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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임동원에게 물귀신 붙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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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8-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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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해임건의안 제출로 위기에 몰려… 자민련의 선택에 따라 대북 포용정책 결판

사진/ 방북단 돌출행동 관련 책임 문제로 위기에 몰린 임동원 통일부 장관. 임 장관은 햇볕정책의 상징적인 인물이다.(김경호 기자)
삼고초려(三顧草廬)라는 말이 있다. 유비가 제갈량을 세번 찾아가 간청해 군사로 삼았다는 고사다. 김대중 대통령과 임동원 통일부 장관의 관계는 이 ‘삼고초려’에 견줄 만하다.

김 대통령과 임 장관이 첫 인연을 맺은 것은 94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는 김 대통령이 92년 대선패배 뒤 정계은퇴를 선언한 시절로,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으로 있었다. 임 장관은 통일부 차관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나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있었다. 김 대통령은 임 장관에게 “함께 일하자”며 사람을 보낸다. 김 대통령은 임 장관이 “건강이 안 좋다”는 등의 이유로 거듭 고사하자 친서까지 직접 보낸다.

김대중 정부 대북정책 기획조정자로 활약


임 장관은 사석에서 기자들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한 적이 있다. “오랜 공직생활 때문인지, 당시 김 대통령에 대해 별로 좋지 않게 생각했다. 과격한 야당총재라 할까, 뭐 그런 부정적 이미지였다. 내키지 않았는데 ‘한번 만나자’는 연락이 몇 차례 더 왔다. 조금 고민이 됐다. 주위 사람과 상의했는데, ‘한번 만나는 거야 어떻겠느냐’고들 했다. 그래서 점심을 함께했다. 만나 얘기해보곤 깜짝 놀랐다. 통상 정치인들은 통일·안보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김 대통령은 달랐다. 세세한 부분까지 뛰어난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 전문가라고 하는 내가 놀랄 정도였다. 이야기를 마치고 김 대통령이 ‘함께 일하자’고 제의했는데, 내 대답에 나도 놀랐다. 나도 모르게 ‘예’, 하고 만 것이다.”

며칠 뒤 임 장관은 아태평화재단 사무총장으로 취임했고, 첫 작업이 남북통일방안의 완성. 그 결실이 95년 출간된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이었다. “김 대통령과 서로 견해가 일치할 때까지 의견교환을 거듭했다. 어떤 때는 호텔에서 함께 하룻밤 묶으며 다음날까지 토론하기도 했다.” 임 장관의 회고다. 임 장관이 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대통령 외교안보 수석비서관, 국정원장, 통일부 장관 등으로 승승장구하며 김대중 정부 대북정책의 기획조정자로 활약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던 셈이다.

이런 임 장관이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렸다. 한나라당이 8·15평양민족대축전에서 일부 방북단의 돌출행동을 문제삼아 8월24일 국회에 해임건의안을 제출한 것이다. 한나라당의 논리는 “임 장관이 졸속 방북승인의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한다”는 것. “방북단 파견이 잘못돼 국론분열과 남남갈등을 일으키며, 이적단체를 남북한간의 창구로 활용하고 남북협력기금을 그런 행사비용에 지원하는 등의 행위는 임 장관이 그만둘 충분한 사유가 된다.”(김기배 사무총장) “이번 방북단에 97년 대법원에 의해 이적단체로 판결받은 범민련을 포함시킨 것은 임 장관이며 해방 이후 처음으로 남남갈등이 일어나고 그동안 국정원장 등을 거치며 대북정책을 망친 만큼 그는 더이상 통일부 장관의 자격이 없다.”(권철현 대변인)

임 장관에 대한 한나라당의 공격은 처음이 아니다. 한나라당은 6월23일에도 북한 상선의 제주영해 통과 등을 문제삼아 해임건의안을 제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말고도 한나라당은 잊혀질 만하면 한번씩 임 장관의 과거 전력에 의혹을 제기하며 공격해왔다. 대표적인 것이 50년부터 53년까지의 임 장관의 이력. 이번에도 한나라당은 이 ‘낡은 칼’을 또 꺼냈다. 권철현 대변인은 8월26일 기자간담회에서 “우리 현대사에서 중요한 시기인 50년부터 53년까지 임 장관의 이력은 베일에 가려져 있는 부분이 많다. 6·25 발발 이후 월남한 시점인 1·4후퇴 때까지 뭘 했는지, 그리고 당시 어떤 신분으로 어떻게 내려왔는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의혹은 99년 임 장관이 처음 통일부 장관이 된 직후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야당에 의해 이미 제기된 것이었다. 지난 4월10일 국회 본회의에서는 강인섭 한나라당 의원이 일본의 극우 시사주간지 <사피오>의 기사를 인용해 “임 장관이 고교졸업 뒤 김일성 종합대학에 입학했고 6·25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에 입대했다는데 사실이냐”고 다시 의혹을 제기하자, 임 장관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 6·25 때 월남해 50년 12월 국민방위군으로 입대했고, 이것이 해체된 뒤 2년 동안 미군부대 군속으로 근무하다 육사에 입학했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청와대·민주당, “임 장관에게 책임 없다”

