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권력의 타살 의혹 조만간 발표 예정… 진실 접근 위해 특별법 제정 움직임도
5월10일 오후 5시 서울역 광장. 머리가 희끗희끗한 촌로 10여명이 행인들을 향해 애절하게 외친다. “이제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정말 여러분의 도움과 제보가 필요합니다.”
“진실을 밝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허영춘, 신정학, 이기주, 최봉규, 박성현…. 어느 날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아들, 딸, 형과 동생의 억울한 넋이라도 달래겠다는 애달픔을 안고 거리에 선 사람들.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442일간 천막농성을 벌이며 지난해 7월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 제정을 이뤄냈던 그 낯익은 얼굴들이다. 특별법에 따라 설치된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양승규·가톨릭대 대우교수)가 현재 한창 활동중이다. 그런데 이들은 다시 거리에 섰다. 불안감 때문이다. “법이 허용한 1차 조사시한 6개월은 다 됐는데…. 진상규명위에 물어봐도 속시원히 얘기를 안 한다. 약속했던 4월30일 중간발표마저 취소됐다. 이렇게라도 해야지, 안 그러면 답답하고 걱정스러워 살 수가 없다.”(허영춘·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의문사지회장) 이들의 말과 행동에는 진상규명위가 사건들을 속시원히 밝히지 못하고 관련자들에게 면죄부만 준 채 활동을 마무리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묻어났다.
그러나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들은 “유족들의 우려는 이해하지만, 기대를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5월11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 이마빌딩 2층 진상규명위 사무실. 실제 조사관들은 그 어느 때보다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전 11시, 한 조사실에서는 설훈 민주당 의원의 참고인 진술을 받고 있었다. 지난 1987년 6월8일 실종됐다 88년 3월2일 창원 불모산에서 유골로 발견된 대우중공업노동자 정경식씨 사건 때문이다. 설 의원은 당시 정씨 죽음에 대한 의혹을 밝히기 위한 진상조사를 벌인 바 있다. 조사 1,2,3과와 특별조사과 등에 마련된 조사실에도 다른 의문사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이 계속 불려들어왔다. 진상규명위는 지난해 10월17일 공식 출범했다. 지난 1월2일 71년 4월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 양상석(당시 신민당 금산지구당 위원장)씨 사건 조사를 시작으로 현재 모두 84건을 조사중이다. 7년 이상 민주화운동 경력자 22명과 검찰, 국군기무사령부, 국가정보원 등에서 파견된 현직 수사관 27명 등 모두 49명의 조사관이 활동중이다. 이들은 전국을 누비며 관련 사건을 6개월째 추적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아무런 공식발표도 내놓지 않고 있다. 법적인 제약이 1차적 이유다. 의문사특별법은 모든 사건의 조사가 종료되면 1개월 안에 조사결과 보고서를 작성해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그 진상을 공표할 수 있도록 돼 있는 것이다. 수사기밀 유지와 조사의 객관성 확보라는 내부 판단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사건 진행상황이 언론에 공표될 경우 짜맞추기 진술이나 인권침해를 당하는 사람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상당수 사건 막바지 조사단계에 이르러
때문에 지금까지 언론이 먼저 포착해 보도한 박태순씨와 신영수씨 사건을 제외하면 조사 진행상황조차 드러난 게 없다. 노동운동가인 박씨는 지난 92년 8월 행방불명 처리됐다. 그런데 진상규명위 특별조사과 조사관들의 끈질긴 추적으로 박씨가 시흥역 철로에서 숨진 채 발견됐으나 신원불명의 행려사망자로 분류, 화장된 사실이 밝혀졌다. 권력기관에 의한 타살 여부는 아직 조사중이다. 결국 결론이 맺어진 것은 82년 3월 잠실 삼성교 아래서 변사체로 발견된 건국대생 신씨 사건 하나인 셈이다. 진상규명위는 신씨 죽음을 단순실족사로 결론맺었다. 경찰에 의한 타살 의혹을 제기해온 유족들의 주장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이런 전후 사정을 고려할 때 다른 유족들이 불안감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진상규명위는 조만간 상당히 의미있는 결과물이 나올 것이라며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진상규명위 황인성 사무국장은 “지금 당장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국가공권력에 의한 명백한 타살 의혹이 있는 부분도 곧 드러날 것”이라며 “지금 그 막판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몇몇 조사관들도 기자에게 “진상규명위 설치 의미를 살릴 만한 몇 가지 가시적 성과가 곧 나올 것”이라고 귀띔했다.
