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장 뜰까 겁냈지만 서로의 요구 수용하고 덕담하면서 공동운명체 확인… 모두에게 닥친 위기가 냉랭한 기운 걷어… 정치권 지각변동은 미뤄질 듯
▣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아마데우스>라는 영화는, 능력 있는 궁중 악사 살리에르가 음악 신동 모차르트의 등장 이후 영향력을 잃어가고 좌절과 시기심에 빠진 나머지 모차르트를 독살한다는 내용이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과 대선, 2004년 총선까지 정치권엔 수많은 ‘살리에르’가 있었다. 그들은 노무현이라는 ‘모차르트’ 등장 이후 잊혀졌거나 사라졌다. 김근태도 그중 하나였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은, 지지층의 상당 부분을 공유하면서도 두 사람 사이에는 늘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서로 인정하지 않던 두 사람
시간을 되돌려보자. 2002년 민주당 경선에서 두 사람은 당 안팎에서 후보 단일화 요구에 시달렸다. 이는 호남당의 영남 후보라는 장점과 대중적 인기가 높았던 노무현으로의 단일화 요구였다. 김근태를 따르던 정치인들도 노무현 곁에 섰다.
결국 노무현이 승리했다. 경선 이후, 김근태는 정치자금을 공개했다. 노무현은 그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다. 김근태는 경선 결과에 승복했으나 마음으로 깊이 승복할 수 없었다. 그는 노무현 대선후보의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지 않았다.
참여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편치 않았다. 차기 대선후보로 유력했던 정동영·김근태는 각각 통일부 장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입각했으나 김근태 쪽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국민연금 문제를 둘러싸고는 노 대통령과 김 장관이 충돌했다. 김 의장은 “계급장 떼고 토론해보자”고 했다. 국민연금을 둘러싼 정부 내의 갈등 양상은 국민연금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키면서 결국 양쪽의 지지율을 끌어내리는 결과를 빚었다.
둘 사이의 냉랭한 기운은 그냥 두 사람의 문제에 그치지 않았다. 참여정부가 미숙하고 무능하다는 비판 속에 지지층이 등을 돌릴 때 가장 먼저 떨어져나간 세력은 40대였다. 1970년대와 80년대 초반 군부독재 정권에 항거하면서 어두운 시절을 지냈던 ‘475세대’와 87년 민주화 항쟁을 기점으로 대중운동에서 성공한 경험을 가진 ‘386세대’의 미묘한 갈등에는, 김근태가 노무현을 바라보는 시각, 노무현이 김근태를 바라보는 시각이 일정 부분 배어 있었다. 김근태는 475세대의 상징이며, 노무현은 386세대의 아이콘으로 부각돼 있었다. 이른바 ‘민주개혁 세력’이 두 차례 집권에 성공했으나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소수였음에도, 그 소수 내에서도 편차가 다양했다.
두 사람이 서로의 가치관, 정치적 역량 등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냉랭하다’는 데에는 대체로 일치한다. 두 사람을 가까이서 지켜본 한 의원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결정적 시기에 좌고우면해온 김 의장의 리더십에 회의를 품고 있으며 ‘운동권 순혈주의’에 대해 마뜩잖게 여기고, 김 의장은 노 대통령의 ‘축적’(삶의 행적과 그에 따른 가치관, 인식의 깊이)에 대해 의심해왔다는 것이다. 그는 “거칠게 얘기하면 ‘벼락부자’ 정도로 여긴다”고 말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서로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마음이 딱 맞아 좋아하는 정도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부동산 정책 등 큰 틀에서 수용
그랬던 두 사람의 작은 ‘역사’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6월29일 이후다. 열린우리당의 ‘수석 당원’과 ‘비상 지도부’의 만남이라는 형식이었지만, 김 의장이 ‘난파선’ 선장이 된 이후의 첫 만남이어서 어떤 결론이 내려질지 관심이 쏠렸다. 이전 관계의 연장선에서 “계급장 떼고 맞장 뜨지 않겠느냐”는 전망도 일부 있었지만 어긋났다. 김 의장은 30일 의원총회에서 “한마디로 좋은 아침이다. 괜찮은 아침이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전날 노 대통령과의 만남에 대해 만족감을 표시한 것이다.
