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컨설턴트라는 직업은 미국에서도 일반 국민에게는 상대적으로 낯선 직종이지만 언론이나 정치권에서는 이미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자리잡았다. 가장 큰 이유는 미디어 정치의 도래이며, 이와 맞물려 진행된 당파성의 약화와 선거법 개정이 전업 정치 전문가에 대한 의존도를 심화했다.
1948년 트루먼과 듀이의 라디오 캠페인, 52년 아이젠하워와 스티븐슨의 텔레비전 광고 캠페인, 60년 케네디-닉슨의 텔레비전 토론은 당시까지 행해지던 정치의 모든 방식을 바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케네디는 최초로 전담 여론조사가를 두어 시시각각 여론의 동태를 살폈다. 이후 조사가들은 선거기획의 단골 전략가로 떠올랐다. 1968년 정치권에서 과거의 인물로 평가받던 닉슨은 정교한 미디어 중심의 선거전략으로 백악관을 차지했고, 그 이후 무수한 정치인들이 마치 새로운 상품이 마케팅과 광고 전략으로 소비자를 유혹하듯 유권자를 설득하며 한 표를 호소했다. 그 기법은 기술의 발달과 함께 더욱 다양하고 세련돼지고 있다. 이러한 선거전략 뒤에는 항상 정치 컨설턴트들이 있었다.
당의 보스와 그 참모들이 하던 일을 미디어와 정치 컨설턴트들이 떠맡기 시작한 것이다. 1933년 문을 연 ‘캠페인 주식회사’가 최초의 선거 전문 회사라고 할 수 있지만, 미디어 정치 이전의 일이고 진정한 의미의 정치 컨설턴트는 이보다 23년 뒤인 1956년 ‘정치 컨설턴트’라는 명함을 만들어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한 조지프 내폴리턴에서 시작됐다. 그는 정치 컨설턴트는 후보자와 유권자가 제대로 소통할 수 있도록 후보자 입장에서 자문을 해주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미디어 정치는 영구적인 캠페인의 시대의 또 다른 말이기도 하다. 매일매일이 캠페인이고 언론에서 발표하는 여론조사는 해당 정치인이나 정부의 성적표나 다름없는 세상이다. 이러한 정치환경은 굳이 선거철이 아니라 해도 정치 컨설팅만을 전문으로 할 수 있는 비즈니스적 기회를 제공했다. 비용을 지불하며 정치적 진단을 받고 메시지 개발을 의뢰하고 홍보 방안의 자문을 받는다. 정치 컨설팅을 통해 직접 출마를 하거나 공직에 진출하려는 이들은 아주 소수다. 정치 컨설팅은 하나의 전문 직업이지 정치인이 되기 위한 통로는 아니다.
오늘날 일반에게 알려진 리처드 워스린, 리 애트워터, 제임스 카빌, 딕 모리스, 밥 슈럼, 칼 로브 등은 정치 컨설팅으로 부와 명성을 거머쥔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런 이유로 주요 언론은 미 대선을 앞두고 ‘카빌 예선’이니 ‘슈럼 예선’과 같은 제목의 기사를 통해 그들이 대선 후보 중 누구를 선택했다고 내보낸다. 후보가 컨설턴트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컨설턴트가 후보를 선정할 수 있는 상황까지 온 것이다. 무명의 후보는 최고의 유명 컨설턴트군을 대거 결합시킴으로써 언론의 주목을 받는 효과까지 누린다.
1993년 뉴저지 주지사 선거에서 <뉴욕타임스>는 ‘컨설팅업계 타이타닉의 대결’이라는 제목으로 민주당 후보의 전략가 제임스 카빌과 공화당 후보의 전략가 에드 롤린스의 대결을 후보자 간의 대결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묘사했다.
전략을 논하는 컨설턴트들의 전문 분야는 대개 캠페인 기획, 미디어 전략, 여론조사, 디렉트 마케팅으로 나뉜다. 이들은 각각의 전문 분야를 바탕으로 선거에 결합해 해당 업무를 책임지고 전략과 메시지를 조율하지만, 이들 중 가장 경험 많고 유능한 이가 수석 전략가의 자리에 앉아 선거 전체의 전략과 메시지를 총괄한다.
학계가 본격적으로 정치 컨설턴트의 역할을 주목하고 연구하기 시작한 지 이제 10년 남짓이다. 그에 발맞춰 유수 대학에 학부와 석사는 물론이고 단기 과정 등이 설립돼 정치 전문가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비즈니스, 마케팅, 광고업계에서 테크닉을 ‘수입’한 정치 컨설턴트들은 최근 정치 영역의 테크닉을 역으로 비즈니스계에 ‘수출’한다. 각종 주주총회, 노조선거, 반전데모, 기업 이미지 전환, 최고경영자(CEO) 메시지 관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들의 수요는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선거 캠페인은 시장점유율이 50% 미만이면 패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무혈의 전쟁 속에서 단련된 이들의 생존력이 일반 비즈니스 업계에서도 경쟁력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