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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민첩한 고건, 고 고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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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6-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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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아니면 시간 없다는 판단, 선거 끝나자마자 국민연대 띄우며 승부수…계파없는 민주당·열린우리당에 들어가기 힘든 상황에서 “헤쳐모여” 주문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고건이 주사위를 던졌다.

오랫동안 한가롭게 대학가 ‘강연정치’를 펴왔던 고 전 총리의 행보가 빨라졌다. 고건은 지난 6월2일 ‘중도 실용주의 세력 대통합을 위한 국민운동본부(국민연대)’를 다음달에 출범시키겠다고 밝혔다. 기자회견이나 성명 등의 형식은 아니었지만 몇몇 언론을 통해 공식화했다. 방식은 민주당이나 열린우리당 입당이 아닌 고건 중심의 독자세력화다. 정치권과 거리를 둔다는 모양새를 띠긴 했지만 본격적인 정치 행보에 나선 것이다.


박근혜 피습 이후 3위 추락

고건이 왜 이 시점에 움직이기 시작했을까?

직접적으로는 5·31에서 열린우리당의 패배다. 어차피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가 될 수 없는 고건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결국 범여권 어느 지점에선가 후보가 되는 길밖에 없다.

고건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그는 중도세력을 끌어모아 대선을 향한 튼튼한 발판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사진/ 연합)

그런 상황에서 여권의 5·31 전패는 승부수를 던질 좋은 명분이자 환경이다. 선거 결과가 나온 뒤 고건이 “한나라당의 승리라기보다 열린우리당의 패배”라고 밝힌 것도 고건의 뜻을 보여준다. 방점을 열린우리당에 찍은 것이다.

여당의 지방선거 대패는 예견된 일이었다. 그리고 자중지란에 빠진 여당에서 정계 개편 회오리가 일어날 것 또한 예상된 절차였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이 충분히 핵분열한 뒤 고건이 움직이지 않겠느냐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전망이었다. 그래서 선거가 끝나자마자 깃발을 올린 고건의 모습은 다소 의외였다.

고건의 민첩한 움직임은 따져보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여야 모두 내년 4~5월이면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을 치른다. 그에 앞서 올해 말이나 내년 초쯤 대선 경쟁의 틀이 짜일 가능성이 높다. 마냥 기다리다가 자칫 입지를 넓히기 어려울 만큼 판이 굳어버리거나 자신이 주도할 수 없는 상황으로 정국이 흘러갈 수 있다는 조바심도 작용했다.

지난 2년여 동안 줄곧 대선후보 지지도에서 1~2위를 다퉜던 고건은 움직임이 없는 후보였다. 무위와 정치권과 거리두기를 통한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뭔가 보여주고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밀릴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도 찾아온 것이다. 최근 곳곳에서 발표한 고건의 대선후보 지지도는 1년 전 30%를 웃돌던 것이 20% 안팎으로 떨어졌다. CBS 라디오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이 피습으로 입원한 박근혜 대표가 퇴원한 뒤인 5월29일과 30일 이틀 동안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에 의뢰해 발표한 대선후보 선호도에서 고건은 17.1%를 기록했다. 박근혜(28.1%)와 이명박(18.6%)에 처졌다. 지지도의 강도가 떨어지고 있는 추세다. 순위도 박근혜, 이명박에 이어 3위로 밀려난 조사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정치 바깥에 서 있으면서 정치적인 변수들에 거의 영향받지 않은 채 탄탄한 지지도를 유지해왔지만 더 이상 그걸 기대하기도 힘든 분위기다. 특히 피습 사건 이후 박근혜가 뜀박질을 하면서 상대적으로 고건의 추락이 더욱 부각됐다. 열린우리당의 한 호남 의원은 “고건의 지지도가 그리 견고한 게 아니었다. 박근혜 피습 사건의 유탄을 고스란히 고건이 맞은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돈이 최대 걸림돌”

고건의 지지도엔 현재 마땅한 여권 후보가 없기 때문에 대리 투영된 거품이 끼어 있는 측면도 있다. 특히 호남에서 평균을 웃도는 50% 안팎의 높은 지지율은 그런 현상을 말해준다. 현실적으로 정동영이나 김근태에 기대를 걸기 힘든 상황에서 우선 고건을 잠정적 대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호남의 유권자들이 보기엔 고건은 DJ나 노무현에 비해 정치적 성향과 이념에서 몇 발짝 오른쪽에 서 있다.

