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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제3세력 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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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4-0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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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과 시민단체 결합한 개혁진영의 결집, 내년 대선 판짜기 과정서 영향력 행사할 수도

사진/개혁모임의 여야 의원들. 몇몇은 ‘신당’의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이용호 기자)
개혁성향의 여야 의원들과 시민단체가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정치세력 형성론이 최근 정치권에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구도는 간명하다. 노무현 상임고문, 김근태 최고위원 등 민주당 개혁성향 의원들과 이부영·김덕룡 부총재 등 한나라당 비주류 중진, 그리고 여야 소장파의원들의 정책연대체인 ‘정치개혁을 위한 의원 모임’(개혁모임) 등 정치권 내부 세력과 정치개혁에 동조하는 시민·사회단체 등 외부세력이 하나의 독자세력으로 뭉치자는 것이다.

김근태 의원의 행보

이 논의는 크게 3개의 중심축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먼저 장영달 의원(민주당)이 한축을 형성하고 있다. 장 의원은 지난 3월17일 그동안 물밑에서 진행되던 이 문제를 지역구민과의 토론형식을 빌려 처음 공론화했다. “여야 정치인과 재야 전문가그룹 가운데 민주화운동에 헌신해온 당사자, 개혁적 철학을 기조로 활동해온 인사 및 전문가 대표들이 모여 ‘민주개혁 연대회의’(가칭)를 만들자.” 철학없이 이합집산하는 현실정치의 모순을 극복하고 정치철학과 이념에 따라 헤쳐모이자고 공개제안을 한 것이다. 장 의원은 “각자 자기 당이나 현재 입장에서 향후 민주개혁, 남북문제 등을 주기적으로 논의할 수 있을 것이고, 추후 내년도 대선문제까지 협의하여 민주개혁, 남북화해 협력정책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정권 창출에 앞장서야 할 것”이라고 밝혀 개혁세력 중심의 신당 형성 가능성까지 열어놓았다.


장 의원은 16대 국회 구성 직후 자신이 회장을 맡은 동북아포럼에 한화갑·김근태 민주당 최고위원, 이부영·김덕룡 한나라당 부총재 등 이른바 개혁성이 있는 여야 중진들을 초청해 이런 뜻을 직·간접적으로 설파했다. 그러나 당시 중진의 반응은 냉담했다. 때문에 장 의원은 한동안 주장을 접었다. 그런 그가 3월17일 이 문제를 전격 공론화하고 나서자 그 배경에 눈길이 쏠리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최근 “흩어진 민주화세력들이 다시 뭉쳐야 한다”는 ‘신민주연합론’을 내걸고 본격적인 대선행보에 나선 김근태 최고위원과 사전 교감을 거친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민주당 내 개혁세력의 대부격인 김 최고위원이 대선고지에 오르기 위해 여야는 물론 정치권 안팎을 아우른 개혁세력 연대라는 큰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김 최고위원은 최근 이회창 총재와 잔뜩 각을 세우고 있는 이부영·김덕룡 부총재 등 한나라당 비주류 중진들과도 잇단 만남을 가졌다. 김 최고위원은 그러나 이런 분석을 부인했다. “장 의원은 민주화운동을 할 때의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개혁세력을 다시 모으려 하고 있다. 한나라당 비주류 중진들과의 만남도 그쪽에서 먼저 요청했고, 현재와 같은 여야대립과 이합집산의 정치를 개선할 방안을 찾는 공동의 마당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일 뿐이다.” 순수하며, 아직 초보단계라는 것이다.

다른 한축은 한나라당 비주류 중진들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이들은 장 의원의 공론화발언 이후 기다렸다는 듯 한마디씩 내뱉었다. “개헌을 위해 여당 인사들과 만나겠다”(김덕룡 부총재), “여야간 무한 정쟁의 사슬을 끊기 위해 여야 중진들이 모일 필요가 있다”(손학규 의원)…. 내용은 조금씩 달라도 여야를 떠나 뜻을 같이하는 중진들이 모여보자는 데는 일치한 것이다. 말뿐이 아니다. 이런 최근 만남을 구체화했다.

