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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12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메가박스에서 열린 영화  시사회에서 고문 피해자 최양준ㆍ김태룡ㆍ박동운ㆍ김철(왼쪽부터)씨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튿날 새벽 1시까지 고문이 지속되자 김근태는 고통에 못 이겨 소리소리 질러댔다. 목 안에서는 피냄새가 역하게 올라오고, 콧속에서는 단내가 계속 피어올랐다. 속이 빈 위는 계속 헛구역질을 해댔다. 그는 생각했다. “나 자신을 죽음으로 한 발짝 나아가게 하는 길이라도, 지금의 이 고통을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렇게 된다면 무엇이라도 받아들이겠다.” 반국가단체를 결성했다고 자백했다. 그 허위 자백이 죽음을 가져온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덮쳐누르는 전기고문과 물고문의 고통을 우선 모면하기 위해서였다. 고문대에서 내려와 자리에 앉으니 그냥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내가 죽게 되는구나. 이렇게 해서 죽는 것이구나. 내 나이 마흔으로 이 세상을 떠나는구나.” 피해자들 “고문이 파괴한 삶 생략 아쉬워” 9월26일 김근태는 서울지검으로 이송됐다. 남편의 행방을 찾지 못해 헤매던 아내 인재근(59ㆍ현 민주당 의원)씨가 검찰청사 승강기 앞에서 기적적으로 그와 마주쳤다. 김근태는 1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자신이 당한 처참한 고문을 이야기했고, 발과 팔꿈치의 상처와 발등에 시커멓게 남아 있는 전기고문의 흔적을 보여주었다. 아내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명의로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 원한다’는 유인물을 작성해 고문 사실을 알렸다. 재야와 정치권이 하나로 뭉쳐 대책위를 결성하고, 미국 인권단체에도 호소했다. 미국 <뉴욕타임스> 등에서 고문 사실을 크게 보도했다. 하지만 고문 피해자에게 모두 인재근 같은 아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박동운(67)씨는 1981년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서울 남산 지하에서 60여 일의 고문 끝에 “아버지를 만나 두 차례 월북하고 간첩활동을 했다”고 허위 자백을 해 18년간 징역살이를 했다. 35살 가장이 53살로 세상에 나왔더니 가족은 낯선 타인이 돼 있었다. “감옥에서 막 나왔을 때 집에서는 내 자리가 없었고, 길거리 에 나가면 간첩새끼, 빨갱이새끼 간다고 했다. 그때는 교도소에 다시 들어가고 싶더라.” 재일동포였던 김장호(71)씨는 출산을 앞둔 아내를 일본으로 데려가려고 한국에 왔다가 김포공항에서 안기부에 붙잡혔다. 일본에서 북한을 방문한 일이 빌미가 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6년간 감옥살이를 하다가 출소했더니 아내는 “차라리 살인자 같으면 용서할 수 있지만 간첩은 안 된다”며 떠났다. 김근태가 고문을 폭로한 지 4년이 지난 1989년 5월, 김철(73)씨가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남영동은 변함없이 그를 간첩으로 만들었다. 김철씨는 “맞고 고문당한 건 지나간 것이니 잊힌다 해도, 가족·인간관계가 깨지고 말살된 것은 분하고 참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7년의 감옥살이 동안 혼자 독방에서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다. “간첩이 아닌데 간첩이 돼 징역을 살고 있다는 것, 차라리 그때 내가 고문실서 그냥 죽을걸, 그랬으면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을 텐데….” 영화 <남영동 1985>를 관람한 박동운·김태룡·김철씨 등 고문 피해자들은 고문이 남긴 삶의 파괴가 생략된 걸 아쉬워했다. 섣부른 용서에도 반대했다. 김철씨의 말이다. “고등학생도 공소사실을 보면 고문으로 조작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검사가 묵인해 죄를 덮어씌웠고 판사가 중형을 선고했다. 그들은 아직도 반성하지 않으니 그런 세상이 다시 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느냐?” 그는 2010년 2월 서울고법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검찰이 상고해 2012년 7월에야 무죄가 확정됐다. 용서할 수도 없고, 용서해서도 안 돼 2009년 11월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박동운씨는 고문 가해자를 용서할 수 없고 용서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고문을 당할 때는 자유로운 몸이 되면 고문한 사람들의 옆구리에 총이라도 쏘고 칼로 목을 베고 싶었다. 수년이 지나서 개인적으로 보복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졌다. 하지만 공소시효가 지났더라도 인권을 탄압한 사람들을 처벌할 수 있는 특별법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니까 여전히 많은 고문 피해자들이 세상과 인연을 끊은 채 숨어 살고 있다. 이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글·사진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