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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미국으로 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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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8-0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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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만나는 김정일 위원장의 속내…러시아와 관계 다지며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사진/ 모스크바로 가는 김정일 위원장의 속내는 복잡하다. 어쨌든 '미국 생각'이 많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전용열차에 몸을 싣고 시베리아횡단철도를 따라 쏜살같이 달리고 있다. 목적지는 모스크바. 그러나 그가 정말 가고 싶은 곳은 모스크바가 아닐지도 모른다. 정부당국자는 ‘김 위원장이 러시아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른 게 뭐냐’는 질문에, “북-미관계”라고 짧게 답하며 의미를 알아채기 어려운 미소를 흘렸다.

양국은 침묵으로 일관

북미관계….


반세기 냉전의 얼음벽을 빠르게 녹이던 지난해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탈냉전의 흐름은 올 1월 부시 미 행정부 출범 이후 거대한 장벽에 부닥쳤다. 정상회담의 문턱을 넘어설 듯하던 북-미관계도 다시 갈등과 대립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드는 느낌이다. 때문에 시베리아를 달리고 있을 김 위원장의 머리 속에서 ‘미국과 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라는 답을 찾기 어려운 물음이 떠나지 않을 것임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말이 없다. 러시아도 북한도 이번 정상회담의 구체적 일정이나 의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각국의 언론만이 경쟁적으로, 그러나 엇갈린 보도를 내놓고 있을 뿐이다. 굳이 말을 찾으라면, 김 위원장이 러시아 방문 길에 나서기 전인 7월24일 러시아 통신사 <이타르타스>의 서면 인터뷰에 응한 내용이다. 요지는 이렇다. ”조(북)-러관계의 발전 전망은 밝다. 미국의 미사일방어망 구상은 새로운 군비경쟁을 촉발시킬 수 있기 때문에 현재 세계적인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조선은 탄도탄요격미사일(ABM) 협정을 통해 세계의 전략적 안정화를 추구하고 있는 러시아의 입장을 지지한다. 조선의 미사일 위협을 둘러싼 소란은 근거없는 것이다. 우리(북)의 미사일 강령은 순수 평화적 성격을 띤 것이며, 이의 추진은 자주적 권리이다. 우리(북)가 미국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와 적대관계에 있던 나라라도 우리의 자주권을 존중하고 우리에 대한 적대시 정책을 버린다면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새로운 얘기는 없다. 탄도탄요격미사일 협정 유지 지지와 미국의 미사일방어망 구축 반대는 지난해 7월19일 발표한 ‘조-러 공동선언’ 6항에 적시된 내용이다. ‘적대시 정책을 포기하면 관계개선’이라는 말도, 북쪽이 지금껏 줄기차게 주장해온 것이다. 오히려 김 위원장이 미국의 미사일방어망 구상을 “세계적인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간접화법으로 비판한 대목을 오히려 주목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김 위원장의 머리 속에 ‘미국 생각’이 많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런 사정 탓에 적잖은 언론과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의 이번 러시아 방문을 ‘북·중·러 북방 3각 동맹 내실 다지기’ 차원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당국자들은 “그런 분석은 현실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한 당국자는 “김 위원장의 행보는 약소국이 취할 수 있는 양다리 걸치기식 실리외교의 전형”이라며 “김 위원장은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그리고 중·러와 관계를 다져 미국과 일본을 상대로 최대한 실리를 챙기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고위관계자는 “김 위원장이 ‘거꾸로 뛰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미국을 대화 테이블로 끌어당기고, 대화의 입지를 높이려는 뜻이 강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진영간 체제 대결을 대전제로 한 편짜기와 지금의 북-중, 북-러 우호관계 다지기는 그 내용과 방향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실제 러시아는 이제 ‘사회주의 조국’이 아니다. 중국도 세계무역기구체제 가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국내 정치적 포석도 만만치 않아