“모든 가능성은 열려있다”

사진/김덕룡, 이부영(왼쪽부터) 의원 등 한나라당 비주류의 개혁세력 결집은 한나라당에게 상처를 줄 공산이 크다.(이용호 기자)
이 만남의 중심에는 이부영 부총재가 있다. 이 부총재는 올해 1월 초 이미 김상현 민국당 최고위원과 만나 “여야를 뛰어넘어 우리 사회 전체의 이익을 찾는 장을 마련하자”는 데 의기투합한 뒤 물밑에서 계속 외연을 넓혀왔다. 지난 2월 초순에는 진보성향의 시민·사회·노동단체 대표들이 망라된 ‘100인위원회’를 대상으로 잔뜩 공을 들였다. 특히 박원순 참여연대 사무처장, 최열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 지은희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공동대표 등을 집중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총재는 이런 만남을 부인하지 않았다. “DJ 정부의 개혁을 지지했던 시민단체는 그 정책이 파산하자 무기력에 빠졌다. 노조조차 집단이기주의에 빠져 있다. 여야는 정쟁을, 거물 정치인은 자신의 집권만을 이야기한다. 내가 만난 많은 양식있는 인사들은 우리 사회에서 누가 이야기하는 게 옳은지 판단할 기준조차 없는 위기가 빠졌다고 아우성쳤다. 그리고 여야를 넘고, 자기 집단의 범위를 넘어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얘기할 마당을 만들자는 필요성에 공감했다.” 이 부총재는 최근 정대철 민주당 최고위원, 김덕룡 한나라당 부총재, 김근태 최고위원까지 만남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유인태·박계동·이철 전 의원 등 과거 ‘꼬마민주당’ 멤버들도 가세했다. 이들 가운데 몇몇은 “개혁성향 여야 중진과 개혁모임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 인사 30여명과 시민단체쪽 70명 등 100명 규모의 전국적인 정치조직을 만들자”는 내부논의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정작 이 부총재는 몸을 상당히 낯추고 있다. “내가 앞서는 게 아니다. 개혁세력 중심의 신당을 만든다는 이야기도 신용만 잃는 소리다. 정치인 중심이 아니라 바깥에서 객관적인 입장을 가진 분들이 나서고 우린 도울 뿐이다.” 이 부총재 자신이 전면에 나서는 것처럼 비쳐질 경우 개인의 대선 행보를 위한 모임처럼 윤색될 수 있고, 신당 결성으로 너무 과대포장되면 각당 지도부의 간섭만 불러와 일을 망친다는 판단인 것이다.

개혁모임의 몇몇 소장파 의원들도 부산히 움직이고 있다. 또다른 한축인 셈이다. 특히 서상섭, 김원웅, 안영근 의원 등 이 부총재와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이 좀더 적극적이다. 이들 가운데는 최근 논의가 개혁세력 중심의 신당 등 새로운 정치세력 형성의 주춧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밝히는 경우도 있다. “초창기 모임은 정치개혁연대회의(가칭)라는 느슨한 포럼형태로 출발하겠지만, 한나라당 지도부가 개혁모임 회원들에 대한 탄압을 계속한다면 모종의 결단을 불사할 수 있다. 우리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은 상태다.”(한나라당 한 소장파 의원) 이 총재가 지금처럼 보수성향의 노선을 강요하는 등 불가피한 상황이 계속되면 신당까지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이런 강경론은 국가보안법개정안 등 각종 현안을 놓고 이 총재를 비롯한 당내 보수세력과 사사건건 충돌해온 몇몇 개혁성향 의원들이 17대 총선에서는 이 총재와 딴 살림을 차릴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3개의 큰축으로 논의되고 있는 개혁진영의 결집 움직임은 논의 주체와 최종 목표의 차이가 어떻든 상당한 정치적 의미를 갖고 있다. 먼저 지역주의와 3김씨로 대표되는 1인 보스 중심의 줄서기 정치문화에 맞서 정치철학과 이념에 따른 이합집산으로의 길이 열리고 있다는 점이다. 개혁성을 강조해온 여야 중진들의 발빠른 만남도 의미가 적지 않다. 개혁성향 중진들까지 나서면서 지난 2월14일 출범 뒤 국가보안법개정안 관철 등을 위해 힘겨운 싸움중인 개혁모임 소장파 의원들의 운신 폭이 훨씬 넓어진 때문이다. 더욱이 몇몇 인사들의 바람처럼 느슨한 형태나마 포럼을 결성해 활동에 들어갈 경우 내년 대선 판짜기 과정에서도 개혁세력들이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할 여지가 생겨난다. 개혁모임 한 관계자는 아예 개혁모임과 포럼의 역할 분담론까지 주장했다. “개혁모임은 국회 안에서 여야간 정책연대를 통한 협조를 구축하지만 개혁세력의 결집이나 정계개편을 위한 실험은 시도할 수 없다. 그러나 개혁성향 여야 중진과 시민단체를 아우른 포럼에서는 정계개편 등 민감한 정치현안에 대한 애드벌룬을 띄우면서 개혁세력간에 힘을 합칠 수 있는 가능성을 시험할 수 있다.” 아직 신당 등 별도의 정치세력을 형성할 정도의 분위기는 아니지만, 기회를 엿보며 준비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해도 다르고 목표도 다르고…

