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스런 환영행사에 눈살 찌푸리기도… 공동선언은 진지하고 의미있는 성과
8월3일 현지시각 오후 7시40분, 모스크바의 야로슬라브역. 3중 4중의 삼엄한 경계 속에 특유의 인민복을 입은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9일 동안의 시베리아 횡단 대장정 끝에 모스크바에 입성한 것이다.
애초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에 대한 현지언론의 관심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모스크바까지 온 김 위원장의 기이한(?) 국빈방문 형태에 주로 모아졌다. 김 위원장이 모스크바에 도착하던 날 대부분의 현지언론들은 ‘이국적 국빈방문’, ‘기네스북에 기록될 대장정’ 등의 표현으로 김 위원장을 맞았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러시아 방문이라는 정치적 의미보다는 시베리아를 건너온 김 위원장의 특이한 방러 형식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김정일은 우리에게 필요한가”
김 위원장의 이번 철도방문은 무엇보다 현지 공안당국의 지나친 경호대책에 따른 주민들의 불편 때문에 눈총을 받았다. <인테르팍스 통신>은 “전제적이고 비인간적인 국가지도자의 방문에 대해 러시아가 이렇게 요란스럽게 준비해야 하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도 “그 삼엄한 경계가 마치 스탈린 치하의 소련을 연상케 한다”고 꼬집었다. 실제 김 위원장의 도착한 3일, 열차를 이용하려는 주민들은 큰 불편을 겪었다. 이날 오후 들면서 야로슬라브역 등 3개 역이 밀집해 있는 콤소몰광장 전체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됐고, 열차들이 잇따라 연발연착했기 때문이다. <리아 노보스치> 통신은 이날 13개 교외선 열차일정이 모두 변경돼 5만여명이 금요일 오후 교외별장 다차로 가려던 계획을 포기했다고 보도했다. 이 통신은 또 이날 시베리아 횡단철도 전체에서 40∼50개 노선이 연착해 20만명이 불편을 겪었고, 김 위원장 일행의 귀국까지 고려하면 50만명이 김 위원장의 열차여행에 따른 불편을 감수해야 할 것으로 예상했다. 민영 텔레비전는 이날 주민 불편상황을 상세하게 보도하면서 “북한의 위대한 수령이 모스크바를 가둬놓고 있다”고 불평했다.
김 위원장에 대한 러시아 일반국민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주간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김 위원장의 방문에 맞춰 “김정일이 우리에게 필요한가”라는 내용의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이 조사에서는 자유주의적 입장에 서 있는 정치인들과 시민들이 부정적인 시각을 보인 데 반해 다른 일반시민들은 비교적 중립적이거나 호의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시민권회복운동’ 지도자인 엘라 팜필로바는 김 위원장을 ‘환상주의자’로 평가했다. 그러나 ‘노동 러시아’ 지도자 빅토르 안필로프는 “김 위원장과 북한의 존재는 미국과 같은 금전과 우둔함의 우상에 무릎을 조아리는 우리네 정치가들과 사람들에게 그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고 호평했다. 국방과학아카데미 총장 마흐무트 가레예프는 “북한은 우리의 이웃이다. 이 근면하고 재주있는 나라 지도자의 방문은 양국간의 우호와 상호이해를 강화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이런 태도는 언론보도에서도 나타난다. 일간 <이즈베스티야>는 “공산주의의 유령, 김정일 모스크바 도착”이라는 제하에 김정일과 푸틴의 회담이 성과없는 회담이 될 것이라고 김 위원장의 방러 의미를 크게 축소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북한이 원하는 군사기술부분에 대한 협조와 관련해 러시아가 줄 것이 없으며 따라서 북한이 얻어갈 것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번 열차방문을 통해 김 위원장이 노리는 것은 북한에서 ‘위대한 지도자’로 떠받들여지는 김정일 신화에 ‘시베리아 대장정’ 신화를 하나 더 보태는 일종의 선전적인 의미라고 혹평했다.
미국과 대화 가능성은 열어두다
반면 일간 <코메르산트>는 이번 김 위원장의 방러를 비교적 긍정적으로 보도했다. 이 신문은 김 위원장의 방러가 북한을 ‘깡패국’이라는 고립무원한 상태에서 탈출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 보도했다. 또 <이즈베스티야>와 달리 SU-27기, T-90 전차 및 S-300 지니트 미사일 체계의 수입을 포함한 중대한 군사기술제휴 논의가 포함될 것이라는 예측도 덧붙였고, 한반도와 시베리아를 잇는 철도건설사업문제와 이르쿠츠크에서 출발하여 중국을 관통, 한반도까지 연결하게 될 가스관 배설사업을 가장 중요한 관심사라고 보도했다.
