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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민주당은 신기루를 좇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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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5-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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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 연합에 의한 정국주도권 확보 요원… 수적 힘의 정치보다는 정체성 확보 시급

사진/ “3당 연합은 결국 허깨비였다.”지난 5월6일 김중권 민주당 대표,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 김윤환 민국당 대표가 경기도 한 골프장에서 만났다.(이용호 기자)
여권이 4월30일 국무총리와 행자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선별표결’로 무산시킨 이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난 민주당 의원들은 잔뜩 풀이 죽어있었다.

“개혁입법도 뜻대로 처리하고 원칙에 따라 떳떳하게 국회운영 하자고 3당 연합한 것 아니냐. 투표도 제대로 못하는 게 무슨 정책연합이냐.”(수도권 한 재선의원)

“자민련은 이한동 총리해임안이 통과되면 볼장 다 본다는 식이고, 우리당 의원도 불만투성인데…. 어쩌겠냐. 무력감을 느낄 뿐이다.”(호남지역 한 재선의원)

떳떳치 못한 이번 표결을 계기로 민주당 안에서 3당 정책연합의 실효성에 대한 회의론과 함께 정국 운영에 대한 무기력증이 다시 퍼지고 있는 것이다.


원칙없는 정국 운영에 무기력증 확산

이상수 총무는 표결 이틀 뒤인 4월2일 불가피성을 항변했다. “재미삼아 연못에 돌을 던져도 개구리는 그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다. 야당이 낸 해임안은 그만큼 심각한 문제였다.” 이 해명은 지난해 11월18일 박순용 검찰총장 탄핵안을 같은 당 소속 이만섭 국회의장을 감금하는 퇴행적 방법을 동원해 무산시킨 뒤 정균환 당시 총무가 내뱉은 말과 논리적으로 맥이 닿아 있다. ‘소수정권 한계론’과 조기 레임덕 발생에 대한 우려가 그 핵심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정이 좀 달랐다. 당시 대다수 당직자들이 자괴감을 느끼면서도 정 총무의 발언에 심정적으로 동의했다. 자민련과 공조가 복원되지 않은 상황에서 119석의 민주당이 정상적 방법으로 탄핵안을 막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공조복원을 통해 정국주도권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몇몇 최고위원들이 당장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5월3일 정대철 최고위원이 포문을 열었다. “지금까지 사태를 보면 참 답답하다. (선별기권이) 불법은 아니지만 자괴감이 들었다. 우리 의원의 인권은 도대체 어디 간 것이냐.” 4일 김원기 최고위원은 한발짝 더 나갔다. “3당 정책연합을 했으면 정책위의장들끼리 현안을 조율하면 되지, 왜 당 대표들이 나서냐. 세 사람이 함께 모여 있는 모습은 민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그림이다.” 형식은 김중권 대표가 6일 김종호 자민련 대표, 김윤환 민국당 대표와 골프회동을 약속한 데 대한 비판이다. 그러나 그 핵심 내용은 3당 연합에 대한 회의론이다. “5·6공 민정당 출신인 3당 대표들로 개혁은 가당찮다”는 정체성 혼선에 대한 당 내부의 불만을 대리 표출한 것이다.

사실 민주당은 집권 이후 줄곧 원내 다수인 한나라당이 발목을 잡아 국정을 제대로 운영할 수 없다고 외쳐왔다. 특히 이만섭 의장을 감금하는 수모를 자초한 뒤 “원내 다수의석 확보를 통한 힘의 우위 전략”에 거의 목을 걸었다. 지난해 12월9일 취임한 김중권 대표는 민주당 의원 4명을 자민련에 꿔주는 엽기적인 수단을 동원해 ‘DJP공조’를 복원했다. 이때부터 당 안팎에서는 “이제 한번 해볼 만하다”는 탄성과 함께 이른바 ‘김중권 열풍’까지 몰아쳤다. 그리고 지난 4월4일, 민주국민당과의 정책연합을 통해 꿈에도 그리던 원내 과반수 137석을 달성했다.

한동안 자신만만한 태도도 보였다. 특히 지난 4월25일 삼청동 총리공관서 열린 3당 지도부의 첫 국정협의는 그 절정이었다. 이날 3당 지도부는 “인권법, 반부패기본법, 돈세탁방지법 등 ‘3대 개혁입법’을 4월 임시국회안에 표결을 통해서라도 통과시키겠다”고 장담했다. 정책연합을 통해 힘의 우위를 확보한 만큼 거칠 게 없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바로 다음날인 4·26 재보궐 지방선거에서 텃밭인 임실, 군산까지 무소속에 내주는 참패를 맞본 민주당은 민심에 경악하며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4월30일, 뭔가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던 국회표결에서는 또 한번 꼴사나운 모습만 내보였다. 개혁3법 가운데 반부패기본법과 돈세탁방지법은 여당 내부의 혼선과 저항, 야당의 버티기로 상정조차 못했다. 총리와 행자부 장관 해임안은 여당 의원들도 못 믿어 ‘선별투표’라는 변칙을 동원해 무산시켰다. 여권이 3당 연합을 통해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지만, 민주당의 현실은 의장감금 때나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사실이 증명된 셈이다.

궁색한 민주당은 그나마 이날 가까스로 통과된 인권법을 놓고 생색을 내려 했다. 그러나 여론은 썰렁하다. “차라리 부결된 한나라당안이 더 개혁적”이라는 말이 나돌고, 지난 3년 동안 인권법 제정을 외쳤던 시민단체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이미 거부권행사를 요구했다. 이회창 총재와 정창화 총무 등 한나라당 당직자들은 아예 “3당 연합이니 강한 여당이니 소리지르더니 왜 그러냐. 꼭 아지태가 북벌을 주장하던 때의 궁예와 비슷하다”며 민주당을 조롱하고 있다.

