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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무서운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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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5-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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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사진/ 한겨레 이종찬 기자)

“어~ 정말이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문화방송 드라마 <제5공화국>을 보다가 손으로 무릎을 탁 쳤다. ‘10·26’이 묘사되는 장면의 한 자락에서 귀가 쫑긋해졌다. “지금 전방의 상태는 괜찮습니까?” 드라마 속 박근혜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박근혜가 1979년 10월27일 새벽 1시 김계원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한테서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을 듣고서 보인 첫 반응이자, 반문이었다. 이 ‘명대사’(?)는 박근혜 홈페이지 <나의 걸어온 길>에도 자세히 올라 있다. 하지만 들을 때마다 다시 되새김질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 아버지의 죽음을 접한 딸의 반응치고는 너무 ‘차가운’ 게 아닐까? 아니, ‘무섭’기까지 하다.

박근혜 어법은 가끔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나 아픈 곳을 쑤실 때면 특유의 ‘반문어법’으로 상대방의 말문을 틀어막는다. 지난 2월 충북 제천에서 의원연찬회가 열렸을 때다. 박근혜의 의지와 달리, 당명 개정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는 신경이 곤두설 대로 곤두선 상태였다. 그는 이날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기자가 질문을 던지자, “내가 자동응답기입니까?!”라고 쏘아붙였다. 기자가 천연덕스럽게 “기자는 자동질문기입니다”라고 받아넘겼지만, 박근혜는 입을 다문 채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 지난해 4월9일 생방송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손석희는 박근혜에게 ‘난처한’ 질문을 연방 퍼부었다. 그러자 박근혜가 “지금 저하고 싸우시자는 겁니까?!”라고 받아쳤다. 정혜신은 <사람vs사람>에서 박근혜가 “엄청난 절제력”을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그의 분석과 달리 예외가 없지는 않다. 절제력을 비집고 나온 박근혜 어투는 얼음장처럼 차갑기도 하다.


박근혜는 또 직선적이다. 갖은 수사를 써가며 말을 뱅뱅 돌리는 정치인들과 다르다. 노무현과 닮은꼴이다. 다만, 비유나 은유를 섞지 않는 점에서 노무현과 다르다. 어휘도 그리 풍부하지 않다. ‘수첩공주’ ‘100단어 공주’설이 퍼지는 것도 이 같은 투박함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듣기 지루하지만 메시지는 분명하다.

박근혜는 지난해 8월 의원연찬회에서 이재오 의원 등 비주류가 자신을 압박하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역사에 죄가 많은 대통령이라고 생각하면, 왜 지난 선거(총선) 때 도와달라고 했느냐. 치사하고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대놓고 말했다. 회의장에 있던 100여명의 의원들은 어리둥절했다. 김문수 의원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회의장을 나왔다. 그는 “무섭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이재오 의원은 이날 저녁 노래방에서 “떠날 때는 말 없이…”를 구슬프게 내뺐다. 올 초 행정도시건설법의 통과 뒤 박세일 의원 등 몇몇 의원이 당론을 바꾸지 않으면 의원직을 버리겠다고 하자, 박근혜가 “의원직 사퇴 의사를 밝혔다면 그렇게 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박세일 의원은 지난 3월 의원직을 잃었다. 박근혜는 갈등이 불거졌을 때 분명한 말로 메시지를 보내, 내 편과 네 편을 확실히 가른다. 내 편이 아닌 경우 굳이 끌어안기보다 확실히 ‘아웃’시킨다. 그래서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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