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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늘 잠만 자는 사법개혁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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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0-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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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의 사법제도개혁안도 이전 정부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변협과 검찰의 반발 뿐 아니라 법조인 출신 의원들의 이해관계 때문

▣ 최은주 기자 flowerpig@hani.co.kr

‘저는 한 아이를 강간하고 세 사람을 죽인 주범으로 지명수배됐습니다. (중략) 원주교도소에 있는 공범 선배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용서하겠다고. 당신이 한 일을 내가 한 일처럼 말하고 당신은 변호사를 사서 나를 주범으로 몰았던 것도, 검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제게 강간·살인의 누명을 씌운 경찰도, 세 번의 재판이 진행되던 8개월 동안 나를 두 번만 찾아왔던 국선변호사도, 나를 언제나 벌레처럼 한 번도 인간으로 대해주지 않았던 검찰도, 실은 내 살인 행각에 분노하고 있었으면서 자신이 신처럼 객관적인 듯 냉정한 척하던 판사도 모두 용서하겠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저는 주님 앞에서 제 자신을 용서했습니다.’

<우행시>의 비극은 현재진행형


소설가 공지영씨의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하 우행시) 중에서 남자 주인공 정윤수가 쓴 일기 구절이다. 정윤수는 사랑하는 여자의 병원비를 빌리기 위해 한 술집 여인의 집에 들른다. 그러나 함께 갔던 선배가 술집 여인과 그의 딸, 파출부를 죽이자 윤수는 선배와 함께 여자 집에서 돈을 훔쳐 달아난다(영화에서는 윤수가 파출부를 살해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사법제도는 마지막 남은 개혁의 무풍지대다. 기득권 집단의 힘을 뒤집지 못하는 탓이다.(사진/한겨레 이정아 기자)

하지만 영악한 선배는 그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정윤수는 졸지에 사형수가 된다. 위의 일기는 정윤수가 사형수가 되기까지의 과정이다. 이 억울한 사연에 독자들은 대부분 분개했을 거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구한 정윤수의 운명 자체가 아닌, ‘무엇이 그의 운명을 비극적으로 만드는가’이다.

<우행시>의 비극을 완성하는 것은 남녀 주인공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만은 아니다. 자백에 의존하는 허술한 수사 관행, 수사기관이 작성한 조서 위주로 진행되는 재판, 열악한 국선변호사 제도 등이 영화와 소설의 또 다른 배경이다. <우행시>는 사형제도의 비인간성과 함께 한국의 불합리한 형사사법 시스템까지 도마 위에 올려놓은 셈이다.

사실 사법제도 개혁은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 모두에서 주요 국정과제였다. 문턱은 높은 대신 비용은 엄청나고 서비스의 질은 형편없는, 마지막 남은 개혁의 무풍지대를 갈아엎자는 시도였다. 그러나 개혁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법조 삼륜(법원·검찰·변협)에다 정치권까지 가세한 ‘기득권 사각편대’의 힘을 뒤집지 못한 탓이었다. 태스크포스팀에 해당하는 기구가 떠서 개혁안을 만든 뒤 정권 내내 흐지부지하다가 정권 말기에 슬그머니 무산되는 과정도 비슷했다. 참여정부가 2005년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로 출범시킨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이하 사개추)가 2006년 1월에 완성한 ‘사법제도개혁법안’(이하 사법개혁안) 역시 마찬가지 운명을 맞을 기로에 처해 있다. 사개추가 만든 개혁안은 조서 중심의 재판을 법정 공방 중심인 ‘공판중심주의’로 개선하는 것,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을 설립해 법조인의 수를 늘리고 전문화하는 것, 국민이 직접 재판에 참여해 유·무죄를 판단하는 ‘국민의 형사재판참여제도’를 도입하는 것, ‘국선변호’를 확대하는 것 등을 뼈대로 하고 있다(표 참조).