구조적 한계상황… 뾰족수 보이지 않아

사진/ 민주당은 정국 운영의 무기력중에 휩싸여 있다. 소장파 의원들은 ‘대폭 교체론’까지 거론하고 있다.(이용호 기자)
결국 답답한 쪽은 민주당이다. 민주당 안에서는 “더이상 이대로는 못해먹겠다”는 아우성과 함께 해결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솔직히 수적 우위의 문제가 아니라, 당 지도부의 리더십이 문제다. 의약분업, 언론개혁, 국가보안법…. 뭐하나 제대로 된 게 없다. 이제 모두들 지쳐 있다. 개혁성향 의원조차 의욕이 없다. 빨리 해법을 내놓아야 한다.”(수도권 개혁성향 한 재선의원) 4·26 지방선거의 패배 이유까지도 3당 연합 탓으로 돌리는 지경이다. “솔직히 3당 지도부가 다 옛여권 세력인데, 그 얼굴로 뭐가 되겠냐. 호남 유권자들은 우리편인지 아닌지 헷갈린다고 말한다.”(수도권 한 초선의원) 김원기 최고위원이 5월4일 제기한 정체성 문제와 맥이 닿아 있는 비판이다.

민주당의 고민은 이런 안팎의 비판과 조롱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해법을 찾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이번 사태는 집권 이후 누적된 한계들이 주변 상황 악화로 더욱 크게 불거진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당 당직자들은 그동안 정권의 최대업적으로 치부되던 남북문제나 경제문제를 잘 풀 경우 소수정권의 한계를 넘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를 지렛대로 정권 재창출도 가능하다는 자신감까지 내보였다. 그러나 미국 부시 정권 등장 이후 남북문제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경제지표도 엉망이다. 여기에 최근 각종 여론조사결과는 민주당의 불안감을 더 부채질하고 있다. 그동안 답보상태였던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지지율은 상승하고 민주당의 잠재적 대권주자들과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4월30일 표결에서 정체성 혼란까지 감수하며 추진했던 3당 연합마저 무력함을 드러내자 잦아들던 불만이 다시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 한 핵심 당직자는 답답한 심경을 이렇게 말했다. “주변은 온통 악재뿐이다. 무슨 돌파구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정권 재창출의 희망은 점점 멀어지고…. 그저 손놓고 남는 시간을 죽이는 수밖에 없다. 모두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

물론 당 지도부는 해법을 모색중이다. 우선 개혁수습을 통한 전선정리론이 한 흐름이다. 한화갑 최고위원은 최근 당원들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언론사 세무조사 등 전선이 많은데, 5월중에 전선이 완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균환 총재특보단장도 5월2일 이른바 ‘개혁 수확론’을 제기했다. “실컷 뿌려놓은 씨앗을 한순간 가을소나기에 날려버릴 수 있다. 더이상 개혁작업을 확대하지 말고 당정이 똘똘 뭉쳐 지금껏 뿌린 씨앗을 잘 추수해야 한다”는 게 핵심내용이다.

국면전환을 위한 분위기 조성 노력도 엿보인다. 지난 3일 김중권 대표가 급작스레 내던진 ‘대선후보 조기가시화론’이나, 이재정 의원이 4일 “당에 개헌연구위원회 같은 공식기구를 설립하자”고 제안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그러나 이 방안은 민주당의 현재 역량을 볼 때 논란만 촉발한 채 잦아들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당 일각에서는 형식적 제스처보다는 발상의 대전환을 통한 정면승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그동안 무리한 수적 우위 확보에 몰두했다. 그 결과는 4·30 표결로 확인됐다. 더욱이 강창희, 김용환, 정몽준 등 무소속 3인방이 친 한나라당적 성향을 보이면서 민주당이 확고한 수적 우위를 확보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4·26 재보선에서 흉흉한 민심도 확인됐다. 이제 패러다임의 대전환말고는 방법이 없다.”(민주당 다른 한 핵심 당직자) 이 당직자는 “이제 정말 다 털어버리고, 야당에게 깨지고 이회창 총재를 띄워주는 것일지라도 당당하고 떳떳하게 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살길이 보인다”며 진정한 상생의 정치를 그 대안으로 제시했다.

자기 정체성 확립해야 희망이 보인다

소수파로 돌아갈 각오를 갖고 개혁적인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쪽으로 당을 쇄신해야 한다는 주장도 상당한 세를 형성하고 있다. “솔직히 우리당은 오만군상이 다 섞인 잡탕밥이다. 이들이 제각각 아우성인데 뭔들 제대로 되겠냐. 몇몇 옛여권 출신들은 ‘옛날 여당은 10억원씩 주는데, 여기는 돈도 안 준다’는 불만까지 터뜨린다. 이런 사람을 모아서 수적우위를 확보한들 뭘 할 수 있겠냐. 몽니가 걱정돼 이번 표결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의 색깔을 좀더 명확히 해야 한다.”(호남지역 한 3선 의원) “지금은 정책 한두개 바꾸고 정리한다고 호전될 상황이 아니다. 당 자체가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도록 전면적인 신장개업을 해야 한다.”(푸른정치모임 소속 한 재선 의원) 이들은 정체성 확립을 통해 개혁 지지세력을 확실히 끌어들이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믿는다. 최근 몇몇 개혁성향 소장파를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는 ‘김중권 대표 교체론’은 이런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해법은 무성하다. 그러나 누가 과연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용기를 발휘할지는 의문이다. 또 현실적인 힘을 중시하고 3당 연합을 금과옥조로 여겨온 김대중 대통령이 그런 당 안팎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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