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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미국이 호출한 ‘매파의 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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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7-1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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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전 비서 방미론의 외교적 억지… 신변보장 없는 초청 편드는 우익·야당

사진/ 미국 강경파 의원들의 초청을 받은 황장엽 북한 노동당 전 비서. 그는 국에서도 북한에 대한 강경발언을 서슴지 않았다.(이용호 기자)
“황장엽 북한 노동당 전 비서의 자유선택에 맡겨라.” 그동안 정부의 햇볕정책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온 언론과 한나라당이 다시 한번 뭉쳤다. 이번 주제는 황장엽 전 비서의 방미문제. 미국 공화당의 대북강경파 의원들 몇몇이 나서 황 전 비서 미국으로 초청하자, 이들은 한목소리로 여행과 언론의 자유를 들먹이며 황 전 비서를 미국으로 보낼 것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대북강경파 의원들이 초청한 까닭은…

앞장은 <조선일보>가 섰다. <조선일보>는 7월4일 “미국 의회가 의회 관계자들을 서울에 파견,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오는 7월22일을 전후해 미 의회에 출석, 북한문제와 관련한 연설과 증언을 해달라는 공식 초청장을 황씨에게 직접 전달하려 했으나, 한국 정부당국은 면담 주선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한 이후 연일 황 전 비서의 방미불허를 비판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5일에는 황 전 비서의 초청장을 가지고 방한한 척 다운스 전 미국 공화당 정책위원회 보좌관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번 초청이 미국 의회지도부와 미국 상·하원의원들의 공식초청”이며 “미국 정부와 의회는 중요한 귀빈에게 적용되는 최대한의 충분한 안전보호조처를 취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그럼에도 “정부가 황 전 비서의 방미를 반대하는 이유는 ‘김정일 답방’에 어떤 악영향을 끼칠 것을 걱정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주장했다. 이어 6일에는 정부의 황 전 비서 방미불허 방침 때문에 “황씨를 초청한 미 의회관계자들이 강하게 반발할 것으로 예상돼 이 문제가 한-미간 외교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까지 보도했다.


한나라당도 황 전 비서의 방미문제가 불거지자 이회창 총재까지 나서 황 전 비서의 방미를 불허하는 정부태도를 비판하고 나섰다. 이 총재는 6일 “자유를 찾아온 황씨의 방미를 정권이 막는 것에 분노한다. 이는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체제수호 차원에서 문제가 크다”며 “우리가 지켜온 기본가치인 언론·표현·선택·이동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이 나라가 과연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있는 것이냐”고 공격했다.

사진/ 황장엽 전 비서에게 초청장을 보낸 제시 헬름스 상원의원. 그는 미국 공화당에서 대북강경파 의원으로 분류된다.(SYGMA)
과연 그런 것일까. 정부가 황 전 비서의 방미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배경에는 황 전 비서의 방미가 남북관계 등에 끼칠 영향도 고려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북 강경론자인 황 전 비서가 미국에 가서 북한의 인권상황 등에 대해 여과없이 증언할 경우, 그렇지 않아도 정체된 남북관계에 엄청난 파장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번 초청자들이 미국 공화당 내에서 대북강경정책을 주도하는 의원들이라는 점에서 정부로서는 더욱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그것만이 전부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우선 정부의 공식입장은 “황 전 비서의 경우 최고위급 탈북자인 특수신분이기 때문에 한-미 당국간 신변안전조처가 선행돼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정부 당국자는 “일부 언론에서 강철환, 김순옥, 최주활씨 등 탈북자들이 미국에 가서 증언한 사례를 들며 신변안전이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황 전 비서가 외국을 여행할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들 단순 탈북자와 최고위급 탈북자인 황 전 비서를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황 전 비서는 ‘최고의 신변안전 보호대상’으로 현재 이런 특수신분에 있는 사람은 황 전 비서와 그의 비서격인 김덕홍씨뿐”이라고 밝혔다.

비공식 경로 이용해 초청절차 밟아

우선 정부가 문제삼는 부분은 이번 방미초청 주체의 공식성 여부다. 미국 정부나 의회의 공식적인 초청이냐, 아니면 미국 의원 개인의 초청이냐는 것이다. 이번에 황 전 비서에게 전달된 초청장은 모두 4건이다. 제시 헬름스 상원의원과 헨리 하이드 국제관계위원장, 크리스토퍼 콕스 공화당 정책위원장 등 공화당 내 대북강경파 의원 3명과 민간단체인 디펜스포럼재단의 수잔 솔티 회장이 초청장을 보냈다.

이들 초청장을 갖고 방한한 척 다운스 전 공화당 정책위원회 보좌관은 7월5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초청장은 헬름스 상원의원 이외에 미국 의회지도부의 공식논의를 거쳐 작성된 것이다”라며 미국 의회의 공식초청임을 시사했다. 그러나 정부쪽 설명은 다르다. 미국 의회의 공식초청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미국 의원 개인 차원의 초청장이라는 것이다.

