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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낮에는 추궁, 밤에는 짝짜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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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0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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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폭언을 했냐” 공방에 의원과 피감기관의 부적절한 관계는 숨어
권위주의적인 술자리 문화 바뀌지 않으면 ‘제2, 제3의 주성영’나온다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얼굴에 서로 침뱉기다. 더 이상 얘기하지 않기로 합의했다.”(9월29일 우윤근 열린우리당 의원)

정치학 원론 벗어난 대구 술자리


“뭐라고 얘기했느냐가 계속 되풀이되면 같은 위원회에서 서로 얼굴 보고 지내기 어렵다. 여야가 얘기하지 않기로 했다.”(〃 김성조 한나라당 의원)

‘대구 술자리 폭언’을 둘러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요란한 정치 공방이 잠잠해졌다. 지난 9월22일 국회 법사위 소속 여야 의원 7명이 대구지검에 대한 국정감사가 끝난 뒤 가진 술자리에서 술집 여주인과 여종업원에게 폭언을 퍼부은 지 꼭 이레 만이다. 여야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원영 열린우리당 의원)을 ‘없었던 일’로 매듭짓자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물론 상대편에 책임을 떠넘기려다 둘 다 손해만 보고 있다는 계산에서 나온 합의다. 이번 일은 과거 수없이 있었던 정치인들의 술자리 ‘해프닝’ 사건에 하나를 더 보태는 것으로 끝나는 분위기다.

대구 술자리 폭언 논란에 휩싸인 주성영 한나라당 의원이 9월25일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는 "진실이 조작됐다"며 자신은 "야, XX"라고만 했을 뿐, 폭언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사진/ 연합)

하지만 사건을 적당히 넘기기엔 너무나 많은 정치 풍토의 문제가 드러났다. 술자리에서부터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정치권의 그늘진 문화의 단편들을 보여주고 있다. ‘누가 폭언을 했느냐’는 진실 공방에 가려, 국회의원과 피감기관의 부적절한 관계, 자정능력 상실, 권위주의 술문화라는 본질적 문제들은 거의 비춰지지 않았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면, “제2, 제3의 주성영 의원은 언제든지 다시 나올 수 있을 것”(열린우리당 보좌관)이다.

술자리가 벌어진 것이 문제의 근원이다. 삼권이 분리된 나라에서 의회는 행정부를 견제·감시하는 게 주된 임무다. 국회가 해마다 9월 정기국회를 통해 행정부의 1년 살림살이를 국정감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는 감사를 하는 국회와 감사를 받는 피감기관은 긴장관계를 유지하기 마련이다. 문제가 된 대구 술자리는 이러한 정치학 원론에도 벗어나 있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의원들이 낮에 얼굴을 붉히면서 추궁하던 대구지검의 간부들과 밤에 다시 조용한 곳에서 술을 마시며 회포를 푼다는 것은 보통사람의 상식에 비춰도 좀 꺼림칙하다”고 말했다.

비단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법사위 위원의 한 보좌관은 “피감기관의 입장에서는 저녁만 먹고 끝내면 대접이 부족한 게 아닌가 생각하고, 국회의원 입장에서는 술자리가 정성의 표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국정감사가 끝나면 거의 모든 피감기관과 의원들이 술자리를 갖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특히, 국정감사가 하룻밤을 묵어야 하는 지방에서 열릴 경우 더욱 그렇다. 지난 2003년 국회 행자위 소속 의원 보좌관 등이 국감이 있기 전날 제주도의 행정부지사 등과 함께 술을 마셔 논란이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에 주성영 의원이 해명자료에서 “의원들과 학연, 지연, 근무 인연 등으로 가까운 검찰 간부 4~5명과 합석했을 뿐”이라고 밝힌 것처럼, 피감기관 간부와 사적인 관계로 술자리로 하는 것도 문제다. 지난 2001년 국회 정무위 소속 의원 2명이 평소 친분이 있던 피감기관인 공정거래위 고위 간부와 국정감사 정회 중에 술을 마시다 회의에 끝까지 참석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김태환, 곽성문 의원(왼쪽부터)도 술자리의 폭언과 폭행으로 잇따라 곤욕을 치렀다. 주성영 의원처럼 이들도 대구·경북 출신이고 박근혜 대표의 술을 대신 마셔주겠다는 '흑기사 모임'의 회원이다.

