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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수구 보수’ 대합창, 연례행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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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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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전 송두율 문제 들고 일어난 한나라당, 지지율 하락 교훈 잊고 다시 색깔론…당장 지지층 결집하는 데는 효과 있으나 집권을 향한 장기 게임에서는 손해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국가 보위와 체제 수호의 최후 책임자인 대통령이 앞장서 대한민국 체제의 무장해제를 강요하고, 대한민국을 엄청난 이념갈등과 국론분열로 몰아넣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자유민주 체제를 지키겠다는 확고한 신념과 행동을 보여라.” ‘무너지는 헌정질서를 지켜내겠다’라는 제목의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특별 기자회견문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 ‘국가 정체성’ ‘헌정질서’ ‘정통성’ 등의 비슷한 단어들이 7차례나 반복된다. 1년 전인 2004년 9월9일의 일이다.

박근혜 대표가 10월18일 "나라를 구해내겠다"는 시국 기자회견을 통해 다시 한 번 정국의 전면에 나섰다. (사진/ 한겨레 이종찬 기자)


1년이 지난 2005년 10월18일. “정권의 심장부에서 나라의 정통성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흔들고 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는 결코 타협하거나 양보할 수 없다.” ‘국민 여러분과 함께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겠다’라는 제목이 붙은 박 대표의 ‘시국’ 기자회견이다. 역시 ‘정체성’ ‘자유민주주의 체제’ ‘정통성’ 등의 단어를 14차례나 볼 수 있다.

“지도부가 자신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

두 기자회견이 거의 비슷하다. 본질이 같기 때문이다. 바로 국가보안법에 있다. 다만 배경이 되는 등장인물이 1년 전엔 송두율 독일 뮌스터대 교수였다면, 이번엔 강정구 동국대 교수라는 것이다. 박 대표는 “(대통령이) 자유민주 체제를 지키겠다는 것인지, 무너뜨리겠다는 것인지 대답하라”며 이념공세의 고삐를 바짝 죄었다. 문제는 희미해지던 한나라당의 수구 보수 이미지가 ‘뜻하지 않게’ 다시 도드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불과 1년 전 스스로 얻은 ‘교훈과 약속’을 잊은 과민한 반응 때문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발표한 지난해 9월 박근혜 대표의 직무수행 지지도는 58.6%, 당 지지율은 31.5%였다. 국가보안법·사학법·과거사법·언론관계법 등 이른바 ‘4대 법안’을 둘러싼 정치권 공방이 가열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특히 국가보안법 폐지 법안의 국회 법사위 상정을 막기 위해 법사위 회의장 점거농성 등 강경투쟁을 벌이면서, 박 대표와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눈에 띄게 하락했다. 올 1월 조사에서 박 대표의 직무수행 지지도는 48.9%로 지난해 9월에 견줘 10%포인트 빠졌으며, 당 지지율도 25.6%로 6%포인트가 증발했다. 당 안팎에서 ‘박근혜 대세론’이 꺾이고, ‘박근혜 필패론’이 흘러나왔다. 당내 위기감도 팽배했다. ‘수구 보수적’으로 대응한 것 아니냐는 반성론으로 귀결됐다. 보수 강경파들의 목소리들도 잦아들었다. 많은 이들이 “정권 교체를 위해 외연을 확장해야 한다”는 새로운 교훈을 말했다.

지금 한나라당은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 지난해 보안법 폐지보다 개정 쪽 국민 의견이 4 대 6이나 4.5 대 5.5로 높았던 것처럼, 강정구 교수를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이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에 견줘 6 대 4 정도로 높다. 한나라당이 여론의 우위를 점령한 것처럼 보이는 대목이다. 당 지지율도 30%를 웃돌며 바닥을 기는 열린우리당보다 높다. 권철현 의원실의 김성현 보좌관은 “여론을 등에 업은 상황에서 세게 붙는 것은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고 당 지도부가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돌출 발언을 한 강 교수를 (구속·불구속의 구분 없음)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이 높다고 해서, 여론이 치열한 이념공방을 주도하는 한나라당 편에 서 있다고 볼 순 없다.

강경대응 자제시킬 당내 견제세력 없어

한나라당의 이념공세 강화는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한귀영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실장은 “당장 지지층을 결집하고 10·26 재·보궐 선거에 유리하게 작용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외연을 확장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한나라당으로선 손해가 될 수 있는 게임”이라고 분석했다.

박근혜 대표 개인으로 볼 땐 다시 이슈를 주도하면서 보수층의 구심점으로 떠올랐다. 신보수를 표방하는 ‘뉴라이트 네트워크’의 신지호 대표는 지난해와 다르게 “한나라당의 대응은 정당한 문제제기다. 일개 학자의 문제가 아니라, 현 집권 세력의 위험한 역사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대한민국 전체를 인정할 것이냐 부정할 것이냐는 문제”라며 박 대표에게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지난 연말에 이어 공격적이고 투쟁적인 모습에서 나오는 박 대표의 부정적 이미지가 점점 화석화하고 있다. 2004년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현 통일부 장관)과 ‘5·3 협약’을 맺고 상생의 리더십을 보여 급부상했던 지지율이 재·보궐 선거 국면에서만 잠시 반짝할 뿐 대세 하강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지난해 12월 "국가 정체성을 지키겠다"며 국회법사위 회의장을 점거해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보안법폐지안 상정을 저지시켰다. (사진/ 이용호 기자)

열린우리당과의 비교우위를 누렸던 당 지지율도 좌우, 보혁 대립 전선이 선명해지면서 열린우리당의 소폭 상승과 상대적으로 한나라당 지지율의 하락을 예상할 수 있다.

