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근태(1947년 2월14일~2011년 12월30일)
짐승의 시간’에 맞선 민주화운동의 상징, 역사의 별이 되다… 마지막까지 “참여가 권력을 만들고,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라 호소
등록 : 2012-01-04 15:48 수정 : 2012-01-05 18:04
“2012년을 점령하라”는 마지막 인사를 남긴 그는, 이렇게 웃으며 먼 길을 떠날 수 있었을까.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2006년 1월2일 보건복지부 장관직에서 물러나 열린우리당으로 복귀하며 연 기자회견에서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 있다. <한겨레21> 김경호 기자
고문으로 망가진 몸이었다.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민주화운동의 큰 별이 질 때, 사람들은 숨죽여, 꺼이꺼이 울었다. 새해를 이틀 앞둔 날 새벽이었다. 김근태(1947~2011)가 몸을 던져 이뤄낸 민주화가 계속 뒷걸음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분개한 이는 이명박 대통령이 보낸 조화를 받지 말자고 주장했다. 김근태가 고문받을 때 대통령 노릇을 하던 자가 ‘전재산 29만원’으로 호화호식하며 잘살고 있다는 사실에 어떤 이는 치를 떨었다. 빈소를 찾은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과거사를 정리하지 못하고, 민주주의를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돌아가셔서 참담하다”고 말했다.
1970~80년대는 그런 시절이었다.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뿐인 목숨을 걸어야 했다.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출범 이후 처음으로 공개적 민주화운동 조직으로 활동했다. 광주학살의 서슬이 시퍼렀던 때다.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민청련의 상징은 두꺼비였다. 새끼와 함께 독을 품었다. 두꺼비가 뱀에게 잡히면 죽지만, 뱀 역시 독 때문에 죽는다. 두꺼비가 품고 있던 새끼들은 그 안에서 뱀을 자양분으로 자란다. 김근태는 두꺼비의 운명을 피하지 않았다. 민청련 초대, 2대 의장을 맡은 그는 정권의 목구멍 깊숙이 박힌 가시였다.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이 땅의 민주화에 온몸을 던진, 민주화의 산 증인이었다. 1988년 6월30일 경북 김천교도소에서 석방된 뒤 환영식을 하는 모습. 그는 수감 전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이근안 전 경감에게 끔찍한 고문을 당했던 일을 “짐승의 시간”이라고 회고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광주학살 원흉들에 맞선 ‘두꺼비’의 고통
민청련 의장으로 일곱 번째 구류를 살던 김근태는, 1985년 9월4일 석방될 예정이었다. 서부경찰서 유치장에서 나오던 그는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9월25일까지 대공분실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은 그의 문집 <남영동> 등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김근태는 이를 “짐승의 시간”이라고 했다.
“고문을 전담하던 자 중의 한 사람은 나중에 혼자서 제 손을 잡고 ‘고문을 하는 것을 보고 구역질이 났다. 허위로라도 다 인정하라. 여기에 있으면 당신은 죽는다’고 울면서 얘기를 했습니다. 그들은 집단폭행을 가한 뒤 본인에게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그해 12월 재판 진술)
고문은 당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김근태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당한 일이었다. 이를 사회적으로 공론화하는 데는 그의 아내 인재근의 구실이 컸다. 아내이자 동지인 인재근은 석방됐어야 할 남편이 사라지자 ‘결국은 이리 오겠지’ 생각한 끝에 검찰청에서 기약 없이 그를 기다렸고, 9월26일 9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적적으로 만났다. 김근태는 고문 내용을 전했고, 발등에 시커멓게 그을린 전기고문 흔적을 보여줬다. 인씨는 이미자의 노래 테이프 중간에 고문 사실을 녹음한 뒤 이를 국외로 내보냈다. 김근태는 ‘세계의 양심수’가 됐다.
1987년 ‘반쪽’ 민주화 이후 국회가 여소야대로 바뀌자 고문은 정치 쟁점이 됐다. ‘얼굴 없는 고문기술자’로 불리던 이근안 경감은 1988년 <한겨레> 보도로 세상에 얼굴이 알려졌다. 김근태가 ‘이근’까지 떠올리고, “마지막 자가 ‘한’인 것 같다. 경기도경 공안분실에 있을 것 같다”고 얘기한 게 단서가 됐다. 얼굴이 알려진 이근안은 10년10개월 동안 도망다니다 공소시효가 끝난 1999년 10월 ‘자수’해 징역 7년을 산 뒤 2006년 11월 출소했다. 지금은 목사로 살고 있다.
김근태는 그를 용서했다. 2005년 2월7일 경기도 여주교도소에서 이근안 전 경감을 면회하고 그를 용서한다. “민주화가 되면 네가 나한테 복수하라”고 했던 그를 용서한 뒤 밤잠을 설쳤다. 면회 2주 뒤 자신의 누리집에 “저 사죄는 사실일까?”라며 혼란한 마음을 털어놨다. “눈물을 흘리면서 얘기하는지, 또 어느 정도 흘리는지 나는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속죄의 눈물이 없는 사죄가 진실한 참회해서 나온 것인지 혼란해하며 그는 “이제 지나고자 한다. 용서하고 화해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진정으로 하늘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고 썼다.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별세한 2011년 12월30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유족들이 영정사진을 모시고 빈소로 향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전태일, 조영래, 문익환, 이소선 곁에 잠들다
몸은 자유롭지 못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김근태는 말투가 어눌해졌고, 손과 목의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가 말년에 고생한 파킨슨병도 고문 후유증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근안은 2010년 2월 <일요서울> 인터뷰에서 “고문 기술자라는 호칭은 맞지 않고 굳이 부른다면 심문 기술자가 맞다” “내가 취미 삼아 만든 모형비행기 모터에서 AA건전지 2개를 가지고 겁을 준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김근태는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활동을 하다 또다시 구속돼 1992년까지 투옥생활을 했고, 199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직업 정치인으로서 삶을 시작했다. 3선 국회의원을 했고, 참여정부 때 보건복지부 장관을 했다. 2008년 총선에서 낙선했고, 2010년부터 민주진보 대연합을 위한 활동을 벌여오다 2011년 12월 초 쓰러졌다.
2012년 1월3일 김근태는 전태일, 조영래, 문익환, 이소선이 잠들어 있는 경기 마석 모란공원에 묻힌다. 생전에 바란대로 끔찍하게 사랑하던 이들 곁이다. 김근태가 남긴 마지막 글은 “2012년을 점령하라”(10월18일 자신의 블로그)다.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이지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