위원들과 조사관들의 말을 종합하면 조사대상 84건 가운데 상당수가 이미 막바지 조사단계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수사권은커녕 관련 자료에 관한 압수수색권조차 없는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사관들이 발로 뛴 결과 상당수 사건은 자료수집과 진정인 조사, 진정인쪽 참고인 조사를 이미 끝마쳤다. 몇몇 의문사는 실제 국가권력기관이 개입됐다는 심증도 확고해졌다. 특히 유가협에서 의혹을 제기한 44건 가운데 국가권력의 개입에 의한 타살로 결론날 사건들이 좀더 많다는 게 위원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진상규명위는 지금까지 조사결과를 토대로 최근 가해자로 지목된 공안기관 종사자들을 대대적으로 불러들여 조사를 시작했다. 물론 공안기관 종사자들의 저항도 거세지고 있다. 몇몇 양심선언자들이 진상규명에 도움을 주고 있지만 대부분 기관종사자들은 출석거부, 진술거부, 허위진술 등의 방법으로 강하게 저항하고 있다.
결국 진상규명위 활동의 성패는 이들 정부기관 종사자들의 저항을 어떻게 꺾느냐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들 대부분이 의문사특별법의 한계를 꿰뚫고 있는 전문가들이기 때문이다. 몇몇, 특히 퇴직자들은 출석을 거부하고 있다. 특별법은 관련자가 출석을 거부하면 위원장이 동행명령장을 발부하고, 이를 어기면 법원에 과태료 부과를 요구할 수 있게 돼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동행명령장 발부는 단 1건뿐이다. 과태료부과 절차는 진행도 않고 있다. 위원회 내부에서 현행법에 보장된 권한이라도 행사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지만 실효성이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때문이다. “법원의 과태료 판정은 시한도 많이 걸리고 액수 또한 미미하다. 이런 현실에서 동행명령장 발부는 사실상 조사포기 선언이다. 차라리 관련자를 한번 더 설득해 조사에 응하도록 하는 게 더 실효성이 있다.” 위원회의 관계자들이 전하는 현실이다.
현직 종사자들은 대부분 출석한다. 그러나 입맞추기와 허위진술, 무작정 버티기가 잦다. 상당수는 출석 전에 서로 전화연락을 주고 받으며 먼저 조사받은 사람들과 진술내용을 짜맞춘다. 무작정 버티는 경우는 조사활동을 더욱 힘겹게 한다. 정부쪽 수사기관에서 파견나온 한 조사관조차 “내가 그 기관에 근무했지만, 논리적으로 빤한 사실조차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할 때면 정말 비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조사관은 특히 “인권침해를 바로잡겠다는 진상규명위가 물리적 강제수단을 통해 진술을 끌어낼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이들은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며 버티기도 한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퇴직자는 출석 거부, 현직은 발뺌 일관
진상규명위는 유족들의 심정 등을 고려해 가능한 빠르고 철저하게 사건을 종결짓는다는 내부 방침을 세워놓고 있다. 그러나 조사 막바지에 기관 종사자들의 이런 저항이 계속되면서 진상규명의 결정적인 물증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될 게 분명해 보인다. 진상규명위는 사건당 6개월인 1차조사 시한이 만료되면 법에 허용된 3개월을 더 연장해서라도 반드시 진실을 밝히겠다는 각오다.
그러나 현재 상황을 볼 때 기한을 3개월 더 연장하는 것만으로는 진실에 접근하기 어렵다. 때문에 진상규명위는 좀더 효율적인 수단을 강구하고 있다. 바로 의문사특별법 개정 요구다. 지난 4월27일, 양승규 진상규명위 위원장은 김중권 민주당 대표에게 조사에 불응하거나 허위진술을 할 경우 최소한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상의 벌금에 처할 수 있는 처벌규정을 만들어줄 것을 요구했다. 아울러 국가권력이 개입한 살해 등 반인륜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도록 형법을 손질할 것도 요청했다. 진실 규명을 통한 화해가 의문사특별법 제정 목적인 만큼 진실을 밝히는 사람들은 용서하고 포용하되, 끝가지 숨기는 사람은 언제든 반드시 처벌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자는 것이다.
