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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연하장 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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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1-0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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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한 몇 년 된 것 같다. 친구나 오랜 친분이 있는 이들한테서 크리스마스 카드나 연하장을 받아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몇 년 새 아예 없는 것 같다. 나부터도 보내는 법이 없으니…. 통신의 발달이 클 것이다. 휴대전화를 통해 저장된 번호를 불러내면 그만이다. 오랜만이라 어색하다면 이메일로 보낸다. 잔잔한 설렘도 없어졌다. 며칠 전 아내가 가까운 직장동료한테서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은 것을 보곤 내심 약간 부러웠다.

연하장을 많이 받긴 한다. 지난해 정치부 기자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요즘은 정리하기도 짜증날 만큼 많은 연하장이 쏟아진다. 보내는 사람, 봉투, 크기는 다 달라도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 국회의원들이다. 한번 들른 의원실은 빠지지 않는다. 건넨 명함의 주소를 보고 보내오는 것이다. 일면식이 없는 의원들의 것도 섞여 있다. 국회 출입 등록기자들의 직장 주소를 손쉽게 구할 수 있어서란다.

보낸 사람에겐 좀 미안한 얘기지만 보통은 뜯어보지 않고 곧바로 쓰레기통행이다. 봉투 겉면에 타이핑한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을 경우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다. 의원님의 손을 탔는지 안 탔는지 판단하는 잣대다. 일부러 몇 개 편지봉투를 뜯어봤더니 ‘역시나’다. 500원짜리나 1천원짜리 연하장에 고딕체의 딱딱한 인쇄글자들이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잔재주를 피우는 의원실도 있다. 의원이 불특정 다수를 향해 쓴 자필을 카드에 박아서 대량 인쇄하는 것이다. 최근에 만난 한 여교수가 비법 하나를 가르쳐줬다. 침을 묻혀 보는 것이다. 자필로 쓴 것 같은 서명 부분도 즉석복권을 긁는 심정으로 침을 발라 문질러봤다. 번지는 게 하나도 없었다. 미국에서 공부한 여교수는 얘기를 듣고는 펄쩍 뛰었다. “차라리 안 보내는 게 낫지!” 문화가 다르니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뭔가 개운치 않다.


이메일을 타고 오는 ‘근하신년’은 더욱 짜증난다. 때론 호기심으로 때론 실수로 100~200개의 스팸메일 가운데 하나를 열어보는 셈치고 몇 개를 열어봤다. 요즘은 정치인들의 음성이 윈도 미디어 플레이를 통해 흘러나온다. 역시나 수신인이 누군지 상관없이 만들어진 그야말로 불특정 다수를 향해 쏟아내는 음성들이었다.

과연 헛돈 쓴다고 정색하고 탓할 일은 아닐까. 서울시장 출마 의사를 밝힌 한 의원은 2천 통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건당 30원에 불과하니 ‘껌값’이라고 한다. 연하장도 정치부 기자, 당 대의원, 당 의원, 당원협의회장, 시군구 의원 등에게 1천~2천 통 이상을 보내지만 100만원이 넘지 않는다고 한다. 이메일은 공짜니, 세비 100만원이면 새해 인사를 값싸게(?) 해결할 수 있는 셈이다. 겉장부터 모든 게 인쇄된 연하장을 ‘공해’라고 한다면 성의를 무시한 지나친 건방일까? 299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3분의 1이 넘는 분들이 이렇게 인쇄기로 ‘가공된 정성’을 보내오지만, 아~ 이 심각한 불일치를 어찌하랴! 친하다고 생각하는 의원은 열 손가락으로 꼽아도 손가락이 남아도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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