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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외로운 의원의 소신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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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5-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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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법사위에서 돈세탁방지법 놓고 힘겨운 싸움 벌이는 조순형·천정배 의원

사진/ 소신투쟁이 외롭고 힘들지라도…. 계좌추적권이 포함된 돈세탁방지법 제정을 주장하는 조순형·천정배 의원이 국회 법사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법사위의 이단아”, “별종 국회의원”, “양심을 따르는 소신파”….

민주당 5선 중진인 조순형 의원과 개혁성향 재선인 천정배 의원. 이들 두 사람에게는 요즘 이런 공통의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국회 법사위에서 보여준 소신 때문이다. 이들은 국민의 바람과 배치되는 법률안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동료의원들과 격렬한 논쟁도 피하지 않는다. 지난해 12월 율사 출신 다른 법사위원들이 정원제 유지 등 사법개혁 방향에 역행하는 내용의 ‘사법시험법안’에 찬성했다. 그러나 이들은 동료의원들의 이기주의를 질타하며, 정원제 철폐와 자격시험제로의 전환을 외쳤다. 인권법, 부패방지법 등 이른바 ‘개혁법안’에 대해서는 더 단호하다. 몸담고 있는 민주당이 당론으로 정한 법안 내용조차 국민의 기대에 못 미친다며 벌써 다섯달째 지도부를 상대로 끈질긴 개선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들 두 의원이 이번에는 ‘돈세탁방지법’을 놓고 동료 법사위원 및 여야 지도부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 싸움에는 어두운 정치현실이 그대로 녹아 있다.


허울뿐인 법안 내놓은 지도부에 맞서

사진/ “옳은 것을 실천해야 한다는 사명감 하나로 견디겠다.” 민주당 5선 중진인 조순형 의원.
이들의 싸움은 돈세탁방지법이 법사위에 넘어온 3월7일부터 시작됐다. 당시 국회 재경위 심사를 거쳤지만 여야의원 누구도 내용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의원은 허점을 비켜가지 않았다. 본회의 통과를 하루 앞둔 이날 “불법자금 세탁 방지를 위해 만든 법적용 대상에서 정치자금과 탈세자금이 빠졌다”면서 “수정”을 요구했다.

“나도 처음엔 그냥 통과시킬 뻔했다. 그런데 109개나 되는 법적용 대상에서 정치자금과 탈세자금이 쏙 빠진 것을 알았다.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었다.”(천정배 의원)

동료 법사위원들의 반응은 썰렁했다. 평소 투명한 정치자금 조달과 사용을 외쳤던 민주당 당지도부마저 이들을 ‘왕따’시켰다. 조순형 의원은 당시 험한 분위기를 전했다. “다른 모든 법사위원들이 ‘수정안을 내면 법안표결 자체를 거부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여야가 따로 없었다. 우리당 이상수 총무조차 나를 불러 ‘법안처리가 늦어지면 두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며 ‘수정안을 내지말라’고 말렸다.”

그러나 이들은 멈추지 않았다. 정치자금이 포함된 별도의 수정안을 만들어 동료의원들을 상대로 서명작업을 벌이는 등 행동에 나섰다. 법사위에서 저지에 실패할 경우 본회의에 수정안을 내려는 것이었다. 서명은 뜻밖에 성공을 거뒀다. 서명시작 2시간 만에 본회의 제출이 가능한 20명을 훌쩍 넘긴 35명이 서명에 동참했다. 시민단체의 여론도 들끓었다.

그러나 지도부는 여전히 소극적이었다. 논란이 계속 확산되자 3월10일 김중권 대표까지 만류하고 나섰다. “이날 오전 11시쯤 김 대표가 나와 천 의원을 불러놓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계속 물었다. 드러내고 ‘그만두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만뒀으면 하는 눈치였다.”(조순형 의원) 하지만 이들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쩌기는요. 정치자금을 포함시켜 본회의서 표결처리하면 됩니다.….”

민주당 지도부가 헤매는 사이 여론의 부담을 의식한 한나라당이 먼저 치고 나왔다. 민주당의 당론통일을 요구하며 법안 수정에 반대하던 한나라당은 이날 오후 이회창 총재의 지시로 “정치자금을 법에 포함하겠다”고 전격 선언했다. 허를 찔린 민주당 지도부도 “더 버티면 반개혁적이라는 비난을 뒤집어쓴다”며 허겁지겁 방향을 바꿨다. 여론을 등에 업은 조순형, 천정배 두 의원의 집요한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40여일이 지난 4월23일 여야 지도부는 뜻밖의 꼼수를 부렸다. 이날 오후 여야 3당의 원내총무와 법사위 간사, 재경위 간사 등 9명이 연석회를 열었다. 그리고 돈세탁방지법 내용 가운데 금융정보분석원(FIU)의 연결계좌 추적권을 없애고, 정치자금에 대해서는 검찰 통보 이전에 1차로 선관위에 통보하자는 데 합의했다. 이들은 “계좌추적 남발을 막기 위한 조처”라며 합의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합의내용이 정치적 담합이었음이 곧 드러났다. 이번에도 조 의원과 천 의원이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은 즉각 긴급성명을 내 합의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특히 “돈세탁을 추적하기 위해 설치한 금융정보분석원의 연결계좌 추적권을 없앤 것은 불법적인 정치자금 추적을 차단해 돈세탁방지법 자체를 무력화하려는 것”이라고 공격했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도 “교묘한 사기입법이며, 사실상 자금세탁방조법”이라고 거들었다.

