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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대전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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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6-0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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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1995년 9월16일치 <조선일보>를 뒤져보면 재밌는 기사를 하나 만날 수 있다. “JP 미스터리, ‘병상정치’냐 와병이냐.” 지금은 한나라당의 국회의원이 된 최구식 의원이 기자 시절 쓴 기사다. 서울시 중구 청구동 자택에서 12일째 두문불출하던 JP의 행보를 그려낸 기사다. 잠깐 기사를 보자.

“DJ 비서실장 대리문병 사절… 의혹 증폭. 심기 불편했던 박준규 고문까지 병문안. 결과적으로 당 결속 효과… ‘다음주 출근’ 주장도. 4일부터 시작된 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병상정치’가 12일째로 접어든 15일 부쩍 효력을 나타냈다.”

(사진/ 연합)


얼핏 무슨 얘기를 하는지 쉽게 와닿지 않을 수 있다. 병상정치는 뭐고 와병은 또 뭔지? 둘이 다르기나 한 건지? 어쨌든 기사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정치 9단 JP가 병으로 드러누워 얻을 건 다 얻어내고 있다.

병상정치는 90년대 중반 문민정부 시절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궁에서나 가족의 일상에서도 늘 있어왔다. 황태후가 어린 임금님을 설득하기 위해, 시어머니가 대접이 시원치 않은 며느리의 버릇을 고쳐주려고 방문을 걸어잠근 채 시위하는 장면은 사극이나 주말 연속극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병상정치는 관심을 집중시키는 효과가 탁월하다. 자신의 요구가 뭔지 굳이 아픈 몸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주위에서 또 언론에서 정확히 짚어준다. 동정심은 배우의 요구에 딴죽거는 일을 막아주는 방패가 된다. 그래서 병을 일부러 연출하는 정치인도 많다.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은 병상정치의 고수였다. 오죽하면 그의 크렘린 주치의가 “옐친이 건강했는데도 정적들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꾀병을 부렸다”고 폭로했겠는가. 옐친이 꾀병을 통해 대권을 노리는 정적들을 드러나게 한 뒤 성장하기 전에 제거하는 책략을 썼다는 것이다. 마오쩌둥도 나름대로 병상정치를 폈다. 그는 외국 지도자들을 만날 때마다 아픈 시늉을 하며 자신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엄살을 피웠다. 이를 통해 주위의 강대국들이 자신의 사후 또는 장기적으로 대중국 정책을 어떻게 변화시켜나갈지 미리 떠봤다고 한다.

권력투쟁과 외교정책 차원에서는 아니지만 지난해 DJ의 입원은 대중한테 병상정치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국민의 정부 시절 불법 도·감청이 문제가 돼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등 수족들이 줄줄이 형사처벌을 받는 시점에 DJ가 건강이 악화돼 돌연 입원했다. 이를 두고 온갖 정치적 해석들이 난무했고, DJ의 정치적 힘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줬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도 병상정치력이 탁월함을 입증했다. 그가 병상에서 던진 “대전은요?”라는 한마디는 몇 날 몇 시간의 거리유세보다 더 효과적이었다. 어느새 대전시장 선거는 한나라당에 해볼 만한 게임이 됐다. 자신의 정치적 위상도 높였다. 만년 2~3등이었던 대선후보 지지율은 고건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섰다. 정치적 외연도 넓혔다. 차갑고 딱딱한 보수 여성 정치인의 이미지가 “안됐다”는 측은지심으로 뒤로 밀려났다. 박근혜는 아픈 만큼 정치적으로는 성장한 기회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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