국회 제출 10개월 지나도록 침묵

그러나 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된 지 10개월이 지나도록 통과는커녕, 소관 상임위인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에서 논의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법조 삼륜과 얽힌 개별 정치인들의 이해도 많이 다른데다, 사법개혁안에 대한 여당과 야당의 정치적 입장 차이도 커서 문제는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법사위 소속 한나라당 의원들은 법안에 반대하거나 더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한나라당 박세환 의원은 “개혁안이 적합한지 여부에 대해 고민 중”이라고 말했지만, 개별 법률안의 세부 내용에 대해서는 조목조목 반대 의견을 소상히 밝혔다.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도 ‘졸속 추진’을 거론하며 “(법안 통과가) 쉽게 되겠냐”는 반응을 보였다. 한나라당은 △사개추가 법조계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지 않았고 △대통령 직속 기관에서 안을 만들어 국회 입법권을 침해했으며 △한국 현실과 맞지 않아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등의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이에 대해 참여연대 사법감시팀 박근용 팀장은 “로스쿨의 경우 95년 세계화 추진위원회에서 얘기가 나왔고, DJ 정부 당시 사법개혁위원회에서도 논의됐던 사안”이며 ‘졸속 추진’이라는 비판을 반박했다. 김선수 사개추위 기획추진단장도 “국회가 법률적 하자가 전혀 없는 ‘정부 입법’이라는 형식에 대해서만 문제 삼고 정작 구체적인 법안 내용에 대해서는 진지한 검토를 하지 않아 답답하다”고 말했다.

사법개혁안은 국회를 통과할 수 있을까. 배심원 제도를 시험하는 국민참여 형사모의재판 모습.(사진/ 한겨레 김태형 기자)

열린우리당 이상경 의원은 “과반 의석을 점하는 한나라당이 논의를 안 하겠다고 하면 방법이 없다”며 한나라당에 책임을 돌렸다.

하지만 여당 역시 사법개혁안 통과에 소극적이라는 내부 비판이 있다. 열린우리당 이상민 의원은 “한나라당에서 사법개혁안 논의를 피하기도 하지만 열린우리당도 마찬가지”라며 “사법개혁은 사법제도의 본질적인 부분을 좌우하기 때문에 연구를 많이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데 국회의원들이 게으른 탓”이라고 꼬집었다. 사법개혁안에 대한 의견조율이 여권 안에서조차 잘 이뤄지지 않는 것도 법안 통과가 늦어지는 요인이다. 열린우리당 최재천 의원은 “국회 법사위에서 수석전문위원만 사법개혁안 논의에 참여하고 의원들의 직접 참여가 없는데다 당정 간에도 충분한 협의가 없었다”고 밝혔다.

“법조인들이 이익집단화한지 오래”

사법권력 주체들의 ‘직역이기주의’가 로비를 통해 국회에 반영되는 것은 사법개혁이 좌초 위기를 맞고 있는 근본적인 요인이다. 많은 국회의원들, 특히 법사위 의원들은 대부분 법조인 출신으로 사법개혁의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다. 한 의원은 “사법개혁에 반대하는 이륜(변협과 검찰)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의원들에게 로비를 한다”며 “변협(대한변호사협회)은 법조인 증원으로 이어져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협할 수 있는 로스쿨에 대한 저항감이 심하고, 검찰은 자신들의 권한을 축소할 수 있는 형사소송법 개정에 반대해 정치권에 로비를 한다”고 털어놨다.

박근용 팀장은 사법개혁이 어려운 이유에 대해 “정치권 전반에 법조인들이 미치는 영향이 너무 커졌고, 이미 이익집단화한 지 오래다”고 설명했다.

사법권은 궁극적으로 국민들로부터 나온다. 해방 이후 국민주권의 원칙이 가장 지켜지지 않았던 영역을 사법 영역이라고 할 때 정치권이 자신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사법개혁을 계속 미루는 것은 국민에 대한 직무유기인지도 모른다. <우행시>의 비극은 영화와 소설 속의 얘기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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