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면?
이정희 논란에 도덕성 이중 잣대를 들이댄 진보 인사들의 자가당착
이정희 캠프의 선거 부정행위가 사실로 드러나자 많은 이들이 패닉에 빠졌다.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이정희’가? 비난 여론이 끓어올랐다. 당연했다. 정치적 책임을 묻고 페널티를 가해야 할 사안이었다. 민주주의의 근본적 토대라 할 공정선거의 룰을 의도적으로 어긴 사건이기 때문이다.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이정희 쪽은 재경선을 하겠다고 했다. 어림없는 소리였다. 승부조작을 저질렀는데 몰수패도 아닌 재경기 기회를 준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사실상 사퇴 외에 선택지는 없었다. 여론을 무시하고 재경선을 밀어붙였다면 십중팔구 민주통합당-통합진보당 연대의 틀 자체가 치명적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민주주의 원칙으로 보나, 이른바 ‘야권 연대’의 봉합을 위해서나 이정희의 사퇴는 불가피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재선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최소한 트위터 세계에서는 그랬다. 그것도 ‘개혁적’이거나 ‘진보적’이라 알려진 사람들에 의해서.
“가카빅엿” 발언이 알려진 이후 ‘개념판사’로 국민적 사랑을 받은 서기호 전 판사는 트위터에서 “문자메시지 사건이 경선 결과를 뒤집을 정도인가?”라며, 후보 사퇴나 경선 무효를 정당화하려면 부정행위 효과가 경선 결과를 뒤집을 정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이런 논리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있지만, 실패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새누리당 장윤석 의원이 들으면 펄쩍 뛸 소리다. 장 의원이 누군가. 1994년 서울지검 공안1부장 시절 전두환·노태우의 군사반란을 처벌할 수 없다며 불기소처분을 내린 장본인이다. 그때 남긴 말이 이것.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교양학부)도 트위터에서 재경선을 주장했지만 재경선이 어째서 ‘페널티’가 될 수 있는지 끝내 논증하지 못한다. “판 깨지 않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에서 그가 왜 이런 ‘무리수’를 던지는지 짐작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재경선 강행이 이정희를 국회로 보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전체 판을 보면 지나치게 리스크가 큰 도박이었다. 남은 절차는 최대한 공정선거 원칙을 훼손하지 않으며 깨지기 일보 직전인 ‘야권 연대’를 봉합하는 일뿐이었다.
‘수구꼴통에겐 그러려니 하면서 진보에게만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댄다’며 울분을 토하는 사람이 많았다. 진보라서 더 엄격한 잣대를 적용당한 경우도 물론 있었을 게다. 그러나 이번 진보에게 적용된 도덕성의 잣대는 덜하면 덜했지 결코 지나치게 엄격한 건 아니었다. 괴물을 심판하자며 괴물이 된다면, 그 순간 우리는 지는 거다.
박권일
저술노동자

이정희의 눈물, 손수조의 눈물 공동체의 아픔을 대변한 눈물과 개인적 아픔에 흘리는 눈물의 차이
내가 야권 연대 후보들 중 가장 많이 지지했던 이정희 통합진보당 공동대표가 불미스러운 일로 사퇴했다. 보좌관의 어이없는 실수로 치부하기에는 관행의 반복처럼 보였고 사안이 너무 중대했다. 약간 버티는 시간이 있었지만, 그는 깨끗하게 사퇴했다. 그것이 올바르고 유일한 선택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희생했다고 한다. 그의 사퇴로 진보의 도덕성이 회복되고, 정권 교체의 희망이 다시 생겼다는 것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 ‘몸이 부서지더라도’라는 격한 감정의 표현은 그의 결단이 얼마나 절실했는지를 엿보게 해준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 이정희 대표는 희생하지 않았다. 보좌관이 저지른 잘못이었지만, 유권자에게 명백히 거짓을 말하라고 한 것이기에, 사퇴는 당연한 것이고 책임을 지는 최소한의 결정이었다. 다만 한국 정치인들이 너무 치졸하고 뻔뻔하기에 그의 결정이 낯설었을 뿐이다. 이정희 대표는 이 쿨한 결정으로 먼 훗날 더 훌륭한 정치인으로 성장할지 모른다.
이정희 대표의 사퇴를 정의할 수 있는 가장 어울리는 언어로 희생보다는 ‘아픔’ 같은 것이었을 거다. 정작 내 마음을 뒤흔든 건 그녀의 눈물이었다. 나 역시 속으로 울었던 것은 힘없는 진보정당의 여성대표, 정말로 억울하지만, 대의를 위해 희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의 안타까움 때문이 아니었다. 이정희 대표의 눈물에 대한 공감의 진실은 바로 그를 지지하는, 아니 그가 지지하는, 힘들지만 정직하게 세상을 살아오려 했던 서민들 때문이다.
이정희 대표는 국회에서 후보 사퇴 기자회견을 한 그날에는 울지 않았다. 그저 울먹였을 뿐이다. 그가 실제로 눈물을 터트린 것은 마음을 추슬러 야권 통합후보로 대신 지명된 이상규 후보를 지지하는 첫 현장 지원유세 때였다. 그는 시장 상인들에게 이상규 후보를 지지해달라고 호소한 뒤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자신 때문이 아니었다. 이상규 후보 때문도 더더욱 아니었다. 바로 그를 지지했던 관악의 서민들 때문이었다. 그가 인권변호사, 진보정당 대표로서가 아닌 인간 이정희로서 서민들의 아픔, 고통, 비애, 억울함, 외로움, 그리고 그들 삶의 진솔함을 대변하지 못해서, 아니 대변하지 못하면 어쩔까 하는 두려움과 자책감 때문이었을 거다.
그런 점에서 이정희의 눈물은 손수조의 눈물보다 더 아프다. 이정희의 눈물이 공동체에 대한 아픔의 의미가 크다면, 순수조의 눈물은 버티기 힘든 개인적인 아픔의 의미가 더 크다. 손수조의 눈물이 가벼운 멜로라면, 이정희의 눈물은 무거운 정극이다. 어떤 이는 반대로 이정희의 공작 눈물과 손수조의 청춘 눈물로 대비시키지만, 말의 사실과 행동의 책임을 생각하면 그 비교는 터무니없다. 죽음보다 더 아픈 눈물의 진실에 다가가는 것은 결국 그 아픔을 값진 승리로 바꾸는 일이다. 눈물의 대가는 유권자 몫이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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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꼴통에겐 그러려니 하면서 진보에게만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댄다’며 울분을 토하는 사람이 많았다. 진보라서 더 엄격한 잣대를 적용당한 경우도 물론 있었을 게다. 그러나 이번 진보에게 적용된 도덕성의 잣대는 덜하면 덜했지 결코 지나치게 엄격한 건 아니었다. 괴물을 심판하자며 괴물이 된다면, 그 순간 우리는 지는 거다.
박권일
저술노동자
이정희 통합진보당 공동대표가 지난 3월27일 서울 관악을 선거구에 출마한 이상규 야권 단일후보 지원에 나서 신림동 삼성시장에서 주민과 인사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우
이정희의 눈물, 손수조의 눈물 공동체의 아픔을 대변한 눈물과 개인적 아픔에 흘리는 눈물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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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