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여당의 잇단 실정에 등돌린 호남민심… 민주당 간판은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
4·26 재보궐선거가 끝난 다음날인 4월27일 오후 2시께 전북 군산 시내에 있는 한 노인정에서 사랑방 정치가 벌이지고 있었다. 이번 선거를 놓고 집권여당에 대한 강도높은 비판이 봇물터지듯 계속됐다. 담배를 물고 있던 한 할아버지(67)가 사투리를 섞어가며 불만을 토해냈다.
“이제 김대중 정부는 끝난겨. 정말 제대로 평가받은 것이여. 아래 것들 민심을 확실하게 표로 보여준 것 같아 속이 다 시원하구만. 앞으로는 민주당 이름 하나만 가지고는 당선되기 힘들 것이여….”
노인들 대화는 현 정부와 집권여당의 실정에 대한 독설로 계속 이어졌다. 말 끝에는 불만이 배어 있었고 실망이 묻어났다.
다른 한 노인(65)은 정치인을 싸잡아 비난했다. “누가 되더라도 다 마찬가지여, 우리가 어디 한두번 속아왔간디. 나라에 대한 충성은 정치인들이 하는 것이 아니어. 노동에 대한 대가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뼈빠지게 몸둥아리 움직거리며 일하는 시골농부들이 하는 것이여….”
전북 재보궐선거 참패… 공천=당선은 옛말
민심이반 현상이 심각하다. 4·26 재보궐선거 결과는 집권여당의 잇단 실정에 대한 유권자들의 민심이 얼마나 냉혹한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4월26일 치러진 전국 7곳의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집권여당인 민주당은 전북 군산과 임실 2곳에서 무소속 후보에게 패배하는 등 후보를 낸 4곳에서 한석도 건지지 못하는 참패를 했다. 반면 야당인 한나라당은 서울 은평구와 부산 금정구, 경남 마산시와 사천시 등 모두 4곳에서 승리했다. 최대 격전지로 꼽힌 서울 은평구청장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노재동 후보가 민주당 이석형 후보를 눌렀다. 민주당과 자민련이 연합공천한 논산시장 선거에서는 자민련 임성규 후보가 당선됐다.
경남 마산시장과 사천시장에는 한나라당의 황철곤·김수영 후보가 각각 승리했고, 부산 금정구청장에는 한나라당 김문곤 후보가 상대후보들을 큰 표차로 따돌리고 단체장이 됐다. 전북 군산시장 선거에서는 무소속 강근호 후보가 민주당 김철규 후보에게 5635표 차이로 이겼다. 전북 임실군수 선거에서는 무소속 이철규 후보가 민주당 김진억 후보에게 361표 차이로 승리했다. 임실보다 군산이 상당한 표 차이를 보여줬다.
민주당은 선거결과에 침통한 표정이다. 선거 다음날 열린 당4역·국회 상임위원장단 연석회의에서는 “민심이 정부여당에 등을 돌렸다”며 특단의 대책마련이 필요하다는 발언들이 쏟아졌다. 김중권 대표는 “의약분업, 대우노동자의 과격진압 등 악재가 겹쳐 국민의 마음을 상하게 한데다 어려운 경제의 회생을 위해 당이 노력했지만 국민에게 와닿지 않은 것 같다”고 패인을 분석하고 “패배의 아픔을 딛고 겸허한 마음으로 국민을 섬기고 집권여당으서 책임을 절감하는 자성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특히 호남지역의 선거결과에 대해 큰 충격을 받은 분위기다. 호남지역의 한 중진의원은 “당 지도부가 호남지역에 관한 한 ‘공천=당선’이라는 생각을 이제 접어야 한다. 지역에서는 표 몰아줘서 정권교체했지만 달라진 게 뭐냐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오히려 지역감정 해소니 뭐니해서 호남이 역차별을 받고 있다는 호소도 들린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태평이다. 정말 이대로는 안 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왜 이렇게 텃밭민심마저 돌아선 것일까. 실제 지난 1997년 치러진 대선에서 전북은 민주당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정권교체’라는 대명제 아래 전라도 한을 풀고자 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정권만 바뀌면 지역이 발전하고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표를 모아줬을 때의 마음이 이제는 실망과 좌절로 바뀐 듯하다.
지역 선거관계자들은 민주당이 텃밭인 전북지역에서 전패한 선거결과에 대해 ‘전북 홀대론’과 맞물린 피해의식에다 지금의 전반적인 경제난을 그 원인으로 꼽는다. 여기에 지난해 온 국민이 한바탕 홍역을 치르고 김대중 대통령 자신도 잘못을 인정한 의약분업 문제뿐만 아니라 공교육, 대우차 사태 등이 겹쳐 민심이탈을 부추겼다. 무소속 강근호 군산시장 후보쪽 선거관계자는 “민주당이 민심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았다. 민주당 후보는 이번 선거 내내 ‘미워도 다시 한번’을 외치고 다녔다. 또 ‘DJ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지역민심은 ‘3년이나 힘을 실어주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도대체 바뀐 게 뭐냐’는 쪽으로 돌아선 지 오래”라고 말했다.
표류하는 지역사업이 민심이탈 부추겨
