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구 교수의 ‘유시민 옹호론’을 반박한다… 대통령 무조건 감싸는 ‘도덕적 해이’는 어떻게 볼 것인가
▣ 함돈균/ 고려대 국문과 박사과정
꽤 오랫동안 망설이던 글을 이제야 투고하면서도 마음이 썩 편치 않은 까닭은 이 글이 내가 ‘한때’ 기대를 걸었고, 지금도 여전히 애증을 버릴 수 없는 한 사람에 관한 ‘비판적’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글은 <한겨레21> 10년 고정 독자로서 이 잡지에서 내가 가장 신뢰하는 한 필자의 글에 대한 반박문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한홍구의 당파성은 편협하다 ‘유시민처럼 철들지 맙시다’라는 제목의 <한겨레21> 554호(2005년 4월12일) ‘한홍구의 역사이야기’는 몇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 한홍구 교수는 이 글에서 과거사를 자기 일처럼 다루는 예의 탁월한 솜씨로 자신의 동기였던 ‘유시민’에 대한 과거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회고하면서, 현재 한국 정당정치의 핵심적 논란이 되고 있는 그를 따뜻하게 감싸안고 있다. 한 교수 글의 논지는 ‘유시민에 대한 현재 386 의원들의 악의에 찬 비난은 마치 소수파로서 민주당 경선을 전투적으로 치르며 겪었던 노무현의 수난’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현실정치에서 다 늙어버린 당내 인사- 그러나 ‘실세’- 중에는 지지세력이 없고, 인터넷 같은 ‘실체 없는’ 공간 속에서나 열렬히 지지를 받으며, 기존의 관례를 깨는 파격적 ‘가벼움’으로 좌충우돌하는 그의 언행이 너무 빨리 ‘철이 들어버린’ 386 의원들에게 아니꼬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이는 과거 노무현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러고서 그는 386 의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유시민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의 반의 반만큼이라도 수구에게 날을 세워 싸워봤느냐고.” 한 교수의 이런 지적은 그 자체로는 틀린 게 없다. 그러나 한국 정치 지형의 전체적 맥락에서 보면 그가 이런 방식으로 유시민을 ‘인간적으로 옹호’만 하고 글을 끝맺는 것은 옳지 못한 당파성을 보여준다. 그 당파성이 포괄하는 범위와 지향성이 너무 편협하다는 뜻이다. 한 교수는 이 글에서 유시민이라는 한 ‘개인’이 겪은 과거 독재 시절의 수난사를 장황하게 이야기하면서, 그가 현재 당내에서 겪고 있는 ‘싸움’의 모습을 은연중에 독재와 맞서 싸우던 과거 순교자의 이미지와 겹치게 하는 논법을 구사한다. 그러나 그는 ‘개인’ 유시민의 과거만 이야기할 뿐, 정작 ‘국회의원’이 된 뒤 유시민의 구체적 ‘실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유시민의 싸움이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향한 것인가라는 근본 질문은 생략되어 있다. 노무현 정부 출범 2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다양한 우려들이 있다. 우리는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같은 수구언론의 입장과는 반대편에서 제기된 시민사회와 진보진영의 충분히 ‘이유 있는’ 지적들에 대해 노무현 정부가 그동안 어떤 방식으로 대응했으며, 이 때문에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을 지지했던 사람들에게 이 정부가 어떠한 상처를 입혔는지, 결국 이 정부가 그들을 어떻게 자신의 비토 세력으로 만드는 우를 범했는지를 기억하고 있다. 최장집 교수는 최근에 나온 일련의 책과 수차례의 신문 기고문 등을 통해서 노무현 정부 출범 당시 그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냈던 사람들이 사회적 공공성의 좌초와 노동의 위기, 정치의 시장 지배력 상실이라는 현재 상황 속에서 어떠한 좌절감과 배신감을 겪고 있는지를 지적하며, 한국 민주주의가 현재 근본적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음을 역설한 바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필자는 ‘국회의원’ 유시민이 그동안 보여온 실천 방식들에 상당한 책임이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그리고 이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현재 한국 시민사회가 겪고 있는 ‘배신감’과 일맥상통한다.
