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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굽실대는 이들의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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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5-2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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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자질 ‘충성’으로 메우는 고위공직자들…‘임 향한 일편단심’ 코메디가 따로 없다

사진/ 김대중 정권에서도 고위공직자들의 빗나간 충성심과 자질 부족 현상은 계속되고 있다.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
임명 43시간 만에 낙마한 안동수 전 법무장관의 ‘충성메모’ 파문은 명색이 법무장관이 어째 그럴 수가 있는가 하는 공분을 자아냈다. 그러나 총리 장관 등 고위공직자들의 세계를 조금 깊숙이 들여다보면 안씨의 충정은 그리 눈에 띠지도 않는 보통의 ‘해바라기'일 뿐이다.

우리 정치사에서는 최고권력자에게 빗나간 충성심을 표출하거나 아첨하는 고위공직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 때 한 각료는 국무회의 도중 이 대통령이 방귀를 뀌자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말해 두고두고 비웃음의 대상이 됐다. 이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 주변에 아첨꾼과 해바라기 장관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무릎 꿇는 게 편합니다”


사진/ “대통령이 칼국수를 먹으니 나도 수제비를 먹겠다.” 정두언씨는 황인성 전 총리(오른쪽)의 김영삼 전대통령에 대한 아부가 가장 심했다고 전한다.
문민정부 등장을 전후한 시점에서 몇몇 고위공직자들의 그릇된 충성경쟁도 좀 알려진 편이다. 김영삼 민자당 대표가 집권당의 대권후보로 선출된 92년 5월, 당시 한 보사부 장관의 행태가 대표적이다. 이 장관은 김 대표에게 장애자 복지대책을 보고하면서, ‘정권재창출을 위한 과제’라는 특별보고서를 올렸다. 물론 이 보고서에서 그는 김 대표를 이미 대통령을 의미하는 ‘각하’로 호칭했다. 92년 대통령선거전을 전후해 김영삼 대표의 둘째아들 현철씨의 위세를 등에 업고 출세하려는 고위공직자들의 한심스런 작태도 극에 달했다. 한 현직 장관은 아들뻘되는 현철씨를 어렵사리 만나자 그 앞에 무작정 무릎을 꿇었다. 당황한 현철씨가 “왜 이러시느냐”고 만류했지만, 그는 “허리디스크가 있어 이 자세가 편합니다”라며 한사코 꿇은 무릎을 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야말로 실소를 금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에 알려지는 고위공직자들의 저급함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부족한 자질을 최고권력자에 대한 과도한 충성심으로 메우려는 장·차관, 청와대 수석비서관 등 고위공직자들은 항상 넘쳐났다. 다만 최고권력자와 고위공직자들의 관계가 일반인들의 접근이 차단된 은밀한 공간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진실이 감춰졌을 뿐이다.

지난 15년 동안 국무총리실 정무, 정보, 공보비서관을 역임하고 정무비서관실 국장까지 지낸 정두언(44)씨가 최근 내놓은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라는 행정평론집은 이런 은밀하고 비밀스런 고위공직자들의 세계를 상당부분 엿볼 수 있게 한다. 현재 한나라당 서대문을 지구당위원장을 맡고 있는 정씨는 이 책에서 자신이 직접 경험한 총리와 장·차관,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의 굴곡된 모습을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최고권력자에 대한 굴종이다. 제5공화국 4기 내각을 맡은 진의종 국무총리(1983년 10월15일∼85년 2월18일)는 취임하자마자 바로 집무실 안의 집기 배치를 청와대쪽으로 바꾸었다. 남쪽을 향해 책상을 놓는 것이 통례인데 진 총리는 애써 북쪽을 향해 돌려놓았다. 정씨는 진 총리의 이 행동을 이른바 ‘임 향한 자세’, 즉 청와대를 바라보고 앉겠다는 충성심의 표현이라고 해석했다.

특히 문민정부 초대총리인 황인성 국무총리(93년 2월25일∼93년 12월16일)는 최고권력자에 대한 아첨과 굴종이 가장 심한 사례로 적었다. 황 총리는 총리공관에 입주해 대통령이 칼국수를 먹으니 나도 수제비를 먹겠다고 해서 직원들이 삼청동 수제비집을 숱하게 다녀야 했다. 취임한 뒤 퇴임 때까지 한번도 거르지 않고 대통령께 문안전화를 했다. 황 총리는 또 청와대에서 전화가 오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예, 각하” 하면서 몸까지 굽실거려 직원들이 민망해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정씨는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황 총리는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청와대에 안부전화를 했고, 너무 굽실거리는 바람에 총리실 직원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면서 “어떻게 그런 사람이 총리로 발탁됐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리베이트 총리' 당사자는 부인

사진/ 91년 전교조 교사 탄압에 분노한 학생들에 의해 계란, 밀가루 세례를 당한 정원식 전 총리. 그는 교수 재직시 연구비의 일부를 리베이트로 제공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 책에는 최고권력자인 대통령뿐 아니라 ‘아예 정권 실세들에게 굽실거리는 총리도 적지 않았다’고 쓰여 있다. 정씨는 “몇몇 총리들은 청와대 수석비서관만 와도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굽실댔다”면서 “대통령의 참모를 마치 대통령 모시듯 하는 꼴불견을 보인 총리도 있었다”고 밝혔다. 장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게 정씨의 전언이다. “가령 6공화국에서 박철언씨가 황태자로 떠오르자 국무회의에 앞서 장관들이 서로 박씨에게 서로 인사하려 경쟁했다. 그것도 단순 인사가 아니라 거의 절하는 것처럼 허리를 심하게 굽혔다.”