그러나 이런 바람이 현실화하는 데는 아직 걸림돌이 많다. 일단 개혁성향 중진들의 정치적 이해와 이 모임의 목표점을 바라보는 시각이 제각각이다. 최근 여야 중진들은 잇단 접촉을 통해 “여야를 떠난 공론 마당을 만든다”는 선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이부영 부총재나 김근태 최고위원은 “남북화해를 뒤돌리는 시도를 막고, 지역주의에 의한 줄서기를 없애는 방안을 찾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데 비해 김덕룡 부총재는 자신이 줄기차게 주장해온 개헌론에 불을 붙이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모임은 각자가 현 단계에서 개헌논의를 잘 이끌고 그 역할을 확대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김덕룡 부총재의 한 측근) 공론 마당을 만들자는 데는 동의했지만, 그 마당의 쓰임새는 서로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현재 논의에 참여중인 여야 중진들 가운데는 개혁모임이 주력하고 있는 국가보안법개정안에 대한 협조에 미온적이거나, 각종 개혁법안 처리 때 개혁성에 걸맞지 않은 태도를 보인 인사들도 섞여 있다.

개혁모임 내부의 생각 차이도 문제다. 최근 움직임이 현실적인 힘을 갖는 정치세력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개혁모임 소장파 의원들이 개별적인 차원에서라도 적극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개혁모임 내부는 서상섭·안영근·김원웅 의원처럼 시기의 차이가 있기는 해도 신당을 포함한 개혁성향 인사들 중심의 독자세력 형성에 공감하는 쪽과 이를 반대하는 쪽으로 갈려 있다. 특히 민주당 소속 개혁모임 의원들은 대다수는 아예 “정치세력을 형성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무슨 힘을 받을 수 있겠느냐”며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현실적으로 DJ의 통제와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고, 대선행보가 걸려 있어 말만큼 쉽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민주당쪽 몇몇은 “개혁세력이 결집하면 결국 한나라당이 더 큰 상처를 입기 때문에 민주당 지도부가 소장파의 독자세력 형성을 용인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어쨌든 앞으로 지향점을 놓고 논란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전후 사정 때문에 이 총재의 측근들이나 민주당 몇몇 보수성향 중진들은 개혁성향 인사들의 최근 움직임을 “자기 기반이 불명확한 비주류 중진과 원외 정치인, 또 정치권에 발을 들이려는 시민단체 인사들이 비빌 언덕이나 만들자는 차원에서 한번 모여보는 것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한다. 이들의 움직임이 정치철학과 이념을 함께하는 제3세력의 형성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튼실한 밀알이 될지, 아니면 대선을 앞두고 말만 무성한 채 꽃을 피우지 못하는 불량 씨앗이 될지는 좀더 지켜볼 일이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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