개혁당 창당 뒤 보인 실망스런 행보
‘노무현당’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며 2002년 개혁당을 만들고, 2003년 개혁당 후보로 나서 일산에서 당선되던 당시 유시민의 행보는, 노무현이 2002년 민주당 경선 과정을 거쳐 대권 후보가 되고, 마침내 2003년 대통령에 취임하던 흐름과 거의 같이 진행되고 있었다. 말하자면 국회의원 유시민의 탄생은 대통령 노무현의 탄생과 쌍둥이다. 노무현에 대한 당시 유시민의 지지는 노무현이 소수파로서 한국 사회의 보수적 주류들에게 ‘이유 없는’ 흔들기를 당하고 있었으며, 그에게 개혁을 열망하는 한국 시민사회가 많은 기대를 보내고 있었다는 점에서 시대사적 정당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출범 1년이 지나는 과정에서 상황은 달라졌다. 이라크 파병, 새만금 간척사업, 부안 핵폐기물 처리장,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사업 등의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 이슈들은 각각 평화와 자주외교, 환경, 인권, 절차적 민주주의 등 매우 근본적인 문제들을 함의하고 있고, 따라서 정권의 시금석이 될 만한 사안들이었다. 노무현 정부가 이 사안들을 어떤 방식으로 처리했으며, 그 과정에서 그의 지지자들이 어떤 배신감을 느꼈는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이 과정에서 유시민에게 우리가 바랐던 것, 곧 그의 역할은 이제와는 어쩌면 정반대의 자리에 있는 것이어야 했다.
그는 앞서 언급한 일련의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대응에서 노무현 정부가 지지자들과 시민사회의 열망을 배반할 때, 쓰디쓴 소금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처럼 ‘노무현 사수’를 외치며 노무현 정부의 이데올로그를 자처했고, 그 결과로 그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노사모와 기존의 개혁당 조직을 흡수해 자신의 ‘계보’를 형성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 사회적 사안들에 대해 그는 단 한번도 현 정부에 대해 정직한 비판과 고뇌 어린 충고를 해본 적이 없으며,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식의 교묘한 현실론만을 반복했다. 2003년 11월에 <한겨레>에서 주최한 참여연대 김기식 사무총장과의 1대1 논쟁을 보며, 나는 어떠한 자기 반성도 없고, 자신과 현 정부를 지지해준 사람들에게 일말의 미안함도 없이 철저한 현실론으로 노무현 대통령만을 감싸고 도는 유시민의 어법에 기가 막혔다.
불교에는 ‘방편’이라는 말이 있다. 삶의 모든 것은 구도를 향해 가는 ‘방편’이자 건너가는 돌다리일 뿐, 그 자체의 실체는 없다는 말이다. ‘노무현’은 우리 모두가 더 나은 가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선택한 돌다리일 뿐, 그 자체로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다. 명민한 유시민은 왜 이런 방식으로 노무현의 이데올로그를 자처하는 길을 걷고 있는가. 이때의 논쟁에서 유시민은 매우 중요한 사안들에 대한 현 정부의 대응 방식을 비판하는 김기식 사무총장에게 “대통령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타이르기까지 했다. 그가 경제학을 전공했으니 잘 알겠지만, 이런 식의 어법은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다. 경제학에서 ‘도덕적 해이’는 대행자(agency)가 의뢰인의 요구를 묵살하고, 자기 멋대로 돈을 유용하고 사업을 벌여나가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이런 식의 ‘영악한’ 이데올로그가 되라고 그를 국회에 보내지 않았다. 그의 선거 때 난 정치에 문외한인 이웃들에게까지 성금을 모아 돈을 보냈는데, 그의 이런 식의 언행은 우리들에게 너무 염치없는 일이 아닌가.
한홍구 교수는 그가 ‘철이 안 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에 대한 왜곡이다. 내가 보기에 유시민은 너무 영리하고 그래서 너무 노회하다. 아직 사십대인 그의 정치 행보는 어정쩡하게 늙어버린 386보다 ‘정치 9단급’에 가 있기 때문에 ‘철이 덜 든 것’으로 보일 뿐이다. 그의 정치적 행보는 프로이트식으로 말한다면 이미 ‘쾌락원칙’이 아니라 철저한 ‘현실원칙’에 입각해 있으며, 상상력이 발동하는 자유로운 율동성이 아니라, 마키아벨리적 기술공학의 논리에 침윤되어 있다.
