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차 장관급 회담 무산 등 북한의 이상기류…말이 앞섰던 대북정책에 전반적인 조정 필요
한반도에 철 지난 춘설마냥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다. 지난해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순풍에 돛단 듯이 진행돼왔던 남북간 대화에 급격히 제동이 걸리며 남북회담이 잇따라 연기되거나 무산되고 있다. 북한은 3월13∼15일 열릴 예정이던 5차 장관급회담을 무산시켰다. 또 3월28일에는 김한길 문광부 장관의 방북길에 합의했던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일팀 구성에 갑자기 참여할 수 없다고 통보해왔다. 4월3∼5일 열릴 예정이던 남북적십자회담도 끝내 회담 장소를 통보해오지 않아 자동 무산됐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우선 지금은 숨 고르기를 위한 조정국면이라고 볼 수 있다. 성급한 기대감은 금물이다. 한반도의 냉전구조 해체는 55년 분단의 세월만큼이나 중층적이고, 복잡하다. 남북정상회담은 장거리 경주에서 겨우 출발을 의미한다. 현실을 직시하고 실사구시의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북한은 왜 ‘멈칫’하는가
구조적인 측면에서 따져보자. 무엇보다 북한으로서는 새로운 국제환경의 대응전략을 모색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의 대북정책은 북한의 ‘우려’대로 현실화되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불량국가’로 보고 있으며, 대화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미정상회담은 미국의 ‘부정적’ 생각과 남한의 외교적 한계를 동시에 확인시켜주었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 페리 프로세스로 통칭되는 남북한과 미국의 삼각 협력관계는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북한으로서는 외교전략의 수정이 필요할 것이다. 이를 위해 정책을 재검토할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둘째는 남쪽으로부터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북한은 지난해부터 전력지원에 모든 대화의 초점을 맞춰왔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에서 남한은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기 어렵다. 경제사정도 안 좋고, 대규모 공적 차관을 제공할 만큼 재정상태도 여유롭지 않다. 더욱 중요한 것은 부시 행정부가 94년 제네바합의의 재검토를 주장하면서 남한의 전력지원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은 한미정상회담을 지켜보면서 남쪽 정부가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력지원을 해줄 것이라는 기대는 버렸을 것이다.
금강산관광도 마찬가지다. 현대가 관광대가를 제대로 보낼 수 없는 상황에서 북한은 정부의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북한이 관광대가를 지불유예 내지는 축소하지 않으면 어떤 지원책도 효과를 보기 어렵다며 난색을 표명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은 남쪽과의 대화를 통해 얻어낼 게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를테면 성과없는 회담에 스스로 불참한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지난해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이산가족상봉을 비롯한 각종 남북대화에 성실히 응해왔지만 도대체 남쪽 정부가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뭐냐는 불만도 품을 만한 것이다.
그러면 북한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남쪽과의 대화의 문을 완전히 닫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이 부시 행정부의 대북강경정책을 확인한 지난 2월 중순 이후 미국에 대해 격렬한 어조로 비난을 퍼부었지만 남쪽에 대해서는 비난을 자제해왔다는 점에서도 북쪽의 이런 기류를 읽을 수 있다. 북한이 3월31일 처음으로 <노동신문> 논평을 통해 김동신 국방장관의 취임사가 ‘외세의 반민족 반통일책’에 동조한다고 비난해왔지만, 이 논평 어디에도 남북관계를 어렵게 몰고가겠다는 내용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침체된 현 남북관계의 책임이 “강경 운운하며 대결과 긴장격화의 바람을 몰아오고 있는”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에 있음을 곳곳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북한의 이런 태도는 북한이 국제사회와의 접촉을 통해 최악의 부족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내부적 한계와 무관하지 않다. 최근 몇년 동안 식량난이 완화된 것은 북한의 농업생산성이 올라갔기 때문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지원이 그만큼 많아졌기 때문이다. 대화의 문을 닫는 것은 다시금 ‘고난의 행군’ 시작을 의미한다. 그러한 상황을 되풀이할 만한 자신도, 의지도 없을 것이다.
