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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상처받은 DJ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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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6-0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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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물밑으로 가라앉은 당정쇄신론… 민주당 소장파 개혁파동은 무엇을 남겼나

사진/ 6월4일 김 대통령 주재 민주당 최고위원회의. 당내 분위기는 이날을 계기로 수습의 가닥이 잡힌 것으로 보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역시 DJ다운 일처리야….”

지난 5월24일 초선의원 6명의 공개적인 당정쇄신 요구로 촉발돼 열흘 남짓 여권을 뒤흔들었던 이른바 ‘성명파동’이 처리되는 과정을 지켜본 한 여권 관계자의 반응이다. “YS와는 정말 비교된다. YS는 문제가 생기면 전격적인 경질 등 깜짝 놀랄 만한 일처리로 정국반전에 나서는 스타일 아니냐. DJ는 신중하다고 해야 하나, 교묘하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DJ방식이다.”

관망과 뜸들이기, 우보전술…


실제 이번 성명파동에 대한 김대중 대통령의 대응방식은 ‘관망과 뜸들이기, 우보(牛步)전술’로 봐도 큰 무리가 없을 듯싶다. 5월24일과 25일 초·재선의원들의 성명이 잇따르고 28일 정동영 최고위원과 정균환 총재특보단장이 격돌하면서 소장파의 성명파동이 당내분 사태로 치달았지만, 김 대통령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당시 성명을 주도했던 소장파는 물론이고 여권 전체가 김 대통령의 입에서 떨어질 말을 기다렸지만, 청와대쪽의 반응은 한결같이 “대통령께서 아무 말씀없이 듣기만 하셨다”였다.

김 대통령의 반응이 처음 나온 것은 6월1일. 김 대통령은 이날 김중권 대표의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당이 건의한 내용은 시간을 갖고 충분히 검토해 국정과 당 운영에 참고할 것”이라며 “(이번 사건의 발단이 된) 안 법무장관 문제는 10년 동안 내가 잘 알고 그 인간성과 인권변호사로서의 역할 등을 고려해 임명했다. 그러나 결과가 좋지 않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장파들의 첫 성명이 나온지 8일만이다.

이번 사태수습을 위해 잡힌 일정들도 도무지 서두를 것이 없다는 김 대통령의 뜻을 반영한 듯했다. 사태논의를 위해 열기로 한 의원 워크숍은 “김중권 대표가 중국방문중”이라는 이유로 24일 소장파의 성명이 처음 나온 뒤 무려 7일 만인 31일에야 열렸다. 김 대통령이 당지도부와 공식적으로 만난 것은 사태 발생 8일 만인 6월1일 김 대표로부터 보고를 받은 것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6월4일 김 대통령 주재 최고위원회의에서 13일 기자회견을 통해 국정쇄신 방안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사태 발생일로부터 따지면 20여일 뒤의 일이다.

어쨌든 DJ의 시간벌기식 전략(?)은 일단 성공적인 것 같다. 사실 지금까지 청와대가 내놓은 수습방안은 애초 초·재선의원이 제기했던 문제의식에는 크게 못 미친다. 김 대통령은 6월4일 직접 주재한 최고위원회에서 “건의한 내용을 앞으로 시간을 갖고 검토해 나갈 것이며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나가겠다”고 초·재선들이 제기한 국정운영 시스템 개선을 약속했다. 그러나 안동수 전 법무장관 인사파문의 책임자 문제 등 인사 문제와 관련해서는 6월1일 김중권 대표를 재신임한 데 이어 이날 회의에서도 “대통령 고유권한이므로 여러분의 뜻을 들은 만큼 앞으로 판단해 적절하게 처리하겠다”고 비껴갔다. 당과 청와대의 인적 청산 등 인사문제는 시간을 두고 방안을 찾아볼 계획이니 더 이상 당에서 왈가불가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더욱이 권노갑 전 최고위원을 비롯한 동교동 실세 등 비공식라인의 처리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비공식라인의 척결은 인사 및 국정운영 시스템 개선과 함께 성명에 참여했던 소장파 의원들의 핵심요구 사항이었다.

DJ의 권력누수?

