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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가장 힘든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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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8-2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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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에 밀려 여야 총재회담 성사되는가 싶더니…안동선 최고위원 발언으로 다시 난관에 봉착

사진/ 영수회담 제의의 효과 극대화. 김대중 대통령이 8·15 경축사라는 형식으로 여야 총재회담을 제안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청와대사진기자단)
지난 1월4일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여야 총재회담은 민주당 의원의 자민련 이적 등 DJP 공조복원문제와 옛 여당의 안기부예산 총선자금 유입사건의 검찰수사 등의 현안을 둘러싸고 현격한 시각차를 보이며 날카로운 설전을 벌이다 끝이 났다. 당시 민주당 동교동계 의원은 이 총재회담 결과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김 대통령이 이회창 총재에 대한 마지막 신뢰마저 잃은 것 같다. 도저히 국정운영의 협조자가 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김 대통령은 현실적인 사람이다. 그동안 국정운영에서 이 총재가 최소한의 성의만이라도 보였으면 그렇게까지 하진 않는다. 이런 상황은 이 총재에게도 소망스럽지 못하다. 우리나라 정치현실에서 대통령을 적으로 돌리고 차기를 꿈꾸는 것은 쉽지 않다. 김 대통령도 후보 시절 대선과정에서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중립화를 이끌어내는 데 전력을 쏟았었다.”

이례적인 8·15 경축사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는 게 정치판의 생리라 했던가. 이 동교동계 의원의 해석에 따르면 다시는 자리를 함께할 일이 없을 것 같던 두 사람이 7개월이 지난 지금 다시 만남을 추진하고 있다. 김 대통령이 이번 8·15 경축사에서 여야 영수회담을 제의한 다음날, 그 민주당 동교동계 의원을 다시 찾았다. “지난번 영수회담에서 서로 갈 길을 가겠다고 냉정하게 돌아섰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난다는데….” 그러자 이 의원은 대뜸 “어쩌겠어. 영수회담, 그것말고 뭐 대안이 없잖아. 하다못해 여야간 대화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줘야지” 했다.


사실 지난 1월 총재회담 결렬 이후 대립을 거듭해온 여야는 6월 언론사 세무조사 등을 고비로 벼랑 끝 대치를 거듭해왔다. 국정운영을 최종적으로 책임지는 여당으로서는 이런 대치국면 장기화에 대한 따가운 여론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언론사 사주에 대한 사법처리가 마무리돼가는 시점이라는 점, 또 내년 대선을 앞두고 마지막 정기국회가 열릴 시점이라는 점이 여당으로 하여금 여야간 관계복원에 나서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여야 총재회담은 제안부터 이례적이다. 우선 8·15 경축사라는 형식을 통해 여야 총재회담을 제안한 것 자체가 처음이다. 그동안 김대중 정부 들어 7차례 이뤄진 여야 총재회담은 대부분 여야간 의견타진 절차를 거쳐 여야 양쪽에서 총재회담 개최사실을 발표하는 과정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이번 여야 총재회담은 이런 과정이 생략된 채 김 대통령에 의해 전격적으로 발표됐다.

더욱이 여당은 이번 영수회담 제의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8월9일 청와대에서 김 대통령이 직접 주재한 최고위원회의에서 몇몇 최고위원이 여야 대치국면 해소를 위해 총재회담을 제안했으나 이런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8·15를 앞두고 경축사의 내용에 여야 총재회담이 포함됐는지 여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당 고위관계자들은 “8·15 경축사는 7천만명 전 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데 국내정치 관련사항은 안 어울리는 것 아니냐”고 대답하는 등 연막을 치기도 했다.

이번 여야 총재회담이 여야 관계정상화의 계기가 될지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애초 한나라당은 이번 총재회담에 대해 부정적인 분위기였다. 8·15 경축사가 발표된 당일 오전까지만 해도 한나라당쪽 관계자들은 대부분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 관계자는 “현재 여야간 대립점은 총재회담으로 풀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언론사 세무조사의 경우 언론사 사주 구속에 그치지 않고 그 밑바닥에는 정국운영과 관련된 큰 그림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가 총재회담으로 풀리겠는가. 또 국정감사를 앞둔 시기다. 국감은 야당의 1년 농사라 할 수 있는데 국감 직전 총재회담을 제안하는 것 자체가 순수하지 않다”고 말했다.

