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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국방부가 진실을 감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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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6-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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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학살 은폐하는 ‘조사업무 지침서’… 범국민위 차원의 통합입법안 제출키로

사진/ 언제까지 학살을 정당화할 건가.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가 국방부의 조사업무 지침서를 공개하고 있다.(강창광 기자)
한국전쟁 민간인학살에 대한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입법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는 가운데 국방부의 민간인학살 ‘조사업무 지침서’가 공개돼 파문이 일고 있다.

피학살 유족회와 진보사학자들이 망라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이하 범국민위)는 최근 국방부가 지난해 12월 작성한 이 지침서를 확보했다. 국방부 직할 군사편찬연구소 주도로 작성된 62쪽 분량의 이 지침서에는 피학살 유족 및 시민단체의 요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이 주로 담겨 있다. 일단 민간인학살사건에 대한 조사 주체를 군사편찬연구소에 설치될 종합대책반이 전담하는 것으로 돼 있다. 조사 원칙에는 ‘(조사활동이) 참전용사의 명예나 작전의 정당성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거나 ‘전쟁범죄를 거론하지 않는다’는 등 한계를 뚜렷이 정했다. 아울러 ‘형무소 재소자나 보도연맹, 경찰에 의해 죽은 사람 등은 조사대상에서 제외’했다. 지침서는 또 ‘유족들이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거나 ‘민원자와 장기접촉을 유지하면서 계속 추적하라’고 적는 등 마치 피학살 유족들을 불순한 의도를 가진 집단처럼 묘사하기도 했다.

피학살 유족 매도하는 조사활동 중단 요구


범국민위 사무처장인 김동춘 교수(성공회대)는 “국방부가 노근리사건이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른 뒤 국방부에 제출된 민간인학살 청원을 해결한다는 명분을 갖고 작성한 이 지침서 내용은 사실상 민간인학살의 핵심 주체인 군이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 면죄부를 주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 교수는 “조사 주체는 물론 목적과 대상, 범위, 원칙 등이 문제투성이인 지침서를 국방부가 작성한 게 확인된 만큼 국방부가 현재 독자적인 조사를 벌이고 있는 문경, 함평 등의 양민학살사건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주장했다.

범국민위는 특히 이 지침서에 따른 국방부 조사가 계속될 경우 통합입법 움직임에 큰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강정구 범국민위 상임대표(동국대 교수)는 “범국민위와 정치권을 중심으로 통합입법 움직임이 구체화되는 시점에서 학살주체인 군이 진상 조사를 벌이는 것 자체가 적절치 않을 뿐 아니라, 국방부의 조사 자료가 통합입법 통과 이후에는 군을 변론하는 주요 근거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계했다. 이에따라 범국민위는 6월27일 유족단체들과 함께 지침서 내용을 폭로·규탄하고 국방부의 조사활동 중단을 요구했다.

범국민위는 이와 함께 통합입법안 제출을 서두르기로 했다. 범국민위는 현재 통합입법 시안을 내부적으로 확정한 상태다. 3년 한시법으로 운영될 이 법안은 대통령 직속기구로 민간인학살 진상조사 및 명예회복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사를 전담하기 위해 상임위원 3명과 150명 안팎의 조사관으로 구성된 사무처를 두도록 했다. 3명의 상임위원은 각각 △군에 의한 학살 △경찰·우익단체 및 미군 등 연합군에 의한 학살 △북한군과 좌익단체에 의한 학살사건 조사를 지휘한다. 또 현재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가 갖고 있는 정도의 조사권도 부여하기로 했다. 법안작성을 주도해온 장완익 변호사는 “현재 국회를 통과해 실행중인 거창사건 특별법과 제주 4·3사건 특별법이 총리실 산하에 실무기구를 두도록 돼 있지만 비상설기구로 실효성이 없고 조사권도 주지 않아 진상규명에 뚜렷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면서 “통합법 시안은 진상규명을 위해 꼭 필요한 최소 요건이 담겨 있다”고 밝혔다. 범국민위는 6월 말이나 7월 초 김원웅 의원(한나라당·대전 대덕)을 통해 이 통합법안을 국회에 제출한 뒤 오는 9월 정기국회 때 법안이 통과되도록 여론을 조성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범국민위는 오는 6월2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대구·경북, 마산, 광주, 여수·순천 등 4개 지역 피해실태 조사결과를 공개한다. 범국민위 한성훈씨는 “경남지역 조사결과는 전쟁 직후 최대학살극인 보도연맹사건이 어떻게 조직·결성됐는지를 생생히 밝혀줄 것”이라고 전했다. 이들은 또 전갑길 의원(민주당 광주광산)이 입수하고 최근 <한겨레21>이 보도(364호 표지이야기)한 1960년 국회 양민학살특위 현장조사 속기록과 피해자신고서를 토대로 생존자 추적조사 및 학살실태에 대한 분석을 하기로 했다. 앞으로 학살관련 자료·정보 공개청구, 피해지역별 피학살 유족회 결성 및 유해발굴사업 등도 지속할 예정이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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