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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세치 혀’의 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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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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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의겸 기자/ 한겨레 정치부kyummy@hani.co.kr

고려시대 때 소손녕이 몰고 온 거란의 80만 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서희의 외교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발해 유민들의 처절한 투혼과 거란군의 뒷덜미를 덮치려는 송나라 군대의 움직임이 소손녕의 오금을 저리게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국제 정세를 냉철하게 파악하고 고려의 이익을 관철해낸 서희의 ‘세치 혀’가 없었더라면, 고려가 거란군의 말발굽에 짓이겨지지 않았으리라는 보장 또한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 청와대의 몇몇 수석·보좌관들과 가볍게 만난 자리에서, 6월11일 한-미 정상회담의 뒷얘기를 전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말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바싹 졸았다”고 털어놓았다. 노 대통령이 신경을 곤두세운 대목 중 하나는 북한의 인권 문제였다. 부시 대통령이 먼저 이 말을 꺼내면 회담이 꼬일 판이었다. 선수를 친 것은 노 대통령이다. 노 대통령은 “세계 여러 나라를 살펴보면, 미국과 사이가 좋은 나라는 다 인권에 문제가 없는데, 사이가 안 좋은 나라들의 인권에 문제가 있다. 북한의 인권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문제가 있을지 모르나, 미국과 수교를 맺고 사이가 좋아지면 인권도 향상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북한의 인권 문제를 에둘러가기 위해, 미국을 치켜세운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이어 “지난번에 ‘미스터 김정일’이라고 불러주었는데, 그게 북한의 태도 변화를 불러오는 데 참 효과가 컸다”고도 했다. 부시 대통령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흡족해한 것은 물론이다.

노 대통령은 이어 “중국이나 일본은 역사적으로 한국을 수백번 침략한 나라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뼈아픈 과거사를 잊겠느냐”며 한·중·일 세 나라의 역사를 설명했다. 한국이 중국쪽으로 기우는 것이 아니냐는 미국의 우려와,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바라는 미국의 희망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답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며 즉석에서 보좌진들에게 “앞으로 외교정책에 참고하라”고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노 대통령의 성과를 이어받은 것은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었다.

측근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정 장관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한-미 정상회담 내용을 들려주며 “부시 대통령도 김 위원장을 나쁘게만 생각하지 않는다”고 은근히 떠보았다고 한다. 그랬더니 김 위원장이 기대 이상으로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부시 대통령 각하’라고 할까요?”라고 반문하면서, “부시 각하에 대해 나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라고 화답했다.

정 장관의 말솜씨가 제대로 효과를 본 것은 7월2일 딕 체니 미국 부통령을 만났을 때다. 정 장관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미국과 우방이 되고 싶다’는 뜻을 여러 차례 되풀이해 강조했다”고 전했다. 이에 체니 부통령은 “아니, 정 장관은 김 위원장의 그런 말을 믿습니까”라고 노골적인 불신을 드러냈다. 이에 정 장관은 굽히지 않고 “사람은 변화하는 생물이라 김 위원장을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김 위원장이 꺼낸 말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현실화하는 것이다”라고 ‘명답’을 내놓았다. 미국 ‘네오콘’의 수장 격인 체니 부통령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침묵했다고 한다. 얼마 전 공개된 미국 사설 정보지 ‘넬슨 리포트’의 특별보고서는 워싱턴의 한 외교 소식통을 인용해 “솔직히 체니 부통령의 대북 강경 기조를 설득하려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일 수 있다”고 평가했다. 그 뻣뻣함을 녹인 것도 역시 ‘세치 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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