김 위원장의 이색적인 국빈방문이라는 이벤트에 초점을 맞추던 러시아 언론들은 4일 김 위원장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상회담 이후 좀더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모스크바 선언’에 제법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우선 ‘모스크바 선언’이 첫 번째 중요성으로 지적하고 있는 점은 러시아와 북한이 선언문 제2항에서 ‘1972년 탄도탄요격미사일 제한조약이 전략적 안정의 초석’이라고 언급하면서 쌍방이 미국을 겨냥한 전략적 공조를 천명했다는 사실이다. 사실 푸틴 대통령은 최근 제노바에서 열린 미-러정상회담에서 미국이 그간 주장해 왔던 국가미사일방어(MD)에 대한 협상을 약속했고, 그 차원에서 얼마 전 미 대통령 안보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가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그리고 그 구체적 실무협상을 7일부터 워싱턴에서 개최할 예정이었다. 따라서 이번 모스크바 선언은 미국과의 회담을 앞두고 국가미사일방어에 대한 러시아의 원칙적 입장을 다시 한번 강조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사실 이런 러시아의 태도를 반영하듯 라이스 보좌관은 북-러정상회담 직전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MD에 대한 러시아의 협상진행 의사를 아직 명확하게 확인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북한이 또 ‘한반도에서의 주한미군 철수문제가 지역안보의 초미의 문제’라는 점을 ‘선언’의 마지막 항목에 추가하고 러시아가 이것을 ‘이해’한 것도 북한과 러시아가 전략적, 지역적 안보문제에 대해 서로를 각각 주요 카드로 삼으면서 굳은 공조를 이루어낸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번 회담의 결과가 굳이 미국을 자극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도 제기되고 있다. 예컨대 <로이터 통신>은 선언에서 ‘북한 미사일 계획의 평화적 성격’을 강조하는 대목을 지목하고 이 합의에 의해 러시아는 북한으로 하여금 적어도 2003년까지는 미사일 발사 자제를 얻어냄으로써 향후 대미관계에서 좀더 긴밀한 대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고 지적했다.
철도 연결 사업, 가장 큰 성과
이번 ‘선언’의 가장 큰 성과로 지목되는 부분은 경제협력에 관한 합의이다. 실제 이번 회담에서 푸틴은 시베리아 철도 연결사업에 대해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 것으로 알려졌다. <베스티>는 ‘선언’ 제6항에 명시된 ‘한반도와 러시아간 철도연결 사업이 본격적인 실현단계에 들어갔다’는 대목을 들어 그간 논의돼오던 철도연계 사업이 구체적 논의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시시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각종 비교지표가 쏟아져 나왔다. 이를테면 은 현재 한국의 연간 수출액인 1720억달러의 14%인 320억달러가 유럽행 항로 운송비에 소모된다며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물량을 유럽으로 운송할 경우 이 비용을 5% 수준까지 절감할 수 있다는 수치를 내놓았다. 러시아도, <이즈베스티야>의 계산에 따르면 연간 적어도 20억달러의 부가수입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베리아 철도가 북한을 통해, 나아가서 남북간 종단철도를 통해 한국으로 연결되는 데 가장 큰 장애요인이 된 것은 북한 철도시설의 낙후였다. 특히 노선의 80%가 전차인 북한이 고질적으로 전력난을 겪어왔다는 데 큰 이유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선언’이 양국간 상호경제협력, 그중에서도 특히 전력부문에 대한 협력을 강조함으로써 이런 어려움을 타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점은 고무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이에 따라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경의선 복구사업도 활기를 띨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여전히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한반도에서 유럽으로 물량이 이동할 경우 러시아 극동지역의 기존 항로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연해주 일대의 지역경제가 대폭 낙후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베스티>는 이 점을 지적하면서 이런저런 대안을 연방차원에서 모색해 보지만 어느 한 대안도 모든 문제를 한번에 해결하지 못함을 상기하고 신중대처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박현봉 통신원 parkhb_spb@yahoo.com

사진/ 지난 7월 26일 특별열차편으로 북-러 국경도시인 하산에 도착한 김정일 위원장.(AP연합)
김 위원장의 이번 철도방문은 무엇보다 현지 공안당국의 지나친 경호대책에 따른 주민들의 불편 때문에 눈총을 받았다. <인테르팍스 통신>은 “전제적이고 비인간적인 국가지도자의 방문에 대해 러시아가 이렇게 요란스럽게 준비해야 하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도 “그 삼엄한 경계가 마치 스탈린 치하의 소련을 연상케 한다”고 꼬집었다. 실제 김 위원장의 도착한 3일, 열차를 이용하려는 주민들은 큰 불편을 겪었다. 이날 오후 들면서 야로슬라브역 등 3개 역이 밀집해 있는 콤소몰광장 전체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됐고, 열차들이 잇따라 연발연착했기 때문이다. <리아 노보스치> 통신은 이날 13개 교외선 열차일정이 모두 변경돼 5만여명이 금요일 오후 교외별장 다차로 가려던 계획을 포기했다고 보도했다. 이 통신은 또 이날 시베리아 횡단철도 전체에서 40∼50개 노선이 연착해 20만명이 불편을 겪었고, 김 위원장 일행의 귀국까지 고려하면 50만명이 김 위원장의 열차여행에 따른 불편을 감수해야 할 것으로 예상했다. 민영 텔레비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