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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민생탐방이 아니라 궐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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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6-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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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율 꾸준히 상승하는 민노당의 권영길 대표…전국 대장정에 임하는 각오와 앞으로의 행보

사진/ “민노당에 투표하는 것은 투자다.” 권영길 대표는 이념이 아니라 정책으로 승부하겠다고 말한다.(강창광 기자)
민주노동당은 지난 4월12일 지난해 4·13총선 이후 1년을 되돌아보는 보도자료를 낸 적이 있다. 민노당은 이 자료에서 스스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92년 총선 뒤 곧바로 해산한 민중당 등 과거 진보정당들과 달리 민주노동당은 원내 진출 실패에도 불구하고 당을 유지하고 나아가 발전시켰다. 현재 총당원 1만6천여명으로 지금도 한달 평균 300여명씩 당원이 증가하고 있다.” “상가임대차보호법, 이자제한법 등의 이슈화에 성공하는 등 정책정당으로서의 노력을 경주한 한해였다.” “한달 당비 수입액 8천만∼9천만원으로 당원들의 당비로 재정의 95% 이상을 충당하는 등 재벌후원, 국고보조 없이 당운영의 독립을 이뤘다.” “당 지지도가 꾸준히 상승했다. 한길리서치 조사에 의하면 민노당 지지도가 지난해 12월 2.6%, 올 1월 2.7%, 3월 3.4%를 기록하는 등 지속적으로 높아졌고 3월 월간 <신동아>의 여론조사에서는 민노당이 4.7%의 지지로 4.1%의 자민련을 앞섰다.”

1달 뒤, 민노당은 본격적인 대국민 접촉 정치프로그램 실행에 나섰다. 이른바 ‘민생살리기 10만km 대장정’. 권영길(60) 대표 등 당 간부들이 지난 5월22일 부산지역 순회를 시작으로 약 3개월 동안 거리연설회, 대형상가·재래시장 방문, 중소기업인과의 간담회, 노조·농어민 강연회, 학생 강연회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국의 지역주민들을 직접 만나는 프로그램이다. 민노당은 이 행사를 통해 “경제가 파탄나고 민생이 어려워진 것은 보수정치권이 노동자·서민의 이해보다 가진 자와 재벌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지역중심 정당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널리 알리고, 아울러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대변자인 민주노동당이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정리해고·부자중심·해외매각’ 위주의 구조조정이 아니라 ‘노동자·서민중심의 진보적 구조개혁’을 대안으로 제시하며 국민적 지지를 이끌어낸다”는 목표를 설정해뒀다.

다시 1달, 그동안 얼마나 성과가 있었을까. 이 프로그램에 따라 지방에서 지방으로 돌고 있는 권 대표를 6월15일 오전 서울 여의도 민노당 당사에서 만났다. 권 대표는 마침 파업중인 대한항공 조종사노조 강연을 위해 12일 대구에서 올라와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그동안 1달 가까이 집에도 못 들어가고 거리를 전전한 탓일까, 얼굴이 조금 수척한 듯했다. 목소리도 쉬어 있었다. 그래도 변한 것은 없었다. 여전히 어눌한 말투, 그러나 진지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

사진/ 공직사회 개혁을 외치는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총연합의 거리행진. 새로운 정치세력을 갈망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높다.(박승화 기자)

-‘민생살리기 10만km 대장정 행사’가 1달 가까이 됐는데.


=중간에 한번 잠깐 서울에 일이 있어 올라왔었다. 잠자리는 당원들 집에서 신세졌다. 밤마다 지역 당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기회도 됐고 유익했다. 애초 12일 저녁 대한항공 조종사노조 강연을 마치고 13일 다시 대구로 내려가려 했다. 그런데 언론들이 고액임금자가 파업한다고 매도하는 것을 보고, 이 부분에 대한 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며칠 더 머물게 됐다.

-주민들 반응은.

=한마디로 새로운 정치세력을 갈망하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현 정권에 대한 민심이반이 극심했다. 그렇다고 한나라당에 대한 절대적 지지냐. 그런 것은 아니다. 민심은 새 대안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어떤 메시지를 갖고 갔나.

=주로 세 가지로 나눠 얘기했다. 김대중 정권이 서민생활 보호를 위해 하겠다고 한 정책들 중 된 게 뭐가 있느냐, 그렇다고 한나라당은 기댈 수 있는 세력이냐, 아니다, 더 문제가 많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국제통화기금(IMF)의 핵심원인인 정경유착과 재벌개혁을 달성해야 한다, 이런 내용을 이야기하면 여기저기서 옳다는 소리가 터져나온다.

-민생탐방은 기존 정당에서도 많이 하는 것인데.

=‘민생살리기 10만km 대장정’이라는 말은 우리의 의도가 담긴 용어가 아니다. 우리가 하는 것은 보수정당 대표들이 민생탐방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지금 현 정치권에 실망하는 국민들, 못살겠다고 신음소리만 내는 국민들의 힘을 국민적 운동으로 전개해야 한다. 언제까지 못살겠다고 신음소리만 내뱉고 있을 것이냐. 우리가 힘을 결집해서 이 힘으로 정치권에 압박을 가해야 한다. 이게 주목적이다. 그래서 이렇게 얘기한다. “제가 온 것은 정당 대표들의 민생탐방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함께 궐기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두 박수로 호응한다.

-당 지지율이 상승곡선인데.