노 대통령과 김 의장 모두에게 닥친 위기가 두 사람 사이의 냉랭한 기운을 걷어냈다. 노 대통령은 29일 만남에서 “김 의장과 열린우리당 지도부의 제안을 큰 틀에서 수용한다”며 “탈당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부동산 정책은 당의 요구를 수용하는 모양새를 띠면서 서민들의 재산세를 줄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김 의장은 “참여정부가 성공하지 않고서는 김근태에게 기회조차 없을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날 양쪽은 ‘공동운명체’임을 확인했다.
6월29일 당청 간의 훈훈한 분위기는 어느 정도 예견됐다. 김 의장 쪽은 “그동안 몇 가지 긍정적 시그널이 있었다”고 말했다. 우선 노 대통령의 국회 연설 취소다. 열린우리당이 취소를 요구한 것은 아니어서 갑작스런 취소에 당황스러워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분란이 일어날 수도 있는 ‘뇌관’을 청와대 쪽이 스스로 제거해줬다고 여기고 있다. 또 다른 긍정적 신호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관련해 김 의장이 우려를 표명한 뒤 노 대통령이 “성급하게 추진하지는 않겠다”고 화답을 했다. 이 밖에도 김 의장이 최근 광주를 방문해 “대북송금 특검과 대연정 발언이 지지층의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며, 노 대통령 입장에서는 민감한 사안을 건드렸음에도 이를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던 점을 또 다른 ‘훈풍 신호’로 받아들였다. 김 의장 쪽은 “김 의장이 대중적 인기를 얻기 위해 노 대통령과 청와대를 공격하는 방식의 정치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신뢰감이 생긴 것 같다”고 분석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김 의장에 대해 전례 없이 호의적인 평가를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의 수석 당원으로서 5·31 지방선거 이후 걱정이 많았는데, 김 의장 체제의 열린우리당이 급속도로 안정을 찾고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며 “당을 잘 챙기고 있는 김 의장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전했다.
2007년 대선엔 여전히 시각차 존재
이런 기류는 ‘지지율 하락의 근원인 노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통해 당의 활로를 찾자’는 열린우리당 일각의 움직임과 ‘노 대통령의 탈당이 정계 개편의 전제 조건이자 동력이 될 것’이라는 민주당 등 정치권 일각의 견해와는 큰 차이가 있어, 정치권의 지각변동은 장기간 미뤄질 전망이다. 민주당이나 고건 전 총리 쪽 모두 정계 개편을 기대하며 열린우리당을 주시하고 있는데, 열린우리당은 김근태 의장을 중심으로 구심력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김근태는 동지였고 지금은 더 가까워졌다. 하지만 비상시국이 만들어낸 양쪽의 끈끈한 관계가 2007년 대선까지 이어진다고 장담하기는 힘들다. 여전히 시각차는 존재한다. 김 의장은 열린우리당의 ‘정권 재창출’이 당면 과제다. 노 대통령의 시선은 더 멀리 가 있다. 김 의장은 시간표가 정해져 있어 빨리 성과를 내고 싶어하지만, 노 대통령은 “멀리 내다보고 마음을 가다듬고 착실히 준비해가면 좋아질 것”이라고 한다. 양쪽은 상대가 자기 쪽으로 시선을 좁혀올 것을 바라고 있다.
시간을 되돌려보자. 2002년 민주당 경선에서 두 사람은 당 안팎에서 후보 단일화 요구에 시달렸다. 이는 호남당의 영남 후보라는 장점과 대중적 인기가 높았던 노무현으로의 단일화 요구였다. 김근태를 따르던 정치인들도 노무현 곁에 섰다.
공동운명체이자 갈 길이 서로 다른 두 사람 사이엔 언제나 거리감이 있어왔다.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종합부동산세 등에 대한 시각차가 갈등의 예고편으로 보이기도 했으나, 노무현의 배려와 김근태의 존중으로 두 사람의 관계에 훈풍이 불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6월29일 열린우리당 지도부를 즐겁게 맞고 있다.(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