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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당’이 안 되면 ‘다~앙’ 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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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4-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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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정치개혁 위해 ‘적극적 무소속’ 모은 풀뿌리옥천당의 도발
정당법의 한계를 뛰어넘어 지역정당의 전국적 네트워크를 꿈꾼다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그들은 유쾌했다. 지역정치 현실을 놓고 열변을 토하면서도 쉴 새 없이 까르르 웃음이 터져나왔다. 지역 현안을 말하며 짐짓 심각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노나 공부하나 마찬가지’라는 표정이다. 지역 선거관리위원회의 잇따른 경고에다 경찰 조사까지 받으면서도 여전히 정당을 ‘참칭’하고 있는 유쾌한 그들.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풀뿌리 옥천당, 그들이 온다.

폼나게 창당? 그냥 한 걸로 치지…


“선관위가 정당법 조항을 들이대며 ‘당’이라는 말을 쓰지 말라대. 현행법상 서울에 정당본부를 두고 5개 이상 광역단위에 5천 명 이상의 당원을 확보해야 정당 명칭을 쓸 수 있다면서. 그래서 선관위에 물었지. 당이라고 못할 이유가 뭐냐고.” 옥천당 당수 서형석(51)씨의 말에 곁에 있던 대변인 이진형(44)씨가 거들고 나선다.

“풀뿌리 정치는 풀뿌리 정당에!” 지난 3월13일 충북 옥천에서 열린 “풀뿌리·초록정치네트워크 5·13 공동행동’ 출범식에서 다가오는 지방선거에 출마할 풀뿌리 후보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그러니까 제가 하는 서점은 명륜당이고, 저 앞 쫄면집은 풍미당이고, 저기 아래의 금은방은 보석당이고…. 당이라고 못할 이유가 없다는 거거든요, 우리는.”

사무총장을 맡은 이상용(48)씨도 빠질 수 없다. “정치개혁을 위한 시민모임이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당’이란 말을 쓰겠다는 거지 딴 뜻은 없거든요. 그런데 쓰지 말라고 하면, 좋다 이거지. 우리는 ‘당’이라고 안 쓰고 ‘다~앙’이라고 쓰겠다 이거야. 대신 빨리 읽어달라고 하면 되거든.” 옥천 읍내 한 식당에서 마주한 옥천당 ‘당 3역’의 쾌도난담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풀뿌리 옥천당 ‘창당’을 위한 논의는 지난해 8월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소 지역 현안과 정치개혁 문제를 두고 토론을 벌여온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날이었다. “그날 술 한잔하면서 얘기를 하다 자연스럽게 당을 만들기로 의기투합을 했다”는 게 당수 서씨의 말이다. “어떤 사람들이 당원으로 참여했느냐”고 묻자 사무총장 이씨가 “지역 언론인에서 농산물 판매상, 보험설계사, 글쟁이, 책방 주인, 철물점·김치공장·여행사·금은방·부동산 사장 등 다양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대체 지금 당원은 얼마나 되느냐”고 묻자 대변인 이씨는 “예비 당원은 3만 명인데, 입당원서를 쓴 사람이 아직은 11명에 그치고 있다”며 짐짓 분발해야겠다는 표정이다.

9월 중순 준비모임을 열고 창당준비위원회를 꾸렸다. 11월 중순엔 풀뿌리 정치를 주제로 전문가를 데려다 정책포럼을 열기도 했다. “원래는 12월 말이나 1월 초에 폼나게 창당을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지역 현안이 터지는 통에 제대로 준비를 못했어요. 그래서 에이, 그냥 창당한 걸로 치자고 했지요. 다들 벌써 창당을 한 걸로 알고 있는데, 돈도 없고 복잡하고 남한테 보여주자고 창당식을 할 필요까지 있겠느냐는 거였죠.” 그래서 ‘행복한 옥천을 꿈꿉니다’라는 제목으로 지난 1월 말 자료집을 낸 뒤부터는 ‘그냥 창당한 걸로 치기로’ 했다고 서씨는 말했다.