어쨌든 고건은 승부수를 던졌다. 무위의 정치에서 적극적인 정치로 전환했다. 이제 관건은 고건에 얼마만 한 세력이 붙느냐는 것이다. 아직 그 정도와 규모는 불투명하다. 이렇다 할 만한 기존의 뒷받침 세력도 없다. 싱크탱크인 ‘미래와 경제’와 ‘우민회’가 그나마 눈에 띈다. 자칭 고건을 지향점으로 모인 ‘한국의 미래를 준비하는 당’(한미준)과는 분명한 선을 그었다. 외부 인사들이 거론되지만 아직은 모래알이다. 사실 국민운동본부 안에 외부 인사 진용을 어떻게 짜느냐는 것보다 정치권에서 누가, 얼마나 합세하느냐에 따라 동력이 더 크게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고건이 반한나라당 진영의 대표주자가 될 수 있을까. 박근혜 대표와 악수를 나누는 고건.(사진/ 사진공동취재단)

일단 비정치인 중심의 중도실용주의 세력 통합을 추진한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당이 없는 상태에서 대선을 치러내기란 어렵다. 따라서 초기에 통합을 위한 형태가 운동본부나 국민연대로 출발하든지 간에 정당으로 진화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독자적으로 창당하기란 재정적인 문제 등을 포함해 만만치 않다. 고건의 한 참모는 “돈이 최대 걸림돌”이라고 털어놨다.

기성 정당에 문을 활짝 열어놓겠다고 거듭 밝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에서 고건과의 통합 논의가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것 아니냐는 목소리들이 많이 존재한다. 여기엔 고건 외에 대안이 없다는 주장에서부터 고건을 포함한 반한나라당 진영의 경쟁력 있는 단일 후보를 만드는 과정에 당연히 포함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그 편차가 크다. 한편으로 고건과 정서적으로나 이념적으로 거리가 먼 인사들이 당내에 적지 않게 존재한다. 고건으로서는 최대공약수를 찾는 것도 필요하지만 교집합을 최대화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

고건의 주가를 높여준 민주당은 가장 확실한 후원자이자 가장 손쉬운 ‘먹잇감’이기도 하다. 민주당의 절반은 당장이라도 고건 진영에 붙을 수 있다는 관측들이 나오고 있다. 다만 고건에게 민주당 안으로 들어오라고 재촉하는 한화갑 대표가 의외의 변수나 장애가 될 수 있다.

고건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열린우리당발 정계 개편에 큰 흡인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당장은 그렇지 않더라도 앞으로 여권에서 고건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고건이 시들지 않는 한 끊임없는 논란거리다.

지역주의의 틀에 갇힐 위험도

고건의 독자세력화 선언은 자신을 중심으로 반한나라당 쪽의 판을 짜보겠다는 시도다. 이 방법엔 두 가지 이점이 있다. 혈혈단신으로 민주당이나 열린우리당에 들어간다면 당내 계파가 없는 상황에 부닥쳐야 한다. 또 무임승차라는 비난뿐만 아니라 당내 후보자들과 경쟁을 벌여야 하는 ‘리스크’가 존재한다. 호남당으로 전락한 민주당에 들어갈 경우 지역 후보의 이미지가 붙을 수 있고, 열린우리당에 들어간다면 좀처럼 씻기 어려운 무능한 정당의 이미지가 공들여 쌓아온 안정적 국정 수행 능력의 이미지를 덧칠할 수 있다. 그래서 두 당과 선긋기는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안영근 열린우리당 의원은 “고건에게 정계 개편을 하기엔 열린우리당은 동력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내부 견해차가 너무 크고, 민주당은 집이 너무 협소해 스스로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치적 지지대가 될 세력을 끌어모으는 것도 만만치 않은 과제다. 원치 않겠지만 지역주의의 틀에 갇힐 수도 있다. 고건의 한 참모는 “지금과 같이 한나라당의 집권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PK(부산)와 TK(대구) 쪽 인사들 중 누가 연대에 참여하겠냐. 자칫 지역 모임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것과 별도의 정치적 과제도 존재한다. 그가 지닌 안정과 통합의 리더십은 정책적 무능함과 혼란을 보여온 참여정부의 반사효과의 성격이 짙다. 분열과 대립에 지친 국민들이 그의 이미지에 후한 점수를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상을 요구한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국민은 통합을 넘어 비전을 제시해줄 수 있는 후보를 찾으려 한다”고 말한다. 고건이 그것을 채워주는 후보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검증은 이제부터다. 보수와 진보의 중간에 서온 그의 중도적 이미지가 기회주의적 줄타기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도 그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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