북한의 선택은 단절이 아니다
북한의 고민은 미국과의 관계가 당분간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부시 정권의 외교정책은 불안하다. 중국을 ‘전략적 동반자’에서 ‘잠재적 경쟁국’으로 재규정하면서 갈등을 빚고 있고, EU, 중국, 러시아가 강력 반발하고 있는 미사일방어망계획을 밀고나가고 있다. 미국의 외교정책은 공화당의 보수적 성향과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고립주의, 그리고 군수산업의 이해가 결합되어 나타나고 있다. 당연히 클린턴 행정부 시절 지속해 왔던 북미간의 대화는 교착될 수밖에 없다. 테러지원국 해제도, 미사일 협상도 부시 행정부의 외교 전략상 진전되기 어렵다.
북한이 최근 EU와의 외교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북한은 지속적으로 국제사회의 정치성 원조를 필요로 하는데, 미국이 당분간 그것을 들어줄 수 없다면, 대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남북관계를 장기간 교착시킬 수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최근 당국자간 관계에는 소극적이지만, 민간교류는 전과 다름없이 지속하고 있다. 남북간 당국자 관계에서도 북한이 기대수준을 낮춰 현실화시킬 수밖에 없다. 전력지원이나, 금강산관광 등과 같이 해법이 복잡한 문제는 남쪽이 당분간 들어줄 수 없지만, 식량이나 비료 지원은 가능하다. 대화의 속도를 늦출 수는 있어도 대화자체를 거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남쪽 정부가 북쪽에 해줄 수 있는 지원의 한계를 깨닫고 이를 현실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한반도 대화환경의 조정국면에서 정부의 대북정책 역시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대북포용정책의 적실성은 일부 시대착오적인 수구세력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인정한다. 문제는 방법론이다. 사실 정상회담 이후의 대북정책에 거품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추진능력을 꼼꼼히 검토하지 않은 채 말이 앞선 경우가 많다. 북한에 인프라 지원을 해주겠다는 베를린선언은 정상회담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는 효과가 있었지만, 지금 와서는 대북협상을 진행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또 단지 일방적 희망사항을 현실화시켜 정책추진의 전제로 삼는 경우도 많았다. ‘북한 특수론’과 ‘북한 개혁개방론’이 대표적이다.
대북정책의 국내적 지지기반 확대를
그래서 현실 분석을 토대로 한, 실사구시의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첫째, 북한 변화에 대한 현실주의적 접근이 필요하다. 남북경협을 예로 들어보자. 핵심 변수는 북한의 경제개혁이다. 그렇지만 북한의 정치사상체계를 고려할 때, 당분간 외국인 투자가 활성화될 정도의 경제정책 변화는 어렵다. 개혁개방에는 명암이 있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의 밝은 면도 있지만, 사회적 부패와 다원화, 그리고 의식의 변화 등 북한의 입장에서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 내부적으로 경협은 경제논리에 따라 해야 한다는 인식정립도 중요하지만, 북한에게도 지속가능한 경제협력이 가능할 수 있는 인식의 전환(개혁개방)을 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상생의 관계는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상생을 위한 상호 조정이 필요하다.
둘째, 대북정책의 국내적 지지기반을 확대해야 한다. 남북대화를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원하는 지원을 어느 정도는 들어주어야 한다. 국내 경제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대북지원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 실현될지도 모르는 미래의 비전으로 현재를 정당화해서는 안된다. 국민들은 미래의 비전보다 현재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예를 들어 경의선 연결공사도 중요하지만, 해운협정을 비롯한 현재의 물류체계를 정비하는 것도 중요하다.
명분보다는 실리가 중요하고, 분위기 조성보다는 관계의 제도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 자체보다는 그것을 통해 무엇을 합의할 수 있을지를 우선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큰 것을 생각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사구시의 자세로 접근하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부시 행정부의 출범이라는 위기가 남북한 모두에게 현실적인 접근을 할 수 있는 기회로 삼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김연철/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사진/북한은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일팀 구성에 참여할 수 없다고 갑자기 통보해왔다. 1991년 여자 단체전 우승을 차지해 한민족의 저력을 과시한 남북한 여자 탁구 단일팀.

사진/북한의 고민은 불투명한 미국과의 관계다.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마친 한·미 정상들.(진천규 기자)

사진/제5차 남북장관급회담이 무산됨에 따라 회담장의 간판이 철거되고 있다.(곽윤섭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