사진/ 지난 5월31일의 당 워크숍 장면.(이용호 기자)
그럼에도 당내 분위기는 이날 김 대통령 주재의 최고위원회의를 계기로 수습의 가닥이 잡힌 것으로 보고 있다. 초·재선의원들도 일단 김 대통령이 국정쇄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한 만큼 실천이 기대된다는 쪽이다. 이번 성명파동을 주도했던 천정배 의원은 “우리의 의견이 충분히 전달됐다고 보기 때문에 지켜볼 것이다. 인사문제를 포함한 국정쇄신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성호 의원은 “국정운영의 최고책임자로서 국정 전반을 고려해야 하니까 당장 모든 조처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대통령이 서명파의 진의를 이해하고 받아들였으니까 합당한 조처를 차분히 해나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더 이상의 문제제기는 김 대통령의 권위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으로 비칠 가능성을 우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이번 파문이 완전히 진화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소장파 의원들은 구체적인 실천조처를 지켜보겠다는 쪽에도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성명에 참여했던 한 의원은 “4일 최고위원회의는 구체적인 결론을 내는 자리가 아니었으니까 일단 대통령이 민심을 반영한 의원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은 것으로 본다”면서도 “그렇지만 인사쇄신이 어느 정도 반영될지 두고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당장은 아니지만, 향후 필요하면 또 문제제기를 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든 이제 첨예한 갈등양상까지 내보였던 당정쇄신론은 당분간 물밑으로 가라앉게 됐다. 그러나 10일 남짓 지속된 이번 파동은 여권 핵심부에 상처를 남겼다. 우선 김 대통령의 권위가 어느 정도 타격을 입었다. 소장파 의원들의 애초 문제제기가 대통령의 고유권한인 인사권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소장파 의원들의 행동이 당장 권력누수를 불러올 만큼 김 대통령의 권위 실추를 부추겼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어떤 면에서는 소장파 의원들의 요구를 일정 정도 수용하는 모양새를 보임으로써 여전히 당내 갈등의 최종 중재자로서 건재함을 보여줄 수 있는 장이 마련됐다. 소장파 의원들은 사태 내내 “이번 문제제기가 대통령의 인사권에 대한 도전이 아니다. 인사권에 개입하는 비공식라인과 국정운영의 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소장파 의원들의 적극적인 해명과는 달리 김 대통령의 인사권 행사를 문제삼은 것 자체가 곧 대통령의 권력누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일반적 시각이다. 김 대통령이 6월4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어려운 상황에서 노력하고 있는 나를 여러분이 도와주기 바란다”고 말한 것도 대통령의 고유권한을 문제삼는 것에 대한 불만과 서운함이 담겨 있는 말로 해석된다. 청와대 관계자는 “최근 당내의 문제제기가 당의 인기회복엔 좋을지 모르지만 전반적인 국정 추진력을 떨어뜨린 측면이 크다”고 우려했다.

어떻든 이번 파동으로 과거보다는 당쪽에 국정운영의 무게가 더욱 실릴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파동이 민주당 의원들 사이에 공감대를 넓히게 된 배경에는 인사 등 국정운영에서 청와대 보좌진이 당을 제치고 독주하고 있다는 민주당 의원들의 소외감도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김 대통령도 6월4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당·정협조가 실효성있게 운용될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또 최고위원회를 명실상부한 당의 중심으로 삼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에 따라 월 1회 청와대 최고위원회 정례화와 함께 최고위원회의 심의기구화도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또 김 대통령은 소속의원과 원외지구당 위원장, 특보단 등 필요한 사람들과 수시로 대화를 하겠다고 밝혀 당과의 의사소통 통로를 대폭 확대하겠다고 밝히는 등 당쪽에서 느끼는 소외감을 적극 달랬다.

동교동계 또 한번 도덕적 치명상

사진/ 정동영 최고위원은 이번 파동을 통해 소신파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한 대신 동교동계로부터 집중적인 견제를 받게 되는 부담도 안게 됐다.(이용호 기자)
이번 성명파동은 여권 내부 역학관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소장파 의원들은 이번 파동을 통해 당내 개혁세력의 주축으로 위상을 굳혔다. 사실 5월24일과 25일 소장파들이 공개적으로 잇따라 당·정쇄신을 요구하고 나설 때만해도 당내에는 “당이 어려울 때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이라는 반발기류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당내 격한 갈등이 터져나오면서도 5월31일 의원 워크숍을 거치며 초·재선의원들의 당·정 쇄신의 분위기는 거역할 수 없는 대세로 자리 잡아갔다.

권노갑 전 최고위원 등 동교동계는 이번 파동으로 다시 한번 정치적 치명상을 입게 됐다. 김 대통령이 이번 사태수습과 관련해 이른바 비공식라인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음에 따라 당장 비공식라인에 대한 조처는 없을 공산이 크다. 권 전 최고위원쪽은 안동수 전 법무장관 인사파동과 관련해 무관함을 강조하고 있다. 권 전 최고위원쪽 관계자는 “권 전 최고위원이 무엇을 잘못했느냐. 소장파 의원들의 주장은 야당의 근거없는 정치공세를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 마포 사무실을 문제삼는 사람들도 있는데, 마포 사무실은 야당 때부터 고생했던 옛 동지들의 사랑방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소장파 의원들로부터 다시 한번 쇄신의 대상으로 지목됨에 따라, 향후 정권의 향배가 갈리는 대선국면을 앞두고 운신의 폭이 훨씬 더 위축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게 정치권의 일반적인 전망이다.

박병수 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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