=지난해 당이 국회진입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우리 당은 기존 정당처럼 이름만 올려 있는 당원으로 구성된 게 아니다. 실제 당비를 내는 당원이 움직이는 당이다. 올해는 지역별로 20명 단위로 분회를 구성해 더욱 살아 있는 조직을 만드는 게 목표다. 그저께 저녁 성동·광진지구에 갔다. 운영위원회의가 있었다. 새 당원 한분이 이런 말을 전하더라. 과거 민중당 간부로 활동했던 한분이 직접 회의를 참관했는데, 과거 민중당은 명망가들이 모여서 하는 것으로 끝났는데 여기는 밑바닥에서 당원들이 직접 모여 무엇을 할 것인가 논의하는 것을 보고 감명받았다고 하더라. 구성원도 아시아나 부기장도 있고, 사무직 노동자도, 공장 노동자도 있고, 장사하는 사람들로 있고, 이들이 의견을 모아가는 것을 보고 놀랐다, 민노당은 된다, 되는 조직이다, 라는 생각을 가졌다는 것이다.

-장기적인 정치목표 같은 것은.

=애초 4·13총선 전 이렇게 얘기했다. 2000년 국회진입하고, 그 4년 뒤인 2004년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고, 다시 4년 뒤 2008년 제1야당이 되고, 2012년 집권정당이 되자, 이렇게 일정을 제시했다. 그런데 지난해 총선에 원내진입이 안 됐다. 좌절은 없다. 정치일정이 4년씩 순연된 것뿐이다.

-올 하반기 동대문을 재선거가 실시된다.

=후보를 낸다. 재선거는 본래 총선과 달리 철저한 조직선거다. 또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총력전을 펼칠 테지만 우리는 예상을 뛰어넘는 지지를 얻을 수 있다. 공천자는 서울시 지부 2명, 중앙당 2명, 동대문을쪽 2명 등 6명의 전형위원이 1차로 후보를 추천하면, 동대문을 당원들이 선거해서 결정한다.

-내년 지방선거와 대선이 있다. 민노당의 성패는 가능성 있는 대안세력으로서 전망을 제시하는냐에 달려 있는데.

=총선 뒤 지지율이 2%였다. 그뒤 지속적 활동으로 4%를 넘어섰다. 고무적인 일들이 있다. 과거 상인들의 지지는 거의 0%였다. 그러나 민노당이 상가임대차보호법 등 민생법안을 적극 이슈화하면서 어떤 지역은 상인의 지지가 6%가 넘는 곳도 생겼을 정도다. 이런 일들이 국민 가슴속에 전달되고 있다.

-내년 대선에서 민노당이 진보세력의 표를 분열시킬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올 수 있는데.

=지난번 ‘국민승리 21’ 후보 때 나온 얘기였다. 그러나 달라졌음을 느낀다. 김대중 대통령은 보수정당에서는 그나마 가장 진보적인 정치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대통령이 되고 나서 실제적 진보, 개혁적 진보를 이뤄내지 못했다. 과연 집권 가능성이 있는 정치인 가운데 누구에게 진보적 색채의 정치를 기대할 수 있겠느냐. 민노당에 투표하는 것은 더이상 사표가 아니다. 투자다. 투자없는 성과를 바랄 수 있느냐.

-90년대 이후 탈이념의 세계사적 분위기에서 진보정당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도 있는데.

=관념론 속에 파묻힌 이념만 생각하는 것이다. 한물간 것은 교과서에 나오는 이념으로 박제화된 공산주의다, 사회주의다, 사민주의다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정책들, 예컨대 공교육 강화 같은 정책들을 실현하려는 노력이 한물간 것은 아니다. 그렇게 추상적으로 접근할 게 아니고 구체적으로 뭘 할 것이냐, 어떤 정책을 실현할 것이냐로 접근해야 한다.

-지역구도가 완고한 정치풍토에서 민노당의 생존은 그래도 버거워보인다.

=거꾸로 지역구도 혁파의 유일한 대안은 진보정치세력의 결집이다. 현실적으로 민주노동당의 강화만이 대안이다.

-현재의 민심이반은 김대중 대통령의 리더십의 한계라는 측면에서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리더십의 한계라기보다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어딜 가든지 이렇게 얘기한다. 김 대통령은 분단의 벽을 넘는 역사적 기여를 했다. 이것은 높게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그 역사적 성과를 넘어서는 역사적 과오를 저질렀다. 무슨 얘기냐 하면, IMF의 요구를 넘어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무비판적으로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이미 2년 전 다보스포럼에서 조지 소로스가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를 이야기했듯이 더이상 살 길이 아니다.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할 때인데 그것을 안 했다. 지도자로서의 통찰력에 문제가 있었다.

-그럼 신자유주의의 대안은 어떤 것이냐.

=수없는 질문을 받는 것인데, 간단히 말하면 반대하는 게 대안이다.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고 그 틀 속에서 구조조정 안 하면 어떻게 하느냐, 노동시장 유연화 안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다. 그게 아니다. 신자유주의라는 틀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다. 그래야 대안이 보인다. 프랑스는 노동시장 유연화에 대해 노동시간 단축으로 대응했다. 왜 이런 대안이 없겠느냐.

약속시간을 20분 넘기며 1시간50분가량 얘기를 나눈 권 대표는 19일 다시 거제, 진주 등 경남지역으로 내려가 잠시 끊긴 ‘민생살리기 10만km 대장정’을 이어간다고 말했다. 7월16일∼8월12일 휴가기간 3주를 빼고 9월16일까지 영남지역에 이어 대전·충청권과 경기도, 광주·호남권을 돈 뒤 서울로 상경할 이번 대장정에서 과연 권 대표와 민노당이 민심을 어떻게 읽어내고 얼마나 지지를 다질지 주목된다.

박병수 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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