다행이 진상규명위의 이런 요구가 최근 정치권 안팎에 공감을 얻고 있다. 일단 민주당은 오는 6월 임시국회에서 의문사특별법을 개정할 계획이다. 현재 사건당 6개월로 하되 1회에 한해 3개월 연장할 수 있는 조사기간을 3개월씩 3회 연장하고, 위원회에 직접 과태료 부과권을 부여하자는 데는 내부 합의가 이뤄진 상태다. 이종걸 의원(민주당 인권특위위원장)은 “의문사 진실 규명은 역사를 바로잡는 중대한 과제인 만큼 최대한 실효성 있게 법을 고칠 것”이라고 말했다. 유가협과 민주노총 등이 참여한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는 한발 더 나갔다. 진상규명위원회에 직접 수사권을 부여하고, 반인륜 범죄의 경우 공소시효 적용대상이 될 수 없도록 형법을 손질하자는 것이다. 국민연대는 이미경 민주당 의원을 통해 오는 6월 국회에서 이런 개정안을 낼 계획이다.
이런 움직임들은 앞으로 진상규명위 조사활동에 상당한 활력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법 개정 움직임 자체가 일단 기관 종사자들의 저항의지를 일정 정도 꺾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진상규명위원회도 진실규명을 위해 좀더 적극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지금까지 조사과정에서 국가공권력에 의한 살해 혐의가 상당부분 확인된 몇몇 사건에 대해서는 예정보다 빨리 그 결과를 공표하는 방안을 심각하고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5월 말이나 6월 초쯤 몇몇 사건이 실제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 과거 공권력이 자행한 폭력의 실상을 알려 국민적인 반성을 촉구하고, 진상규명 활동의 정당성과 제도개선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겠다는 전략적 선택인 셈이다. 이 경우 제보 및 양심선언 활성화도 기대할 수 있다.
반민특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지금 서울역 광장에 나가면 의문의 죽음을 당한 희생자 가족들의 애절한 외침을 들을 수 있다. 이들은 “의문사 진상규명은 우리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러분이 진실을 밝히는 노력에 눈을 감는다면 결국 내일은 당신의 아들 딸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할 수 있다”고 외친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이 불행한 역사를 바로잡고 진실을 세우는 전기가 될 것인지, 아니면 해방 직후인 1948년 10월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처럼 성과없이 무너지는 과오를 반복할 것인지 그 결과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대한 우리 모두의 관심과 성원에 달려 있다.
글/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사진/ 이용호 기자 yhlee@hani.co.kr

사진/ 누가 이들의 눈물을 거두게 할 것인가. 군 의문사 유가족들이 진실 규명을 촉구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러나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들은 “유족들의 우려는 이해하지만, 기대를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5월11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 이마빌딩 2층 진상규명위 사무실. 실제 조사관들은 그 어느 때보다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전 11시, 한 조사실에서는 설훈 민주당 의원의 참고인 진술을 받고 있었다. 지난 1987년 6월8일 실종됐다 88년 3월2일 창원 불모산에서 유골로 발견된 대우중공업노동자 정경식씨 사건 때문이다. 설 의원은 당시 정씨 죽음에 대한 의혹을 밝히기 위한 진상조사를 벌인 바 있다. 조사 1,2,3과와 특별조사과 등에 마련된 조사실에도 다른 의문사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이 계속 불려들어왔다. 진상규명위는 지난해 10월17일 공식 출범했다. 지난 1월2일 71년 4월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 양상석(당시 신민당 금산지구당 위원장)씨 사건 조사를 시작으로 현재 모두 84건을 조사중이다. 7년 이상 민주화운동 경력자 22명과 검찰, 국군기무사령부, 국가정보원 등에서 파견된 현직 수사관 27명 등 모두 49명의 조사관이 활동중이다. 이들은 전국을 누비며 관련 사건을 6개월째 추적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아무런 공식발표도 내놓지 않고 있다. 법적인 제약이 1차적 이유다. 의문사특별법은 모든 사건의 조사가 종료되면 1개월 안에 조사결과 보고서를 작성해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그 진상을 공표할 수 있도록 돼 있는 것이다. 수사기밀 유지와 조사의 객관성 확보라는 내부 판단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사건 진행상황이 언론에 공표될 경우 짜맞추기 진술이나 인권침해를 당하는 사람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상당수 사건 막바지 조사단계에 이르러

사진/ “의문사의 진실은 끝까지 추적한다.” 의문사진상규명위 특별조사과 조사원들이 자료를 검토하고 있다.

사진/ 이제는 그날의 진실을 말해야 한다. 의문사진상규명 서명 캠페인을 위해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사진/ 이용호 기자 yhlee@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