와대와 협의했다”고 밝혔다.

대구 출신에 강경 보수 성향을 보이는 이 후보자의 헌재 소장 지명을 두고 헌재 안팎에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가 많다. 헌재 소장 물망에 올랐던 이들 가운데 “최악의 선택”을 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 후보자는 2006년 9월 당시 한나라당 몫으로 헌법재판관에 선임됐다. 그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대법원 외에 헌법재판소를 설치한 나라에서는 상대적으로 사법적극주의를 취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견해에 동의한다”고 했다. 법의 자구에 얽매이지 않는 사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했지만, 2012년 9월 퇴임할 때까지 그는 주요 사건마다 정권 옹호적인 ‘합헌’ 제조기 역할을 자임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를 계기로 위헌 여부를 다투게 된 야간 옥외집회 금지 사건에서 위헌·헌법불합치 의견을 낸 7명의 재판관과 달리 이 후보자는 야간 옥외집회 처벌(합헌) 의견을 고수했다. 인터넷 경제논객 ‘미네르바’ 사건에서도 헌재는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며 위헌 결정을 내렸지만, 이 후보자는 “공공질서 교란을 방지해야 한다”며 합헌 의견을 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집회를 막으려고 경찰이 버스를 동원해 서울광장 주변을 봉쇄한 ‘경찰 차벽’ 사건에서도 이 후보자는 법정 의견(위헌)과 멀찍이 떨어진 합헌 쪽에 섰다. 2012년 인터넷 실명제 사건에서는 다른 재판관들과 함께 위헌 쪽에 섰지만, 2011년 비슷한 쟁점에서 이미 한정위헌 결정이 나온 인터넷 선거운동 금지 사건에서는 합헌 의견에 섰다. 헌재 안에서는 “대세가 이미 기운 사건이라 위헌 쪽으로 따라온 것 아니겠느냐”는 말이 나왔다. 그는 친일재산 환수법, 일본군 위안부 배상청구권 문제에서도 일부 위헌, 각하 의견을 냈다.

헌재 관계자는 “헌재 소장은 이념, 정치 성향, 출신 등에서 중도적인 분이 되는 것이 좋다. 이 후보자는 그런 점에서 최대 약점을 지닌 분”이라고 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3월에 퇴임하는 송두환 재판관 자리까지 고려하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헌법재판관들 성향이 한쪽으로 몰렸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이 후보자가 막무가내로 강경하기만 한 ‘허당 보수’는 아니라는 평가도 있다. 합헌 의견을 내더라도 결론을 이끌어가는 과정이 법리적으로 탄탄하다는 것이다.

본인 스스론 ‘중도’ 평가

정작 이 후보자 스스로는 본인을 ‘중도’라고 평가한다. 그는 2006년 국회 인사청문회 서면답변에서 “미국에서는 사회·경제적 입법이 개인의 재산권과 충돌할 때 국가에 입법재량권을 넓게 인정하는 것을 진보, 개인의 재산권에 우위를 두는 것을 보수로 평가한다. 반면 기본권 분야에서 국가 공권력 행사를 최대한 억제하는 것을 진보로, 그 반대의 것을 보수로 각각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런 의미에서 본인은 “중도적”이라고 했다.


헌재 안에서 이 후보자는 ‘흡사마’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그의 독특한 성향을 에둘러 말해주는 별명이다. 그의 국회 인사청문회는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부터 알려주는 청문회가 될 듯하다. 박근혜 당선인에게는 꽉 막힌 ‘인사 취향’에 대한 첫 청문회가 될 것이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