우선 초청장 자체가 개인명의인 것말고도 이들의 초청절차가 극히 비공식적이라는 점 때문이다. 다운스 전 보좌관은 이번 초청이 2달 전부터 준비돼왔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이번 초청 의원들은 그동안 이번 초청건에 대해 한국 정부와 전혀 상의하지 않았다. 정부 당국자는 “의회 차원의 공식초청이라면 미국 국무부와 한국의 외교통상부라는 공식채널을 통해 접촉이 이뤄져야 하는 게 정상”이라며 “그런데도 척 다운스 일행은 7월1일 아무 사전 예고없이 방한해 불쑥 초청의사를 밝혔다”고 말했다. 실제 리처드 바우처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7월5일 정례브리핑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황씨가 미 의원들과 비정부재단인 디펜스포럼에 의해 미국에 초청됐다는 것”이라고 말해 의원 개인 차원의 초청장임을 내비쳤다.

사진/ 황장엽 전 비서는 최고의 신변안전 보호대상이다.(이용호 기자)
초청목적도 논란거리다. 하이드 위원장은 초청장에서 20일 이후의 주간에 예정된 상임위에 출석해줄 것을 요청했다. 또 콕스 위원장은 7월19일부터 26일까지 예정된 하원회의에서 귀하의 경험과 직관력을 공유하기를 바란다고 초청장에 적었다. 수잔 솔티 디펜스포럼재단 회장의 초청장은 7월20일부터 열리는 디펜스포럼재단 하원 국방외교정책회의에 출석해 북한체제의 실상에 관해 증언해주길 바란다고 돼 있다. 초청장 내용대로라면 하원 상임위 출석과 디펜스포럼재단 회의 참석이 초청목적이다. 그러나 척 다운스 전 보좌관과 면담한 정부당국자는 “척 다운스 전 보좌관은 ‘이번 초청이 미 하원 또는 상원 공식위원회의 증언 등과 관련해 정해진 일정은 아직 없다. 이번 초청은 헬름스 등 공화당 의원들이 참여하는 민간단체인 디펜스포럼재단의 간담회에 와달라는 것’이라고 밝혔다”고 전했다. 특수신분인 황 전 비서를 정부나 의회 등 단지 민간단체행사에 참석하도록 하기 위해 초청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미국 내 대북강경세력이 황 전 비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초청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신변보호문제다. 미 의원들은 초청장에서 “신변보장을 위해 미국 내 적절한 기관과 협력할 것”, “필요한 어떤 조처를 취할 것을 확신해도 좋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초청장을 보낸 의원 개인의 신변보장 약속이지, 미국 정부의 보장약속은 아니라는 게 정부당국자의 설명이다. 척 다운스 전 보좌관은 신변안전보장과 관련해 국무부로부터 외교안전국 소속 전담요원 2명이 배정될 것이라는 공식답변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척 다운스 보좌관은 정부당국자와의 면담 자리에서 신변안전보장문제에 관한 미국 공식기관의 신변안전을 보증할 어떤 문서도 제시하지 못했다고 정부당국자가 전했다. 신변안전보장조처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 바우처 대변인은 5일 브리핑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동의한 것은 적절한 관계당국에 황씨의 방문을 통보하고 주정부 차원이든 연방정부 차원이든 적절한 해당 법기관과 안전문제를 조정하겠다고 말한 것”이라고 밝혀 ‘2명의 전담요원이 배정될 것’이라는 척 다운스 전 보좌관과 다른 말을 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정부는 이번 초청이 공화당 의원들 개인 차원의 초청이며, 따라서 미국 의원 몇명이 초청한다고 최고의 신변안전보호대상인 황 전 비서를 아무 대책없이 미국으로 보낼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이번 사건은 한마디로 미국 공화당의원 보좌관 신분에 있는 사람들이 황장엽씨를 면담하겠다고 무례하게 요구한 것이며 2주 뒤에 그를 데리고 미국으로 가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데 불과하다”고 말했다. 다른 당국자는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라. 한국 국회의 통일외교통상위 위원장 보좌관이 위원장 명의의 초청장을 들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국에 망명한 1급 보호대상자를 한국으로 보내달라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그게 가능하겠느냐”고 말했다.

“한-미 당국간 신변보장 조처 필요”

실제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톡톡히 설움을 당한 경험이 있다. 97년 장승길 이집트 주재 북한대사가 미국으로 망명했을 때 한국 정보기관은 접근을 거부당했다. 또 80년대 북한을 탈출한 영화감독 신상옥·최은희 부부의 경우도 한국 정보기관의 접촉이 오랫동안 차단됐다. 정부 당국자는 “황 전 비서가 망명한 지 7년이 지났다. 그동안 미국 관계기관이 황 전 비서관을 면담했으며, 우리 정부는 미국과 이 문제에 충분히 협조했다”며 “정부의 입장은 한-미 당국간 신변안전보장조처가 마련되지 않으면 황 전 비서를 보낼 수 없다는 점에서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박병수 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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