결국 두 의원의 저항과 심상찮은 여론에 직면한 이상수 총무 등 민주당 지도부는 단 하루 만인 4월24일 꼬리를 내렸다. “너무 성급하게 야당의 요구를 받아들인 측면이 있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수정안을 내놓았다. ‘금융정보분석원이 검찰을 통해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발부받을 경우에 한해 관련 계좌 전체에 대한 추적을 허용’하고 ‘정치자금 선관위 통보조항’은 삭제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미 사태는 꼬일 대로 꼬인 뒤였다. 한나라당은 “합의내용 준수”를 요구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끝없이 꼼수 노리며 눈가림하는 여야

사진/ “누가 뭐래도 앞으로는 민심을 거스르면 침묵하지 않겠다.” 민주당 개혁성향 재선인 천정배 의원.
4월26일 오후 한때 절충되는 듯했다. 3당 총무가 “4월28일까지 법사위에서 합의안을 만들되, 안 될 경우 여야가 각자 수정안을 만들어 30일 본회의서 표결한다”고 합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 합의안도 1시간여 만에 파기됐다. 이번에는 한나라당 의원들이 반발했다. “여당의 수정안대로 금융정보분석원에 계좌추적권을 주면 야당의원에 대한 무차별적인 계좌추적이 이뤄지고, 야당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합의파기를 요구한 것이다. 결국 내부 반발에 밀린 정창화 한나라당 총무는 “재경위에서 법사위로 넘긴 돈세탁방지법에 정치자금을 포함시킨 것은 법사위의 월권행위”이라며 “다시 재경위서 논의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돈세탁방지법 논의를 3월10일 이전 상태로 되돌리자는 주장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여야 정치권에서는 이번 문제를 조 의원과 천 의원 탓으로 돌리려는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자기들만 너무 잘났다고 튀니까 여야 대립이 생겨난다. 같은 국회의원끼리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한나라당 수도권 한 재선의원), “애초 돈세탁방지법에 포함돼서는 안 될 정치자금을 두 의원이 억지로 끼어넣어 괜한 논란만 확산시켰다.”(민주당 한 핵심당직자)….

그러나 조순형 의원은 정치자금 추적을 피하려는 정치권의 교묘한 눈가림이라며, “물러서지 않겠다”고 맞서고 있다. “이 법에 정치자금이 포함되기 전까지는 여야의원 누구도 지금 같은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더욱이 현재 금융감독원, 선관위 등 많은 기관이 고유업무와 관련해 영장없이 계좌를 추적할 수 있게 돼 있다. 그런데 뒤늦게 왜 금융정보분석원의 계좌추적권 남발을 문제삼느냐. 여론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정치자금법을 법적용 대상에 포함시켰지만, 어떻게든 조사를 피할 길을 만들려는 얄팍한 술수에 불과하다.”

천정배 의원은 민주당이 내놓은 수정안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애초 법 제정의 목적은 금융정보분석원을 통해 검은돈에 관한 거래 정보를 수집·분석·평가함으로써 불법자금의 세탁을 막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당 수정안대로 영장없는 계좌추적을 금지한다면 그 기능은 사실상 무력화된다. 그렇다면 검찰 등 수사기관을 놔두고 국민의 혈세를 써가며 정보분석원 같은 또다른 기관을 만들 필요가 없다.”

두 의원은 특히 민주당 지도부의 무원칙한 태도에 분노했다. “여론의 지지가 확고한 만큼 그대로 밀고갔으면 한나라당도 굴복했을 텐데…. 왜 그런 합의를 했는지 모르겠다.” 이들은 차마 민주당이 한나라당과 정치적 야합을 했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다만 “법 처리를 너무 서두른 나머지 야당의 덫에 걸린 것 같다”고 에둘러 비판했다.

어쨌든 이들 두 사람은 재경위제출안에 정치자금을 포함하기로 한 지난 3월10일 합의내용을 그대로 관철시키겠다고 버티고 있다. 만일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애초 계획대로 본회의에서 별도 수정안을 내겠다는 태도다. 그러나 이들의 뚝심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의문이다. 먼저 두 사람이 민주당과 별도의 수정안을 낼 경우 현재 의석분포에서 자칫 한나라당쪽 수정안이 처리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현재 3당 연합을 했지만, 한나라당보다 겨우 4석이 많다. 그런데 여당의원 일부가 우리가 낸 안에 표결할 경우 한나라당안이 가결될 수도 있다. 참 답답하다.” 조순형 의원의 말이다.

당지도부의 회유와 압박, 동료의원들의 비난과 시기도 이들을 부담스럽게 하는 대목이다. 조순형 의원은 “솔직히 다수 의견을 계속 거스르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외로움도 많이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마음을 다잡는다. “헌법 46조2항에 ‘국회의원은 국가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고 명시돼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 원칙을 저버릴 수는 없지 않냐. 또 나를 5번이나 국회로 보내는 유권자의 바람을 생각하면 적당히 타협할 수 있겠냐. 그저 옳은 것을 실천해야 한다는 사명감 하나로 외로움과 동료의원들의 비난을 견디겠다.”

재대로 된 법안 만들 수만 있다면…

천정배 의원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자세를 보였다. “지난해까지는 민주당 내부에서 조용한 건의를 통해 개혁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론에 따라 교섭단체 구성요건을 10석으로 낮추는 법안을 강행하는 악역도 떠맡았다. 그러나 더이상 그런 방식으로는 안 된다. 지금은 민심이 심각하게 이반된 비상상황이다. 오히려 민심의 경고가 있기 전에 좀더 빨리 이런 행동에 나서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요즘도 반성이 앞선다. 누가 뭐래도 앞으로는 침묵하지 않겠다.”

이들의 뚝심과 외로운 투쟁이 과연 여야 지도부와 대다수 동료 국회의원의 반대를 넘어 재대로 된 돈세탁방지법을 만들 수 있을까. 관심을 갖고 지켜볼 일이다.

글/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사진/ 이용호 기자 y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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