열린우리당 의원의 말도 신뢰 못 얻어

대구 술자리 폭언을 놓고 정치권의 사태를 풀어가는 자세와 방식이 불신을 키운 측면이 크다. 술자리에 동석한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처음에 “주성영 의원이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고 입을 맞췄다. 주 의원과 검사가 진실게임을 벌이는 상황에서 동료 의원을 편든 것이다. 그러나 야합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나라당은 이번 사건에 10월 재·보궐 선거 지역 중 하나인 대구 동을에서 여당이 승리하기 위한 정치적 음모가 깔려 있다는 다소 ‘황당한’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자 사건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고전적인 입씨름을 답습하기 시작했다. 열린우리당은 주성영 의원을 국회 윤리특위에 제소하기로 했다. 또 술자리에 동석한 의원들은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주성영 의원이 술집 여사장과 종업원에게 욕설과 폭언을 한 것은 사실이라고 뒤늦게 태도를 바꿨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증언은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동료 의원을 감싸다 갑자기 공격하는 듯한 태도로 바뀐 탓인지 큰 신뢰를 얻지 못했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은 ‘부적절한 술자리’에 참석했던 소속 의원에게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았다. 피감기관과의 술자리 문화가 관행이 되다시피 한 정치 현실에서 누구도 돌을 던질 자격이 없는 탓이 컸다. 그래서 제대로 된 반성도 하기 힘들었다. 정치권은 공방을 벌이는 양쪽 당사자와 국민이 모두 납득할 수 있는 객관적 진상조사나 그에 따르는 책임을 묻는 일을 굳이 택하지 않았다.

주성영 의원은 국회 '폭소클럽'(폭탄주 소탕 클럽) 회원이다. 폭소클럽이 떴다는 것 자체가 정치인들의 폭탄주 문화의 '위기'를 역설한다. (사진/ 연합)

권위주의 술문화의 잔영이 이번 사건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고위 공직자들이 폭탄주를 돌려 마시면서 술을 파는 여사장과 여종업한테 입에 담기 험한 말을 한 것은 술 파는 사람들을 함부로 봤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지난해 9월 한나라당 김태환 의원이 경기도 용인의 한 골프장에서 술을 마시다 60대 경비원을 폭행한 것도 국회의원의 비뚤어진 권위의식의 발산이다. 지난 6월 대구 지역 상공인들과 골프 회동 뒤 가진 술자리에서 야당 의원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맥주병을 던진 곽성문 의원도 비슷한 경우다. 국회의원을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는다는 불만이 사건들의 공통된 원인이다.

"폭탄주를 안 마시고 어찌 정치를 하나"

김경빈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기본적으로 (술) 문화의 문제라기보다 개인의 삶의 태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지만, 국회의원은 아무래도 수습할 배경이 있고 우대를 받는 위치에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에 좀더 조심하지 않고 함부로 할 가능성은 있다”고 분석했다.

우리의 문화가 그렇지만 술자리가 정치의 중요한 수단이 되는 것도 이번과 같은 사건이 언제든지 재발할 가능성을 높게 하고 있다. 김재윤 열린우리당 의원은 국회에 들어오기 전에 한 정치인에게 “김형, 자네는 정치인이 못 되겠어. 어떻게 정치인이 폭탄주를 안 마시면서 정치를 하나”라는 핀잔을 들었다. 그 정치인이 꼽은 정치인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자질은 술을 잘 마시는 것이었다고 한다. 실제 한나라당의 한 중진 의원은 “나는 지역구에서 막걸리를 들고 다니며 정치했다”고 주위에 말할 정도다. 그래서 국회의원들 사이에 술, 특히 폭탄주를 잘 마시는 것은 일종의 영웅담으로 회자된다.

대구 술자리 폭언은 결코 우연히 터진 일이 아니다. 정치 문화의 응축된 모순은 언제고 다시 터져나올 준비가 돼 있었던 것이다.


