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입법 합의는 이미 60년에
등록 : 2001-06-13 00:00 수정 :
사진/ 60년 제4대 국회는 ‘양민학살진상조사특위’를 구성했다. 당시 양민학살자 신고서.(이용호 기자)
민간인 학살에 대한 국가배상과 책임자 처벌, 국가차원의 철저한 진상조사. 이것은 모든 피학살 유족들이 바라는 3대 핵심 요구사항이다. 하지만 현재 유족들은 “빨갱이 자식들의 준동”을 질타하는 일반 시민의 시선과 보수세력의 저항을 우려해 이를 전면에 내걸지 못하고 있다. 그저 가슴앓이를 할 뿐이다.
사실 이 요구는 1960년에 이미 국민적 합의가 이뤄진 사안이다. 60년 당시 제4대 국회는 4·19혁명 뒤 분출하는 유족들의 진상규명 요구에 떠밀려 ‘양민학살진상조사특위’를 구성했다. 그리고 각 3명의 의원이 경남, 경북, 전남 등 3개 반으로 나뉘어 5월31일부터 6월10일까지 11일 동안 현장조사를 벌였다. 국회특위는 “인원, 기간, 대상 등 조사활동에 본질적 한계가 있었다”고 스스로 인정한 현장조사를 통해 경남 3085명, 경북 1028명, 전남 524명, 전북 1028명 등 모두 “8715명의 양민이 무참히 학살”됐음을 밝혀냈다.
최근 전갑길 민주당 의원(광주 광산)이 국회 의안과 지하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한 특위 3개반의 현장조사 속기록과 피해자 신고명부, 국회 건의안 초안과 최종안 등은 당시 실상의 일부를 보여준다. 속기록에는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 출신이 “개인개인 묶어 돌을 싣고, 둘러 앉혀놓고 권총으로 쏜 뒤 바다에 수장했다”고 밝히는 등 학살상황과 관련한 증언도 나와 있다. 더욱이 모두 24권 7천여쪽에 이르는 피해자 신고명부는 연행 상황, 피학살자, 학살 직전 수감처, 학살집행자 관직 및 성명, 학살 상황, 학살 뒤 시체처리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에 중요한 자료도 평가된다.
한편 당시 국회특위는 이런 조사결과를 토대로 내무, 법무, 국방 등 3부 장관을 출석시켜 토의한 결과 “양민 학살 사건을 행정부에 이관해 장시일에 걸쳐 정확하고 상세한 실정조사가 필요하다”고 결론냈다. 그리고 국회는 그해 6월21일 특위의 보고를 토대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설치를 통한 조속한 피해자 조사 △악질적인 관련자에 대한 엄중한 처단을 위해 일사부재리 원칙이나 시효에 관계없이 ‘양민학살사건처리특별조치법’ 제정을 촉구하는 대정부 건의안을 의결·제출했다.
그러나 이 결의에 따른 후속조치는 이뤄지지 못했다.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이런 국민적 합의를 철저히 억눌렀고, 국회는 침묵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