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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보라색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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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4-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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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4월5일 서울 정동극장에서 열린 강금실 전 법무장관의 ‘보랏빛’ 출정식이 끝난 뒤였다. 봄볕 아래서 몇몇 ‘검정 양복’들이 심각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출마 기자회견이 끝나자마자 무대 위로 올라가 강 전 장관과 사진을 찍은 사람들이었다.

“명함 새로 찍어야 하는 거 아냐?”

5·31 지방선거에 서울시의원이나 구청장 선거에 나설 이들인 듯했다. 귀기울여 들어보니 사연은 이랬다. 2002년 대선의 노란 물결에 이어 2004년 총선에서 ‘개나리 열풍’을 일으켰던 열린우리당의 당색이 노란색이어서 노란 바탕으로 명함을 만들어 쓰고 있는데, 강금실의 보랏빛 바람에 편승하려면 다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다음날 열린우리당은 보라색을 깔아 강 전 장관을 맞았다.


입당식을 하러 온 그를, 보라색 넥타이를 맨 정동영 의장이 맞았다. 탁자도 보라색으로 장식됐다. 그 위에는 서울의 꽃 개나리가 놓였다. 강 전 장관은 왜 보라색에 집착하느냐는 질문에 “보라색이 좋다”고 답했다. 빨강와 파랑의 경계를 허무는 의미의 ‘퍼플 오션’(purple ocean), 기존 방식이 아닌 새로운 것으로의 변화를 뜻하는 ‘퍼플 카우’(purple cow)에도 보라색이 들어간다고 정치적 의미를 덧붙였다.

사실 보라색과 정치는 어울리지 않는다. 대선이나 총선 때 방송사들의 지도를 메우는 색깔을 떠올려보라. 한나라당은 파란색을, 민주당은 녹색을, 민주노동당은 주황색을 쓴다. 나라 바깥으로 눈을 돌려보면 대체로 보수정당이 파란색을, 진보정당이 붉은색 계통을 선호한다.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나라 안팎을 통틀어 정당이나 정치인이 상징색으로 보라색을 쓴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은 없다. 빨·노·파의 기본색에 비해 강렬함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광의의 정치 영역에서 보라색을 즐겨 사용한 쪽은 있다. 탄압받는 쪽이다. 600회를 넘겨 매주 목요일에 열리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의 목요집회에는 보라색이 넘실댄다. 원조는 아르헨티나 5월광장 어머니회다.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자식들이 끌려가 고문당하고 죽고 실종된 것에 항의해 매주 집회를 열었다. 이들에게 보라색은 고통이었다. 피멍과 같은 색깔이다. 그 속에서 희망을 피워올렸으니 보라색은 고난과 희망을 상징하기도 한다.

강 전 장관의 ‘색깔 마케팅’은 일단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서울 도심 속의 문화공간인 정동극장의 보라색으로 꾸며진 무대 위에서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한 그의 소식을 다루면서, 언론들은 투피스 정장과 스카프·액세서리·눈화장 등이 온통 상징색인 연보랏빛으로 연출됐다고 전했다. 남성 정치인들의 패션에는 둔감한 언론들이 유독 여성 정치인들만 꼼꼼히 들여다보는 행태가 못마땅하기는 하지만, 강 전 장관은 이를 역이용한 것 같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도 종종 ‘전투복’을 입거나 머리 스타일을 바꿔 전의를 드러내기도 한다.

문제는 그 이후다. 사람들은 강금실을 알면서도 잘 모른다. 연분홍빛으로 유혹에 성공했다면 이제는 한 꺼풀씩 거둬내면서 강금실을 보여줄 차례다. 실패한다면? 보라색은 보기에 따라서 무척 우울한 색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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