정치9단, 유시민은 답하라
소설가 최인훈은 <서유기>에서 “어떠한 현실정파에도 가입하지 않기. 가장 진보적인 정파의 가장 진보적인 순간만을 가장 짧게만 지지하기”라고 말한 바 있다. 정치를 예술화하려는 최인훈의 이러한 꿈은 정치의 장에서 어차피 실현될 수 없는 유토피아 같은 이야기지만, 순간순간의 중요한 계기 속에서 삶과 정치를 예술화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오지도 않을 미래로 삶을 기만하며 현재의 삶을 수단화하려는 기술공학적 논리가 정치의 장을 뒤덮을 때, 인간의 현실은 지옥이 될 것이다.
과연 유시민의 행보는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언변의 달인’ 유시민은 이 글의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라.

한홍구의 당파성은 편협하다 ‘유시민처럼 철들지 맙시다’라는 제목의 <한겨레21> 554호(2005년 4월12일) ‘한홍구의 역사이야기’는 몇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 한홍구 교수는 이 글에서 과거사를 자기 일처럼 다루는 예의 탁월한 솜씨로 자신의 동기였던 ‘유시민’에 대한 과거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회고하면서, 현재 한국 정당정치의 핵심적 논란이 되고 있는 그를 따뜻하게 감싸안고 있다. 한 교수 글의 논지는 ‘유시민에 대한 현재 386 의원들의 악의에 찬 비난은 마치 소수파로서 민주당 경선을 전투적으로 치르며 겪었던 노무현의 수난’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현실정치에서 다 늙어버린 당내 인사- 그러나 ‘실세’- 중에는 지지세력이 없고, 인터넷 같은 ‘실체 없는’ 공간 속에서나 열렬히 지지를 받으며, 기존의 관례를 깨는 파격적 ‘가벼움’으로 좌충우돌하는 그의 언행이 너무 빨리 ‘철이 들어버린’ 386 의원들에게 아니꼬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이는 과거 노무현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러고서 그는 386 의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유시민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의 반의 반만큼이라도 수구에게 날을 세워 싸워봤느냐고.” 한 교수의 이런 지적은 그 자체로는 틀린 게 없다. 그러나 한국 정치 지형의 전체적 맥락에서 보면 그가 이런 방식으로 유시민을 ‘인간적으로 옹호’만 하고 글을 끝맺는 것은 옳지 못한 당파성을 보여준다. 그 당파성이 포괄하는 범위와 지향성이 너무 편협하다는 뜻이다. 한 교수는 이 글에서 유시민이라는 한 ‘개인’이 겪은 과거 독재 시절의 수난사를 장황하게 이야기하면서, 그가 현재 당내에서 겪고 있는 ‘싸움’의 모습을 은연중에 독재와 맞서 싸우던 과거 순교자의 이미지와 겹치게 하는 논법을 구사한다. 그러나 그는 ‘개인’ 유시민의 과거만 이야기할 뿐, 정작 ‘국회의원’이 된 뒤 유시민의 구체적 ‘실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유시민의 싸움이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향한 것인가라는 근본 질문은 생략되어 있다. 노무현 정부 출범 2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다양한 우려들이 있다. 우리는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같은 수구언론의 입장과는 반대편에서 제기된 시민사회와 진보진영의 충분히 ‘이유 있는’ 지적들에 대해 노무현 정부가 그동안 어떤 방식으로 대응했으며, 이 때문에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을 지지했던 사람들에게 이 정부가 어떠한 상처를 입혔는지, 결국 이 정부가 그들을 어떻게 자신의 비토 세력으로 만드는 우를 범했는지를 기억하고 있다. 최장집 교수는 최근에 나온 일련의 책과 수차례의 신문 기고문 등을 통해서 노무현 정부 출범 당시 그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냈던 사람들이 사회적 공공성의 좌초와 노동의 위기, 정치의 시장 지배력 상실이라는 현재 상황 속에서 어떠한 좌절감과 배신감을 겪고 있는지를 지적하며, 한국 민주주의가 현재 근본적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음을 역설한 바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필자는 ‘국회의원’ 유시민이 그동안 보여온 실천 방식들에