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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안철수, 복지·정의·평화 들고 나서나?

부산대 강연 통해 정치 참여 쪽으로 한 발 더 다가선 안철수 원장… 야권의 난맥상 속에도
이르면 6월 말 결단 관측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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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6-07 10:35 수정 : 2012-06-08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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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지난 5월30일 부산대 강연에서 “사회 변화에 대한 열망이 저를 통해 분출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복지·정의·평화라는 3가지 화두를 제시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뛰라, 마!”

가파른 비탈길을 뛰어오르던 그는 뒤처지는 친구를 돌아보며 일갈했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강연이 열린 5월30일 저녁 부산대 학생들의 마음은 다급한듯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강연장인 경암체육관 주변은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입장 개시와 함께 3천 개의 좌석이 순식간에 꽉 찼다.

“사회 변화 열망이 저를 통해 분출된다고 생각”

이날 행사를 주최한 부산대 총학생회 관계자들이 “총학생회 누리집에서 강연을 생중계하겠다”고 안내했지만 강연장 주변을 구불구불 휘감은 행렬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들은 안 원장의 강연이 시작되고, 먼발치에서라도 그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다는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뒤에야 발걸음을 돌렸다. 안 원장이 밝은 표정으로 무대에 오르자 열광적인 함성과 박수 소리가 행사장을 뒤흔들었다. 사회를 맡은 임인애 총학생회장의 표현대로 “우리 시대 청년의 멘토”다운 열광이었다.

4·11 총선 이전까지 안 원장은 정치 참여의 가능성을 열어 두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역할은 지금까지 머문 이 자리에서 (여야) 양쪽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쇄신 노력을 하게 만드는 것”(3월27일 서울대 강연)이라는 태도를 취해 왔다. 총선 이후 첫 공식 행사인 이날 부산대 강연으로 안 원장의 행보는 정치 참여 쪽으로 한 발 더 이동했다. ‘만일 정치를 하게 된다면’이라는 식의 가정법은 여전했지만, 고민의 결은 한층 구체적이었다.

“일반적으로 정치의 뜻을 세우는 분을 보면 의지를 갖고 자신의 뜻을 대중에게 밝히고 찬성하는 국민의 지지율을 바탕으로 행동해요. 제 경우는 사회 변화에 대한 열망이 저를 통해 분출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온전히 저 개인에 대한 지지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교만이 되겠죠. 만일 정치를 하게 된다면 과연 그 기대와 사회적인 열망에 어긋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게 도리입니다. 제가 지금 그 과정 중에 있어요.”

안 원장은 이날 강연에서 복지·정의·평화라는 화두도 제시했다. 안 원장은 “제가 말하는 복지는 단순하고 분배만 하고 소비만 하는 좁은 의미의 복지가 아니라, 일자리와 복지가 긴밀하게 연결돼 선순환하는 넓은 의미의 복지”라고 설명했다.‘정의’와 관련해선 “모두가 같은 출발선상에 서게 하는 것과, 경쟁할 때 반칙이나 특권이 없고, 패자에게 또다시 기회를 주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의 세 가지 요소”라고 정리했다. 이어 그는 “우리는 북한과 60년째 정전 상태로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평화체제 구축은 필수”라며 “궁극적 평화체제는 통일이겠지만 단기간에 통일이 이뤄지기는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통일이라는 목표까지 가는 동안 평화를 지키고 평화체제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사태와 종북 논란, 문재인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제기한 ‘공동정부론’ 등 민감한 정치적 현안에 대한 견해도 밝혔다. 그동안 강연에서 안 원장이 현안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자제해온 사실을 고려하면 의미심장한 변화다. 즉석에서 이뤄진 질의응답도 아니었다. 부산대 총학생회가 학생들에게서 미리 취합해 정리한 8개 질문 중 일부를 통해서다. 안 원장은 때때로 준비된 원고를 참조하며 답변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안 원장은 “다양성의 시대에 소수적 약자를 대변하는 진보정당은 꼭 필요하고,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진보정당은 다른 정당보다 훨씬 더 민주적인 절차를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종북 논란’과 관련해선 “진보정당의 근간인 인권과 평화 등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잣대가 북한에 대해서 다르게 적용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고 했다.

“맥주 따놓고 오래 두면 김 빠진다”

“이건 사상의 자유와는 별개의 문제예요. 개인의 사상이야 헌법에 보장된 권리죠. 하지만 국가 경영에 참여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은 이에 대한 입장을 솔직하게 밝히는 게 옳다고 봐요. 북한은 우리가 대화할 대상이지만, 보편적인 인권이나 평화 등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요. 그런데 유독 이 문제가 안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렵지 않겠어요?”

중도층을 다분히 의식한 발언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안 원장은 이를 빌미로 대대적인 색깔 공세를 퍼붓고 있는 새누리당과 보수언론도 함께 비판했다. 안 원장은 “이 문제가 건강하지 못한 이념 논쟁으로 확산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부분의 문제는 부분의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다수의 시민이 뽑았던 박원순 서울시장도 일부에서 빨갱이라고 했다”며 “시민들은 결코 어리석지 않으며 우리 사회는 건강한 상식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문재인 상임고문의 ‘공동정부론’ 제안에 대해선 “제가 답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안 원장은 “굳이 저를 거론했다기보다는 앞으로 분열이 아닌 화합의 정치를 하겠다는 그분의 철학을 보여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거절도, 화답도 아닌 원론적 답변으로 직답을 피한 셈이다.

