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영식/ <오마이뉴스> 정치부 기자
차기 대권 경주에서 부동의 1위를 달리던 고건 전 국무총리에게 ‘빨간 불’이 켜졌다.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이명박 서울시장의 지지도가 무섭게 상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계천 마케팅’ 앞에 ‘고건 대세론’마저 흔들리고 있다.
지난 9월20일 저녁 동숭동 대학로의 한 음식점에서 고 전 총리를 만났다. 내년에 고희(古稀·70살)를 맞을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피부가 깨끗하고 건강해 보였다. 동석한 한 측근은 “나이로 재단하지 말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그를 만난 음식점 ‘석정’은 대학로에서 유일한 정통 일식집이라고 한다(대학로에는 그가 ‘독서실’로 부르는 개인 사무실이 있다). 흥미로운 점은 1998년 이곳에서 노무현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를 만났다는 사실이다. 당시 DJ는 노무현-한광옥을 놔두고 그를 서울시장 후보로 낙점했는데, 노 부총재는 과감하게 시장 도전을 포기하고 그를 영입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그는 노 대통령을 ‘원칙주의자’라고 평했다).
폭탄주가 몇 순배 돌자 이날의 화제는 <조선닷컴>의 ‘그가 대통령이 되면 안 되는 이유 10가지’라는 연재물로 옮아갔다. 이것은 유력한 대선 후보 8인을 검증하는 연재물인데 그 첫 번째 검증 대상이 바로 고 전 총리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우리가 만난 그날, 그에 대한 검증 기사가 인터넷에 올랐다. 기사 제목이 퍽 인상적이다. ‘당신은 80년 5·18 때 어디 있었나?’(그럼 <조선일보> 당신네는 어디 있었나? 이런 걸 바로 ‘적반하장’이라고 한다.) 이는 고 전 총리가 80년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를 결정하는 비상국무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1주일간 잠적했다는 의혹을 가리켰다. 그는 <조선닷컴> 기사의 제목에 대해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당시 비상국무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곧 군정에 동참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었다. 나는 군정만큼은 동의할 수 없었다. 5·17 때 군정에 반대해 사표를 낸 공직자는 내가 유일하다.” 그런데 왠지 그의 반박은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그는 청와대를 나온 직후 국토개발원 고문(80년)과 교통부(80∼81년)·농수산부(81∼82년)·내무부(87년) 장관, 12대 민정당 국회의원(85∼88년)을 지냈다. ‘피의 광주’를 딛고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에서 그는 정말 잘나갔던 행정관료이자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그가 80년 청와대 정무수석직을 버린 뜻을 무색게 하는 전력들이 아닐 수 없다. 그도 이 대목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이윽고 그의 ‘항변’이 이어졌다. “나는 행정 전문가이지 재야 인사가 아니다. 당시는 군정에서 헌정 체제로 돌아온 시점이었다.” 그나마 솔직한 자기 고백으로 들린다. 하지만 이 역시 당시 시대의 엄중함을 따져볼 때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그를 따라다니는 대표적인 수식어는 ‘행정의 달인’이다. 이를 좀더 비판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는 전형적인 ‘구체제 테크노크라트’다. 그는 ‘변화’를 주도한 적이 거의 없다. 한마디로 ‘안정적 관리형’인 셈이다. 이것이야말로 차기 대권주자로서 그의 최대 약점이다. 한국 사회는 ‘변화’를 자양분으로 발전해왔다. 가장 가깝게는 한국 사회 비주류였던 노 대통령의 당선이 그것을 입증해준다. 그런 국민이 차기 대선에서 구체제 테크노크라트 출신인 고 전 총리의 관리형 리더십을 선택할지는 의문이다.

(사진/ 연합)
폭탄주가 몇 순배 돌자 이날의 화제는 <조선닷컴>의 ‘그가 대통령이 되면 안 되는 이유 10가지’라는 연재물로 옮아갔다. 이것은 유력한 대선 후보 8인을 검증하는 연재물인데 그 첫 번째 검증 대상이 바로 고 전 총리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우리가 만난 그날, 그에 대한 검증 기사가 인터넷에 올랐다. 기사 제목이 퍽 인상적이다. ‘당신은 80년 5·18 때 어디 있었나?’(그럼 <조선일보> 당신네는 어디 있었나? 이런 걸 바로 ‘적반하장’이라고 한다.) 이는 고 전 총리가 80년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를 결정하는 비상국무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1주일간 잠적했다는 의혹을 가리켰다. 그는 <조선닷컴> 기사의 제목에 대해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당시 비상국무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곧 군정에 동참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었다. 나는 군정만큼은 동의할 수 없었다. 5·17 때 군정에 반대해 사표를 낸 공직자는 내가 유일하다.” 그런데 왠지 그의 반박은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그는 청와대를 나온 직후 국토개발원 고문(80년)과 교통부(80∼81년)·농수산부(81∼82년)·내무부(87년) 장관, 12대 민정당 국회의원(85∼88년)을 지냈다. ‘피의 광주’를 딛고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에서 그는 정말 잘나갔던 행정관료이자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그가 80년 청와대 정무수석직을 버린 뜻을 무색게 하는 전력들이 아닐 수 없다. 그도 이 대목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이윽고 그의 ‘항변’이 이어졌다. “나는 행정 전문가이지 재야 인사가 아니다. 당시는 군정에서 헌정 체제로 돌아온 시점이었다.” 그나마 솔직한 자기 고백으로 들린다. 하지만 이 역시 당시 시대의 엄중함을 따져볼 때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그를 따라다니는 대표적인 수식어는 ‘행정의 달인’이다. 이를 좀더 비판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는 전형적인 ‘구체제 테크노크라트’다. 그는 ‘변화’를 주도한 적이 거의 없다. 한마디로 ‘안정적 관리형’인 셈이다. 이것이야말로 차기 대권주자로서 그의 최대 약점이다. 한국 사회는 ‘변화’를 자양분으로 발전해왔다. 가장 가깝게는 한국 사회 비주류였던 노 대통령의 당선이 그것을 입증해준다. 그런 국민이 차기 대선에서 구체제 테크노크라트 출신인 고 전 총리의 관리형 리더십을 선택할지는 의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