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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불난 여권에 ‘도청 폭탄’ 떨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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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2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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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원·신건 구속과 DJ 반발로 정치적 파산 위기에 몰려 허둥지둥
여당 내부에서 대통령 책임론과 탈당 요구 터져나오며 분열의 조짐도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이제 누구도 도청 파문의 앞길을 예측할 수 없고, 제어할 수도 없다. 민주당이 제기한 ‘DJ 죽이기 음모론’으로 무제한 진실게임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앞으로 어느 누구도 보호받을 수 없고 어떤 사람도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나오는 대로 낱낱이 밝히는 것 말고는 어떤 해법도 없다.”

DJ 죽이기 음모론에 동조하기까지


한나라당 중심의 구 여권 세력들이 YS 정권 시절 안기부와 함께 저지른 불법 정치공작의 실체를 밝혀줄 호재로 기대됐던 ‘X파일 수사’가 국가정보원의 “김대중 정부의 불법 도청 존재” 고백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DJ 죽이기’로 매도되기 시작한 지난 8월10일, 청와대의 핵심 인사는 기자에게 이런 걱정을 털어놨다. 검찰 수사로 진실을 명백히 밝히는 정면 승부수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외통수로 몰렸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약 100일이 지난 11월15일, 우려는 현실이 됐다. 당시 최경환 비서관을 통해 불편한 심기를 표출하고 병원에 입원했던 DJ는 자신이 임명한 임동원, 신건 두 국정원장이 조직적인 불법 도청 혐의로 구속되는 수모를 겪었다. 분노한 DJ는 16일 “사실이 아닌 것을 억지로 만들어내고 있다”며 노 대통령을 겨냥했지만, ‘진솔한 반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그토록 자부해온 인권 대통령의 이미지에 생채기가 나면서 도덕적 파산 위기로 내몰린 셈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역시 정치적 파산 위기를 맞고 있다. 노 대통령은 침묵한다. 하지만 DJ의 직설적 반발에 놀란 여당 안에서는 스스로 정당성을 역설했던 강정구 교수의 불구속 수사 사례와 형평성 논란을 제기하고, 음모론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등 자아분열적인 모습마저 보이고 있다.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혐의를 받는 강정구 교수도 인권이 있어 불구속했는데, 남북 화해를 위해 몸 바친 임동원은 왜 인권이 없냐. 결국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X파일의 본질을 도청 테이프에 담긴 불법 내용 규명에서 누가 도청했느냐로 뒤바꾼 사람이 있지 않느냐.” 여당의 한 의원은 민주당이 줄기차게 제기해온 노 대통령의 DJ 죽이기 음모론에 동조했다. 274개의 도청 테이프 내용 공개와 수사 논란이 한창일 때 “본질은 불법 도청”이라며 검찰 수사의 물꼬를 불법 도청 주체 문제로 돌린 노 대통령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상당수 호남 지역 의원들은 노 대통령이 ‘창당 초심 회복’ 발언과 검찰의 두 국정원장 구속으로 사실상 DJ와 결별하면서 열린우리당의 내년 지방선거 참패는 필연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에 공감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의원은 “두 원장의 구속으로 민주당과의 통합론은 완전히 물건너갔고, 악화된 호남 민심에 완전히 불을 질렀다“면서 “어떻게 당을 살리겠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임동원·신건 구속으로 여권이 정치적 파산 위기에 몰렸다. 2003년 11월 김대중도서관 개관식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사진/ 한겨레 김경호 기자)

10·26 재선거 패배 직후 잠시 들끓다 잦아졌던 ‘노 대통령 탈당 요구’도 되살아났다. 안영근 의원은 17일 “지금이라도 대통령은 무당적으로 국정을 운영하게는 게 더 효율적”이라며 탈당을 요구했다. 친노 인사들의 반격에 주춤했던 그는 이번에는 아예 작심한 듯 “대통령이 (당에 남아) 있다고 해서 다음 대선·총선 때까지 우리당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는 극언을 내뱉었다.

혼돈에 휩싸인 여당 안에서는 분노한 DJ와 호남 민심을 달래고 파국을 막으려는 안간힘이 속출하고 있다. 최재천·임종석 두 의원은 검찰의 전직 국정원장 구속을 “검찰의 싸구려 정치”라고 공박했고, 송영길·임종인·이종걸 의원 등 변호사 출신 여당 의원 12명은 두 사람의 ‘수호천사’를 자처하며 변호인단을 꾸렸다. 변호인단 구성을 주도한 송영길 의원은 “불법 도청의 실체를 밝혀야 한다는 원칙은 확고하지만, 신건 원장에게 앙심을 품은 김은성 전 차장의 일방적인 진술과 ‘원장이 몰랐을 리 없다’는 국정원 직원들의 떠넘기기 진술만으로 두 원장을 구속한 것은 지나친 처사”라며 “구속적부심을 신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송 의원은 특히 “남북 화해의 전도사인 임동원 원장은 DJP 연합을 깨면서까지 자민련의 해임 요구를 거부할 정도로 DJ에게는 상징성이 큰 인물이며 분신 같은 존재”라면서 “강정구 교수 사건 때 강조한 불구속 처벌 원칙이 왜 임 원장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는지 법정에서 따지겠다”고 덧붙였다.

답답한 청와대, 정면승부론?

정세균 의장과 원혜영 정책위의장 등 여당 지도부도 국가 권력에 의한 불법 도·감청 행위에 대해 공소시효를 배제 또는 연장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며 거들고 나섰다. 불법 도·감청의 몸통인 YS 정권의 범죄는 공소시효 때문에 파묻히고, 불법 행위를 근절하려던 DJ 정권 시절 국정원장들만 처벌받는 불합리한 현실을 법률로 보강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YS 정부를 겨냥한 초법적 정치 보복”이라며 반발하고, 여당 안에서도 소급입법 논란이 제기되고 있어 그 앞날은 불투명하다.

청와대는 이런 논란에 그저 답답함을 호소할 뿐이다. 노 대통령의 의중에 정통한 청와대의 한 핵심 인사는 “민정수석실이 검찰과 조율하고 지휘하던 시대는 지났다는 것을 다 아는 여당 의원들이 청와대가 사전에 구속 의견을 보고받았을 텐데 왜 강정구 교수처럼 불구속 수사 지휘를 안 했느냐고 들고 일어나고, 내년 지방선거를 의식한 정치권의 부추김 때문에 문제가 더 확산되는 상황이라 해법이 마땅치 않다”면서 “갑갑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당의 친노 직계 의원들 일각에서는 정면승부론도 제기되고 있어 논란의 불똥이 어디로 튈지 아직 예측하기 어렵다. 친노 직계를 차저하는 수도권의 한 의원은 “만만한 게 노무현이냐. 과거와 달리 청와대가 검찰 수사에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여당 의원들이 호남 정서나 들먹이며 대통령을 비난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며 “당당하게 국민의 심판을 받자”고 말했다. 이 의원은 특히 “검찰의 혐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두 전직 원장의 행위는 죄질이 아주 나쁜 범죄”라며 “당당하게 법정에서 시비를 가리면 된다”고 주장했다. 복잡하고 헷갈리는 여권. X파일 파문의 최대 피해자는 바로 이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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