남성연대의 술판을 깨뜨려라

대구 사건, 여성에게 열등감을 안겨주는 술문화 바뀌는 계기로

‘대구 술자리 폭언’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바로 여성 의원들이다. 여성 의원들은 이번 기회에 남성중심적인 술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거북스러운 폭탄주를 반강제적으로 돌리고, 여종업원이 시중을 들고, 성적 농담이 오가는 자리가 여성 의원들에게 결코 편할 리가 없다.

김희정 한나라당 의원은 “룸살롱 등 폐쇄된 공간에서 남성들이 폭탄주를 마시면서 여자들의 몸을 만지거나 하는 것은 남성연대의 상징 아니냐”고 말했다.

문제가 된 대구 술자리에 여성 의원은 없었다. 국회 법사위에 유일한 여성인 이은영 열린우리당 의원은 술자리에 빠졌다. 이 의원은 “국회 음주문화, 특히 폭탄주는 남성중심적이다. 폭탄주를 마시지 못하면 ‘흑기사’를 불러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여성으로서 열등감을 느끼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남성 의원들은 술집에서 여성 의원들이 있을 경우, 각별히 말과 행동에 신경을 쓴다. 고진화 한나라당 의원은 “소속 상임위에 여성 의원이 다섯명이나 돼 많이 의식하게 된다. 자리가 길어지면 다들 불편해하기 때문에 옛날처럼 그렇게 늦게까지 마시는 일은 흔치 않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에서는 박근혜 대표 체제가 들어서면서 과거에 비해 대표가 주도하는 술자리가 크게 줄어들었다고 한다. 17대 국회 들어 여성 의원들이 많이 늘면서 술자리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여성 의원이 빠진 술자리에서 여전히 남성연대를 과시하는 술판이 벌어진다는 게 여성 의원들의 지적이다. 여성 의원들이 일부러 자리를 피해주는 경우도 있다. 이은영 의원은 “남성중심적 술문화에 내가 불편한 정도가 아니면 가급적 맞추려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분위기를 깨선 안 된다는 무언의 압박도 크다.



법정으로 넘어간 술자리의 진실

가해자가 피해자로 흐르는 분위기 연출됐던 ‘말 바꾸기’ 만화경

대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대구 술자리 폭언’의 진실 공방은 과연 주성영 의원이 어느 정도까지 폭언을 했느냐에 모아진다. 애초 술집 여사장은 주 의원이 여종업원에게 성적 폭언을 했다고 증언했다. <오마이뉴스> 등 언론은 여사장의 말에 의존해 초기 상황을 보도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주성영 의원이 성적 폭언을 하지 않았다고 감싸고 돌았다. 여기에 여사장의 말이 바뀌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대구지검의 고위간부가 성적 폭언을 한 것으로 검찰 조사에서 밝혀지면서, ‘가해자’로 몰렸던 주 의원이 모든 책임에서 벗어나 ‘피해자’로 흐르는 분위기가 연출됐다. 주 의원은 술집 여성들을 향해 “XX, 준비하라고 했더니 예약도 안 돼 있어”라고 말한 부분을 인정했을 뿐이다. 검찰은 주 의원이 성적 폭언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아, 여운을 남겼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변수가 생겼다. 술자리에 있었던 열린우리당의 선병렬, 이원영, 정성호, 최용규 의원이 9월28일 공동 간담회를 열어 주 의원이 한 폭언을 적나라하게 공개한 것이다. 이들은 주 의원이 여주인에게 “XXX” “이 XXX들아 똑바로 못해”라고 성적 폭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하루 만인 29일 저녁 여야 의원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주성영 의원이 검찰에 <오마이뉴스>와 술집 여사장 등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기 때문에, 법적인 진실 공방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다. 또 국회에서도 열린우리당이 주 의원을 윤리위에 제소한 만큼, 주 의원이 성적 폭언을 했는지 여부를 조사할 전망이다. 주 의원이 술자리에서 성적 폭언을 했는지 당사자들의 말이 다 달라 아직 쉽게 속단할 순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 의원도 인정한 것처럼 술집 여성들에게 그가 폭언을 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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