자치 대 반자치, 상식 대 몰상식

옥천당은 스스로 정당이라고 말하면서도 기존 정당의 당원에게도 ‘입당’의 문호를 개방했다. 법적으로 등록된 정당이 아니니 이중 당적을 문제 삼을 이유도 없고, 지방자치와 지역 정치개혁이 목적이니 누구나 환영한다는 게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적극적 무소속’이라고 부른다. 사무총장 이씨는 “후보를 낸다 하더라도 선거 홍보물에는 ‘풀뿌리 옥천당’이라고 쓸 수 없거든요. 기본적으로 무소속이죠. 하지만 기존 정당에서 버림받아 뛰쳐나온 무소속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르거든요. 그러니 적극적 무소속이죠”라고 말했다.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은 ‘노무현 정권에 대한 심판’을,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 지방권력 10년 심판’을 주장하고 있다. 당수 서씨는 “우리가 보기엔 이번 지방선거는 자치 대 반자치, 상식 대 몰상식의 구도”라며 “중앙 권력에 대한 ‘막연한 공포’에 길들여져왔던 걸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이번 선거에 옥천당에서도 1명의 후보를 내기로 했다. “권력을 잡겠다는 게 아니라 정치문화를 바꾸겠다는 거고, 이를 통해 생활정치를 이루자는 것”이라는 게 첫 공직 후보를 내는 옥천당 ‘지도부’의 말이다.

“당선 가능성은 있느냐”고 묻자 ‘그걸 누가 아느냐’는 표정이다. “참가 자체에 의미가 있는 거냐”고 묻자 “정체성을 훼손하면서까지” 당선될 필요는 없단다. 그래도 공약은 있을 터. “당선되면 뭘 할 거냐”고 묻자 “맺힌 거 있으면 풀고 하는 게 사람 사는 도리”가 아니겠느냐고 한다. “좀더 자세히 말해달라”고 하자 그제야 지역 도서관이며 학교 주변환경, 군청 환경미화원 문제와 휴양림 주변 레미콘 공장 신설 문제까지 끝없이 지역 현안을 쏟아낸다.

“체육센터만 해도 그래요. 140억원가량 예산을 들여 짓는다기에, 수영장을 꼭 지으라고 했지. 옥천은 65살 이상 인구가 전체의 18.17%나 되거든. 신경통 앓는 노인들에게 의사협회에서 운동 처방으로 수영을 하라고 했는데, 수영장이 있어야 말이지.” 하지만 2004년 전국체전을 앞두고 서둘렀던 탓에 결국 수영장은 들어서지 못했고, 작은 규모의 대회를 몇 차례 유치했을 뿐 실제 활용도는 극히 미미한 상태다. 사무총장 이씨는 “큰돈 주고 지어놓고 왜 잠가만 놓느냐고 했더니 얼마 전부터 문은 열어두더라”며 “화장실도 쓸 수 있게 해주니 140억원짜리 공중화장실이 생긴 꼴”이라며 웃었다.

지난달 말 당수 서씨는 경찰에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당’ 명칭이 또다시 문제가 된 것이다. 고발 주체가 선관위가 아닌 것으로 미뤄, 기존 정당에서 고발장을 낸 모양이라는 게 그의 짐작이다. 서씨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사실은 선관위가 하는 일이거든. 선거가 민주주의의 축제 아니냐. 그거 하자는 거다. 그래서 선관위한테 공명선거 캠페인 하게 돈 좀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검토해보마’ 하대. 지역 일꾼 뽑는데 축제로 가야지.” 지역 선관위가 골치 아파하는 것도 당연해 보였다.

풀뿌리 정당연합 비례대표 나올까

풀뿌리 옥천당은 뜻을 같이하는 무소속 출마 예정자 20여 명과 함께 지난달 중순 ‘풀뿌리·초록정치네트워크 5·31 공동행동’ 출범식을 열었다. “관심 있으면 기자들도 내려오면 되지, 언론 의식해 굳이 서울에서 할 필요 없다”는 뜻에서 전국 단위 행사임에도 옥천 읍내에서 치렀다. 옥천당의 풀뿌리 지역정당 실험은 이미 군포·영광 등지에서 비슷한 움직임을 낳고 있다. 풀뿌리 지역정당의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해 다음 총선에선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내보자는 목소리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풀뿌리 정당연합의 비례대표가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지역 현안을 논하는 날을 상상하는 건 분명 유쾌한 도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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