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격한 상호주의’ 등 꽉 막힌 대북정책 한층 유연해졌으나…
지난 2월6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에 나섰다 “(포용정책은) 시대적 대세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정권이 바뀌더라도 이러한 정책기조는 계속돼야 합니다.(중략) 김정일 위원장의 방한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으니, 이번에는 김정일 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할 차례입니다.”
민주당, 이례적 환영논평
사진/국회에서 연설하는 이 총재. 강경 입장이었던 그의 대북관이 조금씩 유연하고 개방된 자세로 변화하고 있다.

같은 날 오후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 3층 기자실, 김영환 민주당 대변인이 기대섞인 목소리로 준비해온 논평을 읽어 내려갔다. “이회창 총재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방문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우리는 이 총재의 이런 입장표명을(중략) 전향적 자세로 평가한다. (중략) 대북 포용정책의 큰 흐름에 동의하며 이를 시대적 대세로 받아들인 점에 대해서도 평가한다.”
이날 이회창 총재의 대북정책 발언에 대해 민주당이 환영논평을 내는 이례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민주당 대변인실 관계자는 “다른 일로 이 총재의 발언에 대해 환영논평을 낸 일은 몇 차례 있지만 대북정책에 대해 환영논평을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고 말했다. 과연 이 총재의 대북관은 과거와 달라진 것일까. 달라졌다면 얼마나 바뀐 것일까. 이 총재의 측근들은 대체로 이 총재의 대북정책이 이전보다 훨씬 유연해지고 현실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실제 이 총재의 대북정책 관련 발언을 추적해보면 이 총재는 조금씩 강경 입장에서 유연하고 개방된 자세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변화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례는 상호주의에 대한 이 총재의 태도. 이 총재는 그동안 엄격한 상호주의를 바탕으로 남북간 대결자세를 보여왔다. 이 총재는 6·15 남북정상회담을 눈앞에 둔 지난해 6월9일 부산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정상회담은 반드시 남북 상호주의 원칙에 기초해야 하며, 이 원칙은 경제·사회 문제뿐 아니라 군사·정치적 문제에서도 철저하게 적용돼야 한다”고 완고한 입장을 밝혔다. 이런 태도는 같은 해 6월20일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결과에 대한 한나라당의 기본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과 10여일 뒤인 7월6일 국회 연설에서도 재확인된다. 이 총재는 “인도적 지원 이외의 다른 지원은 상호주의 원칙 아래 북한 개방과 개혁,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실천적 행동과 연계 추진돼야 하며 군사목적으로 전용되지 않도록 감시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대북지원과 남북경협은 상호주의 원칙하에서 북한의 개방·개혁을 돕고 한반도의 긴장완화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추진돼야 한다”고 천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9월 들어 변화를 보인다. 이 총재는 지난해 9월6일 연세대 행정대학원 특강에서 ‘유연한 상호주의’라는 원칙을 들고 나온 것이다. 이날 이 총재는 “북한의 경제재건과 남북한 주민의 자유왕래가 필수적이다. 유연한 상호주의 원칙이 남북관계의 기본틀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 10월30일 <코리아타임스> 기고를 통해서는 “상호주의는 남북관계의 기본적 원칙이 돼야 한다”고 전제하면서도 경제교류에 대해서는 “유연하게 적용돼야 한다”고 유연한 상호주의의 적용범위를 좀더 구체화했다. “김정일 답방과 과거사 연계 안 하겠다” ‘엄격한 상호주의’에서 ‘유연한 상호주의’로 건너온 이 총재의 상호주의는 11월9일 국회 대표연설에서 ‘전략적 상호주의’로 훨씬 더 분명한 모습을 띄게 된다. 이 총재는 이날 연설에서 “경제를 도와주고 평화를 얻는다는 전략적 상호주의가 필요하다. 대북지원과 남북경협은 북한의 긍정적 변화와 전략적으로 연계돼 추진돼야 한다”고 밝혔다. 맹형규 기획위원장은 “전략적 상호주의는 우리가 하나를 줬으니 반드시 너희도 같은 것 하나를 내놓으라는 식의 1:1 교환이 아니다. 예컨대 남쪽이 경제적 도움을 주면 북쪽은 이산가족 문제 등에서 성의를 보이라는 신축적 방식의 상호주의”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통외위 소속의 장성민 민주당 의원은 14일 대정부질문에서 “이 총재가 제안한 전략적 상호주의는 민주당과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정책과 단 0.1mm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 문제에 대해서도 이 총재는 비슷한 길을 걷는다. 이 총재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 문제를 국내 정치의 연장선상에서만 접근하는 태도였다. 지난해 12월15일 강원도 춘천 강원일보사 강당에서 진행된 최고정치전략과정 수강생을 상대로 한 특강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려 한다면 이 정권은 거센 국민적 저항에 부딪힐 것”이라고 밝힌 것은 이 총재의 이런 인식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러나 새해 들어 이 총재는 조금씩 다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1월16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 총재는 “김 위원장의 서울답방을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진정한 남북관계 개선과 긴장완화가 아니라 적화통일의 기본전략 위에서 추진되는 것이라면 있을 수 없다. 6·25와 아웅산 및 대한항공기 테러 등에 대한 김 위원장의 진솔한 사과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의 서울답방 문제에 대해 국내 정치의 굴레를 벗겨버린 것이다. 물론 이때만 해도 김 위원장의 답방과 6·25 등 과거사 사과 문제의 연계를 시사하는 등 고리를 걸어놓았다. 그러나 지난 6일 국회 대표연설에서는 두 문제의 연계를 완전히 풀어버림으로써 그전보다 훨씬 더 진전된 태도를 보였다. 보수세력에 둘러싸인 한 ‘한계’ 그렇다면 이 총재의 이런 변화가 향후 구체적인 대북정책 현안에 대해서도 전향적인 태도로 반영될까. 이에 대해서는 당 안팎에서 이 총재의 전향적 입장전환에도 불구하고 아직 회의적인 시각이 우세하다. 우선 소장파 의원들은 이 총재가 여전히 국가보안법 개정에 대해 ‘시기상조론’을 내세워 반대한다는 점을 들어 부정적이다. 한 소장파 의원은 “이 총재가 대북 문제에 대해 조금 유연한 태도를 보이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총재가 당내 기반인 보수세력에 둘러싸여 있는 한 한계가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민주당쪽에서도 아직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 통외위 소속 문희상 민주당 의원은 “개념적으로는 이 총재의 전략적 상호주의와 정부의 포용정책이 다를 게 없다. 그렇지만 이 총재의 보수적 태도 등 때문에 여전히 여야가 ‘총론은 같지만 각론은 따로’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단기적으로는 상황에 따라 강·온의 극단을 오가기도 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전향적 자세로 서서히 나온 이 총재의 대북정책의 종착점이 어디가 될지 관심거리다. 박병수 기자 suh@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