이날 강연 이후 정치권의 반응은 엇갈린다. 이용섭 민주통합당 정책위의장은 “안 원장이 제시한 3대 키워드는 대체적으로 적절하다고 본다”며 “다만 일반적으로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 그분만의 색깔과 각론이 보완된다면 더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에서 윤리위원장을 지낸 인명진 목사는 “안 원장이 복지·정의·평화를 제기한 것은 이 사회에 대한 정확한 문제의 진단”이라면서도 “안 원장은 잊을 만하면 또 나타나고 또 나타나고 하는데 맥주를 따놓고 오래 두면 김이 빠져 못 먹는다”고 꼬집었다. 이날 안 원장이 제시한 화두를 두고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원론적인 가치를 실현 방법 없이 제시했다”며 폄하하는 시각도 정치권에는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조금씩 진전된 의지를 피력하고는 있지만 대선에 출마할 것 같기도, 아닐 것 같기도 한 안 원장을 바라보는 유권자들의 ‘피로감’도 그가 풀어야 할 숙제다. 한때 박근혜 새누리당 전 비상대책위원장을 앞섰던 지지율은 총선 이후 다시 역전돼 양자 대결 구도에서 10%포인트가량의 격차로 벌어졌다. 부산 사하구에 거주하는 조충길(60)씨는 “안철수씨가 참 훌륭한 분인 것은 알지만 대선에서 박근혜하고 붙으면 어렵지 싶다”고 했다. 그는 “부산에선 의리가 중요하다”며 “박근혜에게 한번 마음을 준 사람들이 안철수로 쉽게 돌아서겠느냐”고 되물었다.

강연장에서 만난 부산대 학생 한경준(경제학 4년)씨는 “큰 성공을 거뒀지만 겸손하고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안철수 원장을 친구들 10명 중 8~9명은 좋아하고 지지한다고 하더라”면서도 “안 원장이 대선에 출마한다고 해도 부산의 분위기가 지난 총선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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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만 다 밝혀야 하나”

하지만 총선 이후 전열을 정비하지 못하고 있는 야권의 상황을 고려하면 안 원장 단독으로 대선을 공식 선언하는 것도 쉽지 않은 문제다. 윤희웅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조사분석실장은 이를 ‘전략적 모호성의 전략’이라고 규정했다. 직접적인 출마 선언 이후에 이어질 네거티브 공세를 최소화하는 동시에 정치적 존재감을 유지해야 하고, 또 각종 현안과 관련해 안 원장에게 제기되는 ‘견해 표명’의 압박도 완화해야 하는 삼중의 딜레마를 안고 있다는 이야기다. 윤 실장은 “이처럼 충돌하는 목적함수 속에서 안 원장의 모호한 행보는 당분간 이어질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결단의 시점이 임박했다는 시각도 있다. 안 원장의 서울대 강의는 6월 말께 모두 정리된다. 안 원장이 6월 말~7월 초 이후 모종의 ‘결단’을 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안 원장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김효석 전 민주통합당 의원은 “(6월 말에) 학기가 끝나게 되면 본인이 선택을 밝히게 되리라고 보고 있다”며 “어떤 방향으로든 선택하는 시점이 가까이 오고 있다”고 했다.

안 원장이 최근 유민영 전 청와대 춘추관장을 대변인으로 영입한 대목을 두고도 정치권에선 여야를 막론하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전북 남원 출신으로 고 김근태 고문 보좌진으로 정계에 입문한 유 대변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 캠프 연설담당 비서, 청와대 연설기획비서관실 행정관, 춘추관장 등을 거친 홍보·기획 전문가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때는 평양에서 노 전 대통령을 수행하며 대언론 창구 노릇을 하기도 했다. 유 대변인은 “안 원장이 제기한 복지·정의·평화의 화두가 원론적 선언에 불과하다는 지적은 수긍하기 어렵다”며 “정치권의 그 어떤 주자도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않는 상황에서 정치인이 아닌 안 원장만 모든 것을 공약의 수준으로 밝혀야 하나”라고 반문했다. 심재철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전 세계에서 대학교수가 대변인을 둔 적이 없다”며 “이는 정치활동을 하겠다는 것을 노골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근혜 전 위원장의 한 측근은 “안 원장은 실질적인 대선행보를 시작했는데도 모호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유권자를 우롱하고 있다”고 날선 견제구를 던졌다.

“도전 아닌 할 수 있는 일 선택한 것”

안 원장은 이날 강연에서 ‘도전에 대한 두려움’을 묻는 학생의 질문에 “도전에 대해 잘못 아는 게 많다”며 “도전이라고 하면 익숙한 일을 버리고 완전히 미지의 세계로 떨어지는 것 같아서 겁을 내지만 실제로 도전은 그런 게 아니다”라고 답했다.“의사를 그만두고 백신 회사를 차렸다고 많은 분들이 제가 도전했다고 평가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도전한 기억이 없어요. 백신은 제가 필요해서 밤에 만든 것이고, 나머지 시간에는 의사로서 열심히 일했어요. 그렇게 7년을 지내니 의사로서도 길을 갈 수 있게 됐고, 바이러스 백신의 길에서도 어느 정도 실력이 쌓인 거죠. 그래서 7년 뒤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때 선택할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도전을 한 게 아니라 제가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 거죠.”정치가‘할 수 있는 일 가운데 하나’라는 확신을 안 원장은 이미 했을까. 아니면 머잖아 하게 될까. 시간은 흐른다. 그가 결단의 내용을 밝혀야 할 날이 다가 오고 있다.

부산=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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