교훈의 망각 다른 한편으로는 한나라당의 자기 모순도 드러난다. 한나라당은 이미 지난 연말 태스크포스를 꾸려 국가보안법 7조(찬양·고무)를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사실상 당론이었다. “학문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당 안팎의 논리를 수용한 것이다. 그리고 올 4월 ‘찬양·고무’를 ‘선전·선동’으로 바꿔 공연한 찬양 행위와 선전·선동만을 처벌하도록 한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법사위에 제출했다. 따라서 국가보안법 7조 위반 혐의를 받고 있는 강정구 교수를 ‘봐줘선 안 된다’며 핏대를 올리는 한나라당의 논리는 1년 전, 6개월 전의 태도와도 어긋나는 측면이 있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는 ‘이념전’이 또다시 벌어지는 까닭은 제1야당의 지도자인 박 대표 개인의 신념이 크게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김형준 국민대 교수(정치학)는 “박 대표의 행동은 아버지(박정희)와 같이 생활하면서 느끼고 습득한 것이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것”이라며 “국가보안법이 과거 체제 보호를 위해 상징적으로 작동했다는 확신을 갖고 있고, 그것을 지키려 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주위 지도부가 보수적이라는 것도 박 대표의 의사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강재섭 원내대표의 말 속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이 사건은 색깔론이 아니고,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사느냐 죽느냐는 ‘생사론’”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반대로 지도부의 강경 대응을 자제시킬 당내 견제 세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소장파의 목소리는 크지 않다. 10월20일 당 상임운영위 회의에선 원희룡 최고위원이 “이념 문제에 과잉대응할 필요는 없다”고 차분한 대응을 주문했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손학규 경기지사도 “소모적인 이념논쟁을 이용한 편가르기는 그만둬야 한다”고 어렵게 입을 뗐으나, 당 안팎의 견제 세력은 집단적인 목소리에 묻혀 휩쓸려가는 양상이다. 한 초선 의원은 연초 소장파의 지도부 비판이 4·30 재·보선 결과 뒤 ‘이지메’ 형태로 돌아온 쓰라린 경험을 떠올리며 비판에 신중을 기했다. 그는 언론에 ‘정답’ 이상을 말하기 어렵다는 고충을 토로했다. 그나마 이들의 견제 효과인지 장외투쟁을 접고 원내투쟁(국회 안)으로 공격의 수위가 낮아졌다.

보수원로 1만명은 지난 10월18일 "나라가 망하기 전에 대한민국을 살리자"고 길거리에 나섰다. (사진/ 연합)

또 ‘꼴통 발언’할까 걱정이…

소장파들 가운데는 지도부의 논리 비약을 지적하는 이들이 상당수 있다. 한 재선 의원은 “강 교수를 구속하냐 안 하냐는 처벌의 강도 문제이지, 이것을 마치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려는 움직임으로 몰아가는 것은 대단한 논리적 비약이자 색깔론”이라고 꼬집었다. 강 교수를 불구속 수사하도록 하는 것을 아예 처벌하지 않는다고 받아들이는 한나라당의 태도는 잘못됐다는 것이다. 또 천정배 법무장관의 지휘권 행사를 ‘강정구 구하기’ ‘강정구 감싸기’로 규정짓고, 현 정부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훼손하고 있다는 진단으로 건너뛴다. 과연 “그렇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오히려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의 결집과 반격을 불러올 뿐이다.

박근혜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이 한나라당과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답변을 내놓지 않을 경우, 거대한 구국대회를 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구국대회로 열지는 가변적이지만, 지난해처럼 타협 없는 줄타기가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당장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강 교수 문제를 집요하게 따지기로 각오를 다진 상태다.

한나라당은 지난해 10월 열린우리당과의 첨예한 이념정국 국면에서 보수 강경파로 대표되는 인물 가운데 하나인 안택수 의원을 내보냈다. 그런데 오히려 이해찬 총리한테서 “차떼기 정당”이라는 반격을 받았다. 혹을 떼려다 혹을 붙인 격이다. 국회는 이후 20여 일 동안 헛돌았다. 한 정치 전문가는 “한나라당이 집권하기 위해서는 도덕성과 북한 문제에 대한 과거 낡은 이미지를 털어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의 지적을 놓고 봤을 때, 지금 한나라당은 북한 문제에 대한 과거 ‘수구 보수’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와 흡사하게도 안택수 의원이 10월24일 대정부 질의 첫날 질의자로 나선다. 한나라당의 ㄱ의원은 “안택수 의원 등 대정부 질의에 나설 의원의 면면을 보니, 또 꼴통 발언을 할까봐 걱정이 든다”고 불안한 기억을 떠올렸다. 한나라당은 1년 전 전철을 밟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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