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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대선주자들의 원심력을 제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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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4-0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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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로부터 ‘관리책임’맡고 3개월만에 정계 전면복귀한 권노갑의 선택은…

사진/지난 3월28일 사무실 개소식날 당직자들과 인사를 나누는 권노갑 전 최고위원. 때맞춘 개각에 동교동계가 전진배치되면서 그들의 행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 3월28일 오전 서울 마포구 공덕동 일신빌딩 8층의 한 사무실. 50여평 남짓한 공간에 김옥두·조재환 의원 등 동교동계 인사들을 비롯해 민주당 당직자 등 200여명이 모여들어 발디딜 틈이 없었다. “이 당은 나의 40여년 인생역정을 고스란히 간직한 내 인생의 전부다. 오직 평당원으로서 마지막 인생을 걸고 대통령이 역사적으로 성공한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소속의원과 당직자들 모두의 단합·화해에 미력을 보태겠다.” 권노갑 민주당 전 최고위원이 조금은 상기된 표정으로 준비한 인사말을 읽어내려갔다.

“관리자 없어 DJ가 답답해 한다”


이틀 뒤 30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의 민주당 초선의원 방. 이른바 개혁파에 속하는 초·재선 의원 몇몇이 모여앉았다. 최근 정국의 흐름에 대해 서로 의견이나 나누자고 이심전심으로 연락해 마련된 자리였다. 자연스럽게 화제는 며칠 전 이뤄진 당·정 인사와 권 전 최고위원의 사무실 개소소식에 맞춰졌다. “지난해 말 민심수습 차원에서 물러났던 권 전 최고위원이 이렇게 쉽게 복귀하는 것은 민심을 외면한 것 아니냐”, “권 전 최고위원이 정동영 최고위원의 공개사과를 요구했는데, 이것은 자신의 뜻에 대항하는 당내 세력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경고메시지 같다”는 등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논란의 한가운데서 권 전 최고위원은 정치전면에 복귀했다. 지난해 12월 정동영 최고위원의 ‘권노갑 2선 후퇴’ 주장에 떠밀려 최고위원직을 사퇴한 지 3개월여 만이다. 정치권에서는 권 전 최고위원의 정치재개 선언을, 3월26일 당정인사에서 나타난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의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임명, 한광옥 청와대 비서실장과 남궁진 정무수석의 유임, 안동선 의원의 당 최고위원 임명 등 동교동계의 전진배치와 같은 맥락에서 보고 있다. 때맞춰 권 전 최고위원을 비롯해 김옥두, 이협, 박광태, 이윤수, 정동채, 김홍일, 설훈, 윤철상, 전갑길, 배기선 의원 등 동교동계 의원 13명이 3월27일 서울 서교동의 한 음식점에서 만찬회동을 갖고 결속을 다진 것으로 알려지면서, 향후 동교동계의 행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권 전 최고위원의 정치재개로 대표되는 동교동계 전진배치의 배경은 무엇일까. 권 전 최고위원의 행보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의중이 얼마나 실린 것일까. 여권 내에서는 대체로 권 전 최고위원의 정치재개가 김 대통령의 뜻을 반영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실제 권 전 최고위원이 개인 사무실을 마련하려 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초에도 개인사무실을 내려 했으나 김 대통령이 “공연히 잡음이 날 우려가 있다”고 제동을 걸어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최근 대선 예비주자들의 조기 과열경쟁 양상을 어떤 방식으로든 조정하고 관리할 필요성이 대두된 점이 권 전 최고위원의 전면복귀를 부채질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동교동계의 한 관계자는 “동교동계가 당무에서 전면 물러선 뒤 3개월여 동안 김 대통령이 당내 의사전달 통로와 관련해 상당히 답답해 한 것으로 안다. 특히 김 대통령은 본인의 뜻과 달리 대선 주자들의 조기 과열경쟁 양상이 빚어진 데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다. 누군가가 이를 조정하고 관리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다른 관계자는 “여당의 속성상 누군가가 대통령을 대신해 센터 역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민주당에는 그럴 만한 사람이 없다. 그게 가능할 법한 사람이 김중권 대표와 한화갑 최고위원이지만, 두 사람 모두 차기 주자로서 후보경쟁의 한복판에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어 사실상 어렵다. 따라서 당내 제어시스템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이런 역할을 할 만한 사람으로는 동교동계 좌장으로서의 무게를 갖춘 권 전 최고위원밖에 없다는 것이다.