부정에서 수용으로 돌아섰으나…

이런 입장은 이날 오후 들어서 수용쪽으로 돌아섰다. 이런 태도변화의 배경에는 김 대통령의 대화 제의 자체를 야당 총재가 외면하는 모습이 여야간 무한 대결구도에 염증을 내는 국민여론에 부정적인 이미지로 남을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언론사 세무조사를 정권의 언론탄압 음모라며 강경대응으로 맞선 이 총재와 한나라당은 그동안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도 하락을 감수해야 했다. 또 시기적으로 여야간 대치국면의 한 요인이었던 언론사 사주문제가 처리되는 등 쟁점현안이 일단락됨에 따라 국면전환의 필요성도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권철현 대변인은 이 총재와 논의를 거친 뒤 “민생경제와 대북정책 등을 비롯한 주요 국정현안을 대화를 통해 풀어보자는 진지한 자세라면 영수회담은 의미가 있다”고 수용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현재 정치권 분위기는 총재회담 성사 자체가 불투명한 상황. 안동선 민주당 최고위원이 총재회담 제의 하룻만인 8월16일 충북 청주에서 열린 국정홍보대회에서 이회창 총재를 겨냥해 “남북이산가족 상봉 때 이회창 한X만 안 울었다”, “친일파는 3대에 걸쳐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발언하자 이 총재와 한나라당이 발끈한 것이다. 이 총재는 “야당 총재에 대해 시정잡배만도 못한 저질스런 허위비방과 인신공격을 일삼는 여당행태를 보면서 대통령의 영수회담 제의에 과연 진실성이 담겨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공박했다. 한나라당은 총재회담의 전제조건으로 김 대통령의 사과와 안 위원의 사퇴, 재발방지 약속 등을 요구하고 나선 데 이어 김 대통령이 목포상고 재학 시절 일본군복 차림으로 찍은 사진을 실은 당보를 발행하는 등 초강경대응에 나섰다.

안동선 최고위원은 자신의 발언이 물의를 빚자 8월20일 기자회견을 열고 “한나라당은 본인의 연설내용을 빌미로 총재회담을 무산시켜서는 안 될 것”이라며 자진사퇴 의사를 표명했으나 여야관계는 감정싸움 양상으로 확대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안 최고가 사퇴 기자회견에서 이 총재 부친의 친일논란을 재론하고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사형재판의 재판관이었다는 점을 언급하자 한나라당이 ‘위장사퇴’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권철현 대변인은 성명을 내고 “안 최고의 사퇴는 교묘하게 짜여진 위장사퇴이자 이 총재 흠집내기를 더욱 강화한 정략적 사퇴로 뒤통수치기의 새로운 유형”이라며 대통령의 직접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 등을 촉구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 지도부도 “안 최고가 사퇴할 이유가 없다”며 안 최고의 사퇴를 번복하도록 설득하는 등 맞대응하고 있다. 전용학 대변인은 “당내에 총재회담은 필요하지만 이런 식으로 굴욕적으로까지 회담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분위기가 많다”고 전했다.

없던 일로 돌리긴 쉽지 않을 것

사진/ 다시는 보지 않을 것 같더니…. 날카로운 설전만 벌이다 끝난 지난 1월의 여야 총재회담.(청와대사진기자단)
총재회담 성사 여부는 이 총재가 싱가포르에서 되돌아오는 21일 이후 가닥이 잡힐 것으로 보고 있다. 정치권은 회담 성사여부를 반반으로 보고 있다. 여야 모두 경색정국의 돌파구 마련의 필요성은 느끼고 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김 대통령이 정국파행의 돌파구로 총재회담을 오래 전부터 구상해온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쪽에서도 총재회담을 활용해 정국을 적극적으로 풀어갈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여전히 회의적인 시각도 남아 있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여당이 총재회담을 제의한 배경을 의심스러워하는 시각이 여전히 당내에 있다. 그동안 총재회담이 거의 대부분 아무 성과 없지 않았느냐, 오히려 총재회담 뒤 여당이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여야간 불신만 깊어지지 않았느냐는 것이다”라고 전했다. 이 총재도 19일 싱가포르 출국에 앞서 “우리 당이 총재회담 개최조건에 대한 입장을 밝힌 만큼 여권이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자”며 “국민에게 희망과 기대를 줄 수 있는 총재회담이 돼야지 그렇지 못하면 총재회담은 안 한 것만 못하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고 여권의 성의있는 조처가 없는 한 총재회담에 나설 뜻이 없음을 내비쳤다. 실제 회담을 위한 막후 예비접촉도 난항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다른 관계자는 “이 총재의 핵심 측근이 여권과 협상을 벌이고 있으나 핵심인 언론사주 처벌과 대북문제 등과 관련한 의견 차이가 커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한나라당이 이미 수용의사를 밝혔던 여당의 총재회담 제의를 딱 잘라 없던 일로 되돌리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여당의 태도를 문제삼아 김 대통령의 공개적인 대화제의를 다시 거부하기에는 여야간 대화복원을 기대하는 국민여론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설혹 한나라당이 총재회담을 할 의사가 없더라도 대화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방식을 택할 것으로 보인다.

여야 최고책임자간의 만남조차 쉽게 결정되지 않을 만큼 뒤틀리고 꼬인 우리 정치권이 과연 어떻게 대화정국을 이끌어내는 정치력을 발휘할지 지켜볼 일이다.

박병수 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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