김 위원장은 지난 1월 중국 방문과 이번 러시아 방문, 오는 9월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의 평양 방문 등을 통해 전통적 ‘후원세력’인 중·러와 우호관계를 다지려 하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이걸 두고 정부 고위관계자는 “중·러에 보증보험을 든 뒤 내 갈 길(개방)로 가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국제정치적 포석만이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 목적은 아닐 것이다. 북한 내부를 향한 국내정치적 포석도 만만치 않다. 우선 김 위원장의 여정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의 아버지이자 북한의 사회주의 헌법이 ‘영원한 수령’이자 ‘영원한 주석’으로 규정하고 있는, ‘절대권위’ 김일성 주석의 반세기 전 항일무장투쟁의 흔적을 뒤쫓고 있다. 7월17일 평양군중대회 이후 ‘김일성 동지의 90회 생일(2002년 4월15일)을 높은 정치적 열의와 빛나는 노력적 성과로 맞이하기 위한 군중대회’ 열풍이 북한 전역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죽은 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잡듯이’ 수령의 권위를 활용해 권력기반을 강화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김 위원장의 시베리아 열차 여행에는 북한이 무엇보다 중시하고 있는 ‘효의 정치’와 항일유격대정신으로 상징되는 ‘주체’와 ‘자주’의 정치가 배경에 놓여 있는 셈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관심을 모으는 주요의제가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한국종단철도(TKR) 연결사업일 것이라는 사실은 전문가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한다. 현재 아시아∼유럽간 물동량의 95%가 해상운송을 통해 소화되고 있지만, 육상으로 나르면 운송기간을 15일 남짓 줄일 수 있어, 시베리아횡단철도와 한국종단철도 연결사업의 잠재력은 거의 무한한 수준이다. 경제적으로는 러시아에 시베리아횡단철도사업 활성화를, 북한에 막대한 통과료를, 남한엔 물류비 절감 효과를 안겨줄 수 있다. 남북관계와 관련해 더 중요한 대목은 이 철도 연결사업이 현실화하려면 남과 북 사이에 반세기 넘게 끊긴 경의선과 경원선 등을 잇는 게 선결과제라는 점이다. 이 사업에 적극적인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이번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과 진전된 합의를 이끌어내어 재원조달 등 남한의 ‘협조’를 현실화하려 한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미 김대중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은 지난 2월 서울 정상회담에서 교통협력위원회 설치에 합의했다. 북-러간에도 지난해 10월 평양-원산-하산간 철도연결 협력 의정서를, 지난 3월에는 철도운수분야 협력합의서를 체결한 상태다. 좀 앞질러 말하면, ‘마침표’ 찍기만 남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사업의 향배는 한-러, 북-러간에 쟁점인 옛 소련 시절 차관 처리에도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러시아는 남한에 17억달러를 갚아야 하고, 북한은 러시아에 38억루블의 빚을 지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시베리아횡단철도와 한국종단철도 연결사업에 자국이 투자할 자금과 러시아의 대북 경제협력 비용의 일부를 남한의 차관과 상계하는 방안을 한국에 제안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 이번 방문을 계기로 시베리아횡당철도와 한국종단철도 연결사업은 마무리 될 것인가. '하산'에서 영접받고 있는 김정일 위원장.
철도 연결사업에 마침표 찍나

정부가 이번 정상회담에서 논의될 것이 확실한 시베리아횡단철도와 한국종단철도 연결사업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은 이렇듯 이 문제가 장래의 경제적 이익뿐만 아니라 남북관계 진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조·러 공동선언’을 발표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관심사는 정상회담 뒤 푸틴 대통령의 입에서 쏟아져나올 정상회담 과정에서 김 위원장의 주요 발언내용이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7월 정상회담 뒤 김 위원장이 ‘우주탐사를 위한 인공위성 발사체기술을 지원받을 경우 자체 미사일 개발 계획을 포기할 준비가 돼 있다’는, 사실상 ‘조건부 장거리 미사일 개발 포기’ 발언을 했다고 전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전례에 비춰볼 때 푸틴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 뒤 대미관계와 2차 남북정상회담 등에 대한 김 위원장의 속내를 세상에 전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푸틴 대통령의 입을 지켜봐야 하는 까닭이다.

이제훈 기자/ 한겨레 남북관계부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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