3당연정, 확고한 대선주자 없애기

사진/당내 비토세력이 엄존하는 것은 권노갑 전 최고위원의 딜레마다. 한 모임에서 정동영 최고위원과 악수하는 권 전 최고위원.(이용호 기자)
그렇다면 김 대통령이 이 시점에서 대선 주자 관리에 나선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선 김 대통령의 인식은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는 정권의 성공이 먼저’라는 쪽이다. 동교동계의 한 의원은 “과거 여당의 경우 ‘여당 후보=대통령 당선’이라는 등식이 있었다. 따라서 이전에는 대통령으로서는 레임덕 방지에만 신경쓰면 됐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여당 후보가 되더라도 대선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따라서 여당의 정권 재창출 차원에서 경제회생과 민생안정 등 정권의 성공이 필수적인 요인이 됐다. 이를 위해서는 예비주자들이 대선을 겨냥한 행보보다는 정권의 성공을 위해 더 신경을 써야 할 때라는 게 대통령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김 대통령이 이런 생각을 최고위원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전했으나 효과가 없었기 때문에 통제를 강화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김 대통령은 3월17일 최고위원들과의 청와대 오찬에서 “국민과 대화하고 지역발전을 협의하고 민심을 청취하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지만 대권만 갖고 이야기하는 듯한 인상을 주지 않도록 노력하자”고 에둘러 경고했으나, 이인제·김근태 최고위원이 4월3일 나란히 대규모 후원회와 한반도재단 출범식을 추진하기로 하는 등 차기 주자들의 대선 행보는 별로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향후 정계개편 등 정국변화 가능성을 염두에 둔 포석이라는 것이다. 여권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3월26일 개각으로 분명해진 DJP 공조를 축으로 민국당을 끌어들인 3당 연정은 향후 원활한 정국운영을 위한 안정적 원내의석 확보라는 측면뿐 아니라 대선 국면에서도 유효한 틀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3당 연정구도가 국정운영에서 효율적으로 작동할 경우 이 구도가 차기 대선구도로도 연결될 수 있고, 이 경우 민주당 입장에서는 차기 대선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에 대한 포위전략를 성사시킬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구도의 성사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차기 대선후보를 민주당의 후보 차원이 아닌 범여권의 후보 차원에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예컨대 JP와의 대선 공조를 위해서는 차기 주자와 관련해 JP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민주당 후보가 이미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대세로 굳어져 있는 상황이고 그 후보에 대해 JP나 민국당쪽이 거부감을 갖고 있다면 이들과의 선거공조 가능성을 낙관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향후 합당 등 정계개편을 포함한 정국변화 가능성에 대비해 여러 주자들이 여전히 모두 차기 대선에 나설 잠재력을 갖춘 상태로 남겨놓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차기 주자와 관련해 이 관계자의 표현을 빌리면 ‘이인제 대세론의 속도조절’ 또는 ‘차기 주자들의 경쟁적 균형상태 유지’가 절실한 시점이라는 것이다. 실제 이인제 최고위원의 후원자로 자임해왔던 권 전 최고위원도 28일 기자간담회에서 ‘이 최고위원을 여전히 지지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나중에 이야기하자. 상식적으로 판단해야지,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내가 말할 수 있겠나. 원래 후원회에서는 격려하고 장점만 이야기하는 것”이라며 한발 물러서는 발언을 해 눈길을 끌었다. 이 발언은 지난해 3월 이 최고위원 후원회에 참석해 “이인제 위원장은 21세기를 이끌 비범한 인물”이라며 “그가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하도록 우리 모두 돕자”고 추켜세웠던 태도에서 상당히 후퇴한 것이었다.

당장 급한 불 끄는 소방수?

사진/지난 3월17일 민주당 최고위원들과 만난 김대중 대통령. 최근 대선 예비주자들의 조기 과열경쟁 양상을 어떤 방식으로든 조정하고 관리할 필요성과 권 전 최고위원의 전면복귀를 연결지어 보는 시각이 많다.
그렇지만 여권 핵심부의 이런 의도가 권 전 최고위원을 통해 얼마나 관철될지는 의문이다. 우선 권 전 최고위원에 대한 비토세력이 엄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권 전 최고위원의 활동폭이 제약을 받을 수 있다. 민주당의 한 초선의원은 권 전 최고위원이 지난해 12월 최고위원직에서 도중하차한 까닭을 △초·재선들의 당정쇄신 요구 등 당의 흐름을 너무 힘으로 억누르려 했다는 점과 △이인제 최고위원에 대한 편향 때문에 거중조정자로서의 입지를 스스로 좁혔다는 점 등 두 가지를 들었다.

문제는 권 전 최고위원의 이런 태도에 대한 당내 불만이 여전하다는 점이다. 특히 권 전 최고위원은 3월28일 마포 사무실을 열면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권노갑 2선 후퇴’를 주장해 권 전 최고위원의 사퇴에 결정적 역할을 한 정동영 최고위원에 대해 공개사과를 요구해 당내 개혁세력으로부터 반발을 사고 있다. 수도권의 한 초선의원은 “당시 각종 비리의혹 등으로 들끊는 민심수습을 위해서는 권 전 최고위원의 2선 후퇴가 불가피했다. 아무도 하지 못한 얘기를 정 최고위원이 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정 최고위원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항복하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지나치게 강압적이고 독선적인 태도”라고 비난했다. 힘으로 억누르려는 태도를 못버렸다는 것이다.

또 이인제 최고위원에 대한 편향도 아직 불식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차기 행보를 준비하고 있는 한 예비주자쪽 관계자는 “이 최고위원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는지 여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권 전 최고위원이 사실상 어느 한 후보를 지지하고 있다면 거중조정자로서 신뢰하기 어려운 것 아니냐”며 의구심을 거두지 않았다.

이런 사정 때문에 권 전 최고위원의 역할이 우선 당장 급한 불을 끄자는 소방수에 그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김 대통령이 차기 예비주자들의 경쟁이 조기과열되는 양상을 우려해 우선 권 전 최고위원이 나서는 것을 용인했지만, 이것은 일종의 비상처방이라는 것이다. 동교동계의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대통령이 대선 주자들간 경쟁을 조율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권 전 최고위원에 계속 맡길지 여부는 아직 불투명하다고 봐야 한다. 권 전 최고위원이 지난해 말 당쇄신론에 휘말려 물러나는 등 당을 조율하기에는 약점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또 앞으로 한화갑 최고위원이 대선 주자로서의 꿈을 접고 대통령의 충실한 대리인인 킹메이커로 자기위상을 자리매김할 경우 둘 사이에 불가피하게 역할조정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어떻든 대선 국면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차기 대선 주자들의 원심력이 커질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이들 원심력을 제어하고 조정하려는 여권 핵심부의 노력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주목된다.

박병수 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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