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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형, 나 박성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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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5-1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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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서 사법 연수 중인 독일 입양아 마르첼 빔멜… 한국인이라는 우울증에서 벗어나 ‘자랑스러움’을 배우다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시골에서 올라온 청년 아닐까?”
구릿빛 얼굴에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닌 마르첼 빔멜(Marcel Wimmel·31)은 딱 한국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단정하게 양복을 걸쳤지만 머리 모양새나 옷차림새가 그리 세련돼 보이지 않았다. “Ich freue mich, Sie kennen zu lernen.”(만나서 반갑습니다). 인사를 받는 순간 그가 독일인이라는 것을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모국어를 잊어버린 한국인 입양아였다.

한동안 한국인들을 만나지 않아


빔멜은 지난 4월28일 대한민국 국회에 ‘사법연수’를 왔다. 고아원에 버려진 그가 1980년 고무신을 신고 독일로 입양된 지 25년 만이다. 여섯살배기 입양아에게 모국에 대한 기억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입양될 당시 기록된 나이와 이름, 고향이 그의 기억, 아니 기록의 전부였다. 기억이 없는 것은 그가 잊고 싶어한 탓인지 모른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느낌이 들었을 때 우울해졌다. 그래서 그때마다 다른 것을 생각하려고 했다.” ‘제2의 고향’인 카셀에서 한국인 입양아를 둔 가족끼리 2, 3개월마다 한번씩 모임이 있었지만, 한번도 나가지 않았다. 한국에서 났다는 사실을, 털어내야 할 아픈 기억처럼 피해다녔다. “독일에서 외국인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주변의 다른 친구들처럼 살고 싶었다.” 독일인이 되어야 했던 그는 한국인들을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빔멜은 ‘뿌리’를 자를 수도 지울 수도 없었다. 대학에 다니면서 ‘내가 어디에서 왔지?’를 끊임없이 되물었다. 이즈음 한국 유학생들을 자연스럽게 사귀게 됐다. 마침내 그는 한국을 한번 방문해보라는 주위의 계속된 권유에 못 이겨, 2003년 4월 한국 땅을 처음 밟게 된다. “한국에 가기 싫다고 말했지만, 속마음은 정말로 한국에 가고 싶었던 것 같다.” 인천공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내다본 바깥 풍경은 편안하게 와닿았다. 그리고 그해 어머니와 친형제, 친척들을 만났다. 고향인 진주도 다녀왔다. 아픈 어머니를 만난 날 그는 많이 울었다.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울컥 밀려왔다. 잊어버린 가족을 만난 그날 그는 세월을 뛰어넘는 끈끈한 가족애를 느꼈다고 한다.

빔멜이 올해 다시 한국을 찾은 것은 ‘우연’이다. 그는 2002년 1차 변호사 자격 시험을 통과한 뒤 괴팅겐대 법대를 졸업했다. 이후 2년 동안의 사법연수 과정의 하나로 지난해 터키 앙카라 독일대사관에서 근무했다. 이때 한독의원협회 회장인 하르트무트 코식 연방국회의원을 만났다. 남북 관계에도 관심이 많은 코식 의원은 그에게 대한민국 국회에서 연수를 받아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그는 주한 독일대사관과 친분이 있던 이성권 한나라당 의원의 수락으로 국회에 들어와 연수를 받게 됐다. 매일 국회 의원회관으로 출근해 동아시아나 한국과 관련된 독일의 동향, 의원의 의정활동을 위해 필요한 자료를 찾는 일을 한다. 그는 한반도의 통일을 향한 이제까지의 과정과 노력에도 관심이 많다고 했다. 분단된 나라에서 분단된 나라로 입양된 그는 그곳에서 통일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한국헌법엔 왜 ‘인권’이 11조에서야 있는가”

그에게 반도의 북쪽은 낯설지만 아주 강한 인상으로 자리잡았다. 처음 북한을 접한 것은 북한을 다녀온 다른 독일인 관광객의 사진을 통해서다. 메마른 땅에서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이 떼지어 풀뿌리를 캐고 있는 풍경이었다. “어릴 때 입양을 갔기 때문인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들이 배고픔에 시달려야 된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면 너무나 슬프다.” 그리고 기자가 ‘통일’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묻자 “하나였던 나라가 분단됐다가 다시 합쳐지는 것은 ‘재통일’이 맞는 표현이다. 통일과 재통일은 큰 차이가 있다”고 고쳐줬다.