사진/ 청와대는 임동원 정관에게 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다. 지난 8월24일 통일외교안보 분야 장관 간담회에 앞서 김대중 대통령과 임 장관이 인사를 하고 있다.(이정우 기자)
임 장관 인책론에 대해 청와대와 민주당의 태도는 단호하다. 김대중 대통령은 24일 이한동 총리와 통일·외교·국방장관이 참여한 오찬간담회에서 “최근 남북관계가 일시적으로 정체를 맞고 있지만 자신감과 인내심을 갖고 대북 화해협력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해 임 장관에 대한 신임을 나타냈다. 박준영 청와대 대변인도 이날 “방북단 일부의 돌출적인 행동은 문제지만 임 장관의 책임을 묻는 것은 다른 문제”라며 “임 장관의 경질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민주당에서도 전용학 대변인이 나서 “야당이 대북정책을 총괄하는 주무장관에 대해 이력을 날조해 색깔공세를 펼치고 해임안 공세를 남발하는 것은 무책임한 태도”라고 공박하는 등 맞서고 있다. 민주당은 한나라당의 공세가 계속되자 8월25일 자료를 내고 “정권교체 이후 3년 반 동안 야당에 의해 제출된 탄핵소추안과 해임건의안, 사퇴건의안이 모두 26건으로 김영삼 정부 5년간 9건, 노태우 정부 5년간 9건과 비교해볼 때 지나치다”며 “야당이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정치공세 차원에서 해임건의안을 내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민주당의 뜻대로 임 장관이 자리를 계속 지킬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자민련이 한나라당의 주장에 동조하고 나선 것이다. 자민련은 8월23일과 24일 거듭 공식성명을 내고 “이번 평양 8·15행사에서 남쪽 대표단들이 자행한 이적행위와 북한의 저의를 알면서도 친북세력들의 방북을 허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우리 정부가 북한의 대남통일전략에 이용당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임 장관 스스로 사퇴하는 것이 국민통합과 남북관계에 바람직하다”며 임 장관의 사퇴를 주장했다. 이완구 총무도 “해임건의안이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왔는데 당의 분위기로 봐선 원내대책을 수립하는 총무로서 대단히 곤혹스럽다. 이런 어려운 경우를 상정해서 스스로 임 장관이 거취를 결정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문제는 김종필 명예총재의 태도. 김 명예총재는 24일 일본 출국에 앞서 기자들과 만나 임 장관의 인책문제와 관련해 “결론적 결심이 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자꾸 이런저런 얘기가 나오니 뭐라고 대답하기 무섭다”며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여권 일부에서는 28일 김 명예총재가 일본에서 귀국한 뒤 DJP회동을 통해 공조를 회복하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섞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문제가 해결될지는 미지수다. 우선 자민련의 태도에는 이미 김 명예총재의 의중이 실린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최근 자민련의 움직임은 민주당으로부터의 독자성을 강조하며 ‘JP 대망론’을 적극 띄우고 있는 국면과 연관돼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김 명예총재가 DJP공조 차원에서 임 장관의 해임을 반대한다 하더라도 과연 자민련 의원들이 따르겠느냐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김 명예총재의 당 장악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상황 때문이다. 실제 자민련에서는 “당이 공식논평을 두 차례나 내고 임 장관의 사퇴에 거듭 못을 박은 만큼 김 명예총재도 당의 입장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은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완구 총무는 “안보·보수정당인 자민련이 입장을 선회할 경우 당은 물론 김 명예총재도 어려운 상황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JP 대망론’도 물거품이 될 것”이라며 “임 장관 스스로 거취를 결정하는 것말고는 달리 해법이 없다”고 말했다.

‘JP 대망론’에 DJP공조 흔들리려나

사진/ 칼자루를 쥔 자민련. 민주당과 자민련 핵심 인사들의 한자리에 모였다.(이용호 기자)
임 장관의 해임건의안 통과여부는 자민련이 열쇠를 쥐고 있다. 한나라당에서 이탈표가 없을 경우 4표만 보태면 과반수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6월 임 장관의 해임건의안은 민주당의 요구에 따라 자민련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에 불참하는 방식으로 표결 자체를 무산시켜 폐기시켰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박순용 검찰총장과 신승남 대검차장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됐을 때는 자민련 의원들이 본회의 참석을 고집하자, 민주당은 여당 사상 처음으로 여당의원들이 국회의장의 본회의장 진입을 막아 무산시켜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임 장관 문제는 그가 햇볕정책의 상징과 같은 인물라는 점에서 대북 포용정책의 앞날과 직결돼 있다. 또 자민련이 독자적인 정체성 확립을 선언한 이후 적용될 DJP공조의 첫 사례라는 점에서 향후 정국 움직임의 바로미터가 될 전망이다. 과연 어떤 결론이 내려질지 주목된다.

박병수 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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