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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일본 시민의 양심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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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4-2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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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의원 앞 단식농성 마치고 돌아온 김영진 의원… 일본 우경화 대비 아시아 차원 연대 추진

사진/ 서울 이대 목동병원에 입원해 있는 김영진 의원. 그는 단식농성 기간중 일본 시민단체에 살아 숨쉬는 양심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박승화 기자)
지난해 6월쯤 일이다. 16대 국회가 새로 구성된 지 얼마 안 된 때여서 해당 상임위별로 대표적인 의원을 선정해 의정활동의 포부를 들어보는 기획을 마련한 적이 있다. “농해수위는 김영진 의원이 어떨까. 88년 등원 이후 농해수위에서만 활동해 전문성을 높이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때 후배기자가 “글쎄, 좀 그런데요…” 하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기억이 있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더라”

4월11일부터 엿새 동안 일본 중의원 앞에서 역사 교과서 왜곡에 항의해 단식농성을 벌인 김 의원을 인터뷰하는 것을 놓고도 논란이 있었다. 김 의원이 92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당시 스위스 제네바에서 삭발농성한 일, 15대 국회에서 상임위장에 볏단을 들고 들어와 화제가 된 일, 지난해 국감장에 한우와 수입소를 가져와 농림부 장관에게 구별해보라고 한 일 등 속된 말로 ‘언론발’받을 만한 튀는 일을 하는 ‘상습범’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만나서 얘기를 듣기로 했다. 단식농성까지 하기에는 나름대로 고민도 있었을 것이고 현지 분위기도 들을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었다. 또 <한겨레21> 이전 호의 표지이야기가 일본 역사 교과서 문제였다는 점도 고려됐다.


4월20일 오후 서울 이대 목동병원에서 만난 김 의원은 수염이 덥수룩했지만 비교적 건강해 보였다. 김 의원은 당시 상황을 일지별로 풀어놓았다. 10일 이강두, 박재욱, 원철희 의원 등 한·일기독의원연맹 동료의원들과 함께 처음 출국할 때부터 단식농성을 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로 에토 일본 외무성 부대신을 만나 얘기를 하는데 ‘일본 국내법 절차에 따라 한 것으로 일본 정부는 민간이 자율적으로 한 것에 대해 개입할 수 없다’는 얘기만 되풀이하는데, 분통이 터져 참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저녁 때 숙소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하는데 이대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여기 와서 직접 몸으로 접했으니 처방도 내가 내리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김 의원은 “비폭력 평화적 방법으로, 성서의 방법대로 자신이 고난을 당하는 아픔 속에서 상대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 진솔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주위 만류로 단식 연장 못한 아쉬움

김 의원은 엿새 동안 단식농성하면서 일본통치권력이 역사왜곡을 자행하지만, 일본 국민·시민단체에는 살아 숨쉬는 양심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많은 재일동포와 일본 시민·교계단체 등에서 찾아와 격려해주고 함께 농성에 동참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첫날 농성사실이 일본 언론에 보도되자 도쿄대 학생 등 10여명이 와서 함께 대화도 했어요. 일본 교회와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모포하고 물 같은 것도 가지고 왔어요. 또 많은 일본 시민들이 꽃을 가지고 와 전달하며 ‘우리 일본을 용서해달라’고도 하더군요. 일본 각지에서 찾아온 학생들이 격려의 글을 보내와 농성장 뒤 벽에 붙여놓기도 했습니다.” 일본 정계에서도 도이 다카코 사민당 당수, 도이 류이치 중의원 외무위원장 등 50여명의 정치권 인사들이 찾아와 뜻을 함께하기도 했다고 한다. “도이 당수는 역사왜곡 문제를 당론으로 다루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김 의원은 농성의 성과로 일본 시민단체들의 활동을 활성화하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한 점을 꼽았다. 도쿄 등 4개 지역의 성공회 신부들이 16일부터 항의 단식농성에 들어갔고 일본 내 종교계와 시민단체가 중심이 돼 역사 교과서 왜곡 철회를 요구하는 연대기구가 발족됐다는 것이다. 다만 며칠 더 단식을 할 수 있었는데 주위의 간곡한 만류로 6일 만에 철회하게 된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그러나 단식농성이 끝났다고 할 일이 모두 끝났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일본의 우경화에 대비해 우리도 준비가 필요합니다. 의원외교 차원에서 가칭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과 역사 교과서 왜곡 저지를 위한 아시아의원연맹 모임’을 결성할 계획입니다. 아시아 각국 의원들에게 제안서를 발송해 기구를 만든 뒤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면 아시아 연대차원에서 이런 문제에 대처하자는 것입니다.” 또박또박 말소리에 힘이 들어 있었다.

박병수 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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