의원회관에서 자료를 보는 박성관씨. 분단된 나라에서 분단된 나라로 입양된 그는 두 나라의 차이와 공통점에 민감하다.

법률전문가인 그에게 한국의 헌법도 흥미롭게 보였다. ‘인권’이 첫 조항에 명시돼 있는 독일 헌법과 달리, 한국 헌법에는 11조에 가서야 ‘인간의 존엄성’이 나온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의 헌법 제정 당시 비민주적이었냐?”라고 물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모국인 한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느냐?”라는 식상한 질문도 가볍게 지나치지 않았다. “처음에 그런 질문을 듣고 굉장히 위험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독일 시민으로서 독일 역사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독일에서는 2차대전의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나라에 대해) 자랑스럽다는 개념을 거의 쓰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제 한국이 수많은 외부 침략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낸 역사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그에게 보통의 한국 사람과 똑같은 정서도 엿보인다. “독일에서 컴퓨터를 사게 되면 소니를 살지 LG를 살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겠다. 가격이 더 비싸도 LG를 사겠다. 그게 아마 내가 태어난 나라에 대한 결속력 같은 것이 아니겠나?” 독일에서 삼성 휴대전화를 갖고 싶다고 친구들이 얘기할 때면, ‘내가 바로 그 나라에서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자신을 한국 이름 ‘박성관’으로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사람들이 한국말로 내 이름을 부를 때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느낄 수 있다. 한국 사람과는 한국적 관계를 맺고 싶다.” 한국인이 자신의 독일 이름을 부르면 오히려 차갑고 거리가 생겨서 싫다고 한다. 그는 기자의 나이를 확인한 뒤 어디서 배웠는지 대뜸 ‘형!’이라고 불렀다.

박성관씨는 오는 8월 한살 연상인 한국인 여자친구와 결혼한다. 그리고 10~11월 연수가 끝나면 독일로 떠날 예정이다. 성관씨는 앞으로 한·독 두 나라의 국제 정치·경제 관계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다.


다국적 공간, 의원회관 206호실

국회 의원회관 206호실에서는 영어, 독일어, 일본어, 중국어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이곳, 이성권 의원실에서는 현재 마르첼 빔멜(31·박성관) 외에도 미국인 조단 도버(27)가 있다. 조단 도버는 지난해 10월부터 외국인 인턴 보좌진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대학을 다니면서 주당 이틀 동안 근무를 한다. 이 의원은 순전히 자비로 조단 도버에게 매달 50만원씩을 지급한다. 자발적 연수자인 박성관씨에게 따로 급여를 주지는 않는다. 일본인 나카후지 히로히코(42)와 중국인 최영순(27)씨는 지난 3월까지 인턴 보좌진으로 일했다. 이 의원은 필요할 경우 이들에게 수시로 연락해 도움을 받는다. 외국인 인턴들은 주로 자신의 나라에서 발행되는 현지 신문의 스크랩과 자료 확보 등의 일을 하며, 의원에게 주요 현안을 직접 브리핑하기도 한다.

국회 통일외교통상위 소속인 이 의원은 “해외 현지 정보를 얻는 데 외통부를 거치기보다 아무래도 현지인 감각을 통해서 얻는 게 더 낫다. 또 의정활동의 한 부분인 외교 분야에서 직접 사람들을 대할 때 언어가 중요한 만큼, 이들을 통해서 다른 나라의 말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박형준 한나라당 의원도 오는 6월부터 외국인 인턴 6~7명을 국회로 데려올 계획이다. 박 의원은 이미 고대 국제대학원과 사회학과와 협의를 마쳤다. 같은 당의 정병국 의원도 동참할 예정이다. 박형준 의원실의 박경은 보좌관은 “외국인들의 전공과 관심 분야를 살려 의원들의 정책 보좌를 하도록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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