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닷새간 이어진 설 연휴 첫날(2월6일), 한 텔레비전 광고가 눈을 확 끌었다.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정정한 모습으로 되살아나 강연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귀에 들어오는 한 구절. “당신이 배를 사주면 그걸 담보로 영국 정부의 차관을 받아서….” 생전의 그가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와 울산 미포만 사진만 가지고 영국의 바클레이스은행에서 차관을 따냈던 그 ‘전설적인’ 협상 당시를 회고하는 장면이었다. 광고는 ‘대한민국 경제의 희망’이라고 현대중공업을 알리는 것으로 끝났다. 다른 채널로 틀 때마다 이 광고는 불쑥불쑥 나왔다. 현대그룹이 지난 5년5개월 동안 치워뒀던 계동 사옥의 ‘현대(現代)’ 머릿돌까지 최근에 다시 세운 사실도 기억났다.
“얼마나 썼기에…” 싶어 광고업계에 수소문해본 결과 현대중공업이 공중파에 배정한 2월 한 달 광고비가 20억원대이고, 설 연휴에만 10억원대를 집중 배치했다는 답이 나왔다. 제품 광고(현대중공업의 제품은 잘 알려진 대로 초대형 선박이다)가 아닌 기업 광고로는 이례적인 규모라고 했다. 광고 많기로 유명한 SK텔레콤의 한 달 공중파 광고비가 30억원임을 감안해보라.
정치권에서도 이 광고는 많은 이들의 입에 올랐다. 통합민주당의 한 당직자가 “정주영 명예회장이 정계 진출을 선언하던 1992년 신정(1월1일)에도 현대 광고가 모든 매체를 뒤덮은 적이 있다”고 말해줬다. 신문사 자료실에서 <한겨레>의 92년 신년호를 찾아봤다. 다른 신문들이 신년호 80면을 발행하던 당시 32면으로 나온 ‘궁핍한’ <한겨레> 지면에 실린 전면 광고는 모두 3개였다. 그 광고주가 모두 현대가였다. 맨 마지막 면(이른바 ‘백면’)은 현대그룹 광고가 차지했고, 중간 전면 광고는 현대자동차와 한라그룹 것이었다. 한라그룹도 범현대가로 분류되는 곳이다. 신년호 다음에 발행된 1월4일치 <한겨레>의 1면 사이드 톱기사 제목은 “정주영씨 곧 신당 창당”이었다. 집중적인 ‘기업 광고 폭탄’ 이후에 이뤄진 정치적 결단이었다.
현대중공업 광고에 나온 장면은 고희(70살)이던 1985년 중앙대에서 대학생들에게 강연을 하던 고 정주영 회장의 모습이었다. 다시 본 광고에선 그 얼굴에 아들 정몽준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겹치고, 이명박 당선인이 겹쳤다. 박근혜 전 대표와 차세대 경쟁을 벌이고 있는 정몽준 최고위원 쪽은 이런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이런 정치적 해석이 부담스러운 현대중공업 홍보실에서는 “지난해 말부터 경제를 되살리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업광고를 하고 있었다”며 “신문지면에서 하던 광고를 공중파까지 확장한 것일 뿐 정치적인 의도는 없다”고 말했다. 92년 대선에서 고 정 회장의 통일국민당은 참패했다. 돈으로 광고는 살 수 있어도, 국민의 마음은 살 수 없다.
<한겨레> 1992년 1월1일 신년호 마지막 면을 채운 현대 광고(왼쪽). 그 옆의 신문(4일치) 중간에 ‘정주영씨 곧 신당 창당’이란 제목의 기사가 보인다.
이런 정치적 해석이 부담스러운 현대중공업 홍보실에서는 “지난해 말부터 경제를 되살리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업광고를 하고 있었다”며 “신문지면에서 하던 광고를 공중파까지 확장한 것일 뿐 정치적인 의도는 없다”고 말했다. 92년 대선에서 고 정 회장의 통일국민당은 참패했다. 돈으로 광고는 살 수 있어도, 국민의 마음은 살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