정씨는 고위공직자들이 권력에 굴종하는 모습뿐 아니라, 업무수행 능력이나 자질 등에서 기초가 의심스런 경우도 상세히 묘사했다. 노태우 정권 때 청와대 행성수석비서관이었던 이 아무개씨의 경우. 이 수석비서관은 부하직원들이 노 대통령이 연희동에 살 때 함께 운동했던 헬스클럽 회원들과 식사자리에서 필요한 말씀자료를 만들었는데, 맘에 들지 않는다면서 한밤중에 청와대로 들어가 직접 챙겼다고 적고 있다. 전두환 정권 때 한 정무수석비서관이, 실무자들이 천신만고 끝에 만들어낸 청소년대책보고회의안을 보고 내린 첫 지시가 “제목과 크기의 위치를 바꾸라”는 것이었다. 정씨는 이 정무수석은 “정책의 타당성이나 방향의 옳고 그름은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2시간 동안 문서서식만 문제삼았다”고 말했다.

정씨는 또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학자 출신 총리들은 공무를 수행하는 데 무능한 경우가 많았다.… 실제 알려진 바와는 너무도 다른 거품투성이 총리 분들이 꽤 있다’면서 ‘이런 분들이 공직에 기용돼서는 안 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특히 대학에서 본분인 강의조차 제대로 하지 않던 사람들이 정치적 연줄을 타고 총리로 오른 사례를 많이 지적했다. 그는 아예 정부의 연구용역을 맡은 뒤 용역비의 10%를 리베이트로 건넸던 교수가 총리로 임명됐을 때의 황당함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1980년대 중반 명문대학 모 교수가 와서 5천만원의 예산이 책정된 청소년의식구조 조사 용역을 체결했다. 그는 베스트셀러가 된 책의 저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중간보고도 들을 겸 연락을 취했더니 시작조차 하지 않은 눈치였다. 큰일났다 싶어 용역에 대한 계약내용을 다시 한번 주지시키고, 시한 내에 사업을 완료하도록 다짐도 받았다. 그리고 시간이 다가오자 또 다시 진척상황을 체크했다. 그러나 일은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이제는 점잖게 얘기할 틈도 없었다. 그 교수를 불러 지체보상금 운운하며 다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며칠 뒤 제자 한 사람에게 500만원을 들려보냈다. 리베이트였던 것이다. 몇 차례 독촉 끝에 시한도 한참을 넘겨서 용역결과가 나오긴 나왔다. 우려한 대로 그 내용은 엉망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모 교수는 장관을 거쳐 총리가 되었다.’ <한겨레21>의 확인취재 결과 이 ‘리베이트 총리’는 정원식 전 총리(91년 7월8일∼92년 10월7일)로 밝혀졌다. 정 전 총리는 임명된 직후인 91년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밀가루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노태우 정권은 이를 빌미로 한동안 ‘공안정국’을 조성했다. 그러나 정 전 총리는 “그런 일이 없었으며, 나는 전혀 모르는 이야기”라고 리베이트 제공 사실을 부인했다.

386은 예외인가

문제는 정두언씨가 쓴 내용들이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니라는 데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김대중 정권에서도 고위공직자들의 빗나간 충성심과 자질 부족 현상은 계속되고 있다. 안동수 전 법무장관의 ‘충성메모’는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줬을 뿐이다. 이보다 앞선 지난해 5월23일 이한동 총리는 김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받으면서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 것에 대해 경하드린다. 신명을 바쳐 나라와 대통령에게 충성하겠다”는 ‘충성발언’으로 이미 비난받은 바 있다.

현 정권 실세인 동교동 인사들에 대한 고위공직자들의 굽실거림도 자주 목격된다. 지난해 3월 어느날 서울 종로의 한 한식집에서 술을 먹던 검찰의 고위간부는 동교동 실세인 민주당 한 의원이 옆방에서 회식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직접 찾아와 정도 이상의 예의를 갖췄다. 당시 이 자리를 목격한 인사는 “비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4·13총선 직전 공천과정에서 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던 몇몇 3·36 신진인사들도 권노갑 의원 집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머리를 조아렸다. 권력의 실세에 붙어 출세하려는 욕구의 표현이다. 특히 386 대표주자였던 허인회 위원장(민주당·동대문을)은 그해 4월20일 청와대의 총선낙선자 위로연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큰절을 올려 물의를 빚기도 했다.

김대중 정권에서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지낸 한 인사는 “안동수 충성서약문 정도는 일상적이며, 그보다 황당한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수석비서관 시절 정부부처 고위관료가 나에게 찾아와 무릎을 꿇고 얘기해 당황한 적도 있다”면서 “대통령과 고위공직자 둘 사이에 오가는 말은 사적인 역영으로 인정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현 정부에서 비교적 소신파로 불렸던 한 전직 장관도 고위공직자들의 한심한 수준에 혀를 찼다. “나도 장관을 했지만, 주변에서 아무 소신이나 준비없이 장관에 올라온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비전과 뚝심,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는 각오도 없었다. 그저 자리에 연연하고 장관을 짧게 할 경우 한심한 불만을 늘어놓았다. 도대체 준비없이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박상규 민주당 사무총장은 안동수 전 장관의 ‘충성메모’ 파문이 시작된 4월22일 기자간담회를 자청했다. 그리고 “국민 모두가 국가 원수인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장관이 자신을 발탁한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게 뭐 문제되느냐는 것이다. 자신의 업무를 제대로 수행해 대통령을 성실히 보좌한다는 의미의 충성을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통령의 정치적 부담도 덜어주고, 궁극적으로 국민에게 이익을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신의 부족한 자질을 권력자에 대한 아첨과 빗나간 충성심으로 메우려 하고 어울리지 않는 자리를 탐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과 대통령뿐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불행이기도 하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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