특히 전북 군산은 새만금사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1991년부터 추진된 사업이 강산이 한 차례나 바뀔 만큼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사업추진 여부가 결정되지 않았다. 어떤 형태로든 결론이 났어야 함에도 지지부진한 채 시간만을 소모하고 있는 데 대한 실망감이 커진 것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사업비가 1조1300억원이라는 엄청난 액수가 투자됐다. 많은 공을 들인 국책사업이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표류하는 데 따른 실망이 이번 선거에서 무소속 선택을 이끌었다고 선거관계자들은 해석하고 있다. 민주당 군산지구당 강현욱 위원장은 지난 4월27일 “새만금사업 지연과 이마트 군산점 개점에 따른 민심이반이 큰 악재로 작용한 것 같다”며 패인을 분석했다. 그는 또 “이번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선거과정에서 들어난 지역민심을 거울삼아 시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당으로 거듭날 것을 다짐한다”고 밝혔다.
이 밖에 선거관계자들은 인물론을 지적하기도 한다. 전북 군산과 임실에서 고배를 마신 민주당의 두 후보는 모두 전북도의회 의장 출신인 공통점을 갖고 있다. 군산지역의 경우 당선된 무소속 강근호 후보는 군산고와 중앙대 출신으로 이 학교 총동창회장을 역임했다. 국회의원 선거를 비롯해 선거판에 8번이나 도전, 7전8기한 강 후보가 인지도면에서 유리했다. 특히 군산은 1996년 15대 총선에서 옛 여권 출신인 강현욱 의원이 당시 야당의 텃밭에서 당선돼 황색바람을 잠재운 바 있다. 당보다 인물을 선택했던 과거가 있는 것이다. 임실은 이철규 후보가 관선시대 때 임실군수를 역임해 행정을 알고 있다는 장점이 유권자들의 선택을 이끌었다. 상대적으로 인물면에서 우위를 보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전북 군산시 나운동 ㄹ아파트에서 경비를 맡고 있는 김아무개(56)씨는 “이제는 당보고 찍지는 않는 것 같혀. 누가 시장이 되고 대통령이 되든 나와 우리 가족만 편안하게 잘살게만 해주면 되지 않겠어. 요즘같이 취직도 안 되고 경제가 힘든 판국에 누가되든 상관없어…”라고 대답했다. 그는 또 “성가시럽게(힘들게) 투표할 것이 뭐 있어. 능력있는 사람이 아무나 당선돼서 배부르게 해주면 되는 것이여”라고 말했다.
이번 전북지역 선거에서 주목할 부분이 하나 더 있다. 어쩌면 무소속의 반란은 예견됐는지도 모른다. 무소속 후보와 반여권 세력인 젊은 세대 및 단체가 연대를 한 것이다. 잘 알려진 운동권 출신 함운경(37·미래발전연구소장)씨가 무소속 강근호 군산시장 후보쪽의 선대본부장을 맡았다. 함씨의 합류는 그동안 소극적으로 선거에 참여했던 층과 젊은 세대들의 표를 무소속으로 돌리는 데 큰몫을 했다는 게 지역 선거관계자들의 평가다. 군산시 나운동과 신풍동 등 아파트 밀집지역에선 실제로 강 후보가 우세했다. 그는 강 후보를 지지한 이유를 “이번 선거는 반민주적 기회주의 정치세력에 대한 개혁정치세력의 심판”이라며 “야합과 부정으로 정치인이 되기보다는 당당히 자기 삶을 살아가는 정치적 선택이 가장 아름다운 선택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선거결과에 대해 “한지붕 세가족으로 나뉜 상대방 후보쪽 조직의 갈등, 개혁세력의 가세, 집권여당을 반대하는 사회적 분위기 등 모든 변수가 무소속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 같다”며 “이는 개혁을 바라는 군산 시민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반여권 세력이 무소속 후보에 힘실어
전북 임실의 이철규 후보쪽은 농민회의 지원을 받아 조직력에 약한 무소속의 단점을 극복했다. 현 정부의 농정실패가 무소속 후보와의 연대를 이끌었다. 또 민주당 임실·완주지구당 위원장인 김태식 의원과 지난해 4·13총선에서 맞붙어 떨어진 이돈승(42·전북포럼 대표)씨의 지지도 한몫했다. 한나라당 전북도지부는 4월27일 “공천이 당선이라고 생각해온 민주당의 오만에 유권자들이 분노의 채찍을 든 것”이라며 “정책과 인물이 선택의 기준이 돼 여야가 공존하는 시대가 열리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전통적인 지지기반인 호남지역 민심마저 민주당을 떠나고 있음을 확인한 4·26 재보궐선거, 과연 집권여당이 이번 선거결과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을지 궁금하다.
전주=박임근 기자/ 한겨레 사회2부 pik007@hani.co.kr

사진/ 전북지역 유권자들은 민주당의 텃밭이라는 지역감정에 따른 투표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다. 재보궐선거 유세장을 집권여당의 실정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전북 재보궐선거 참패… 공천=당선은 옛말

사진/ 무소속은 반여권 세력의 연대를 통해 힘을 얻었다. 군산시장에 당선된 강근호 후보(오른쪽)와 함운경 선거대책본부장(왼쪽).

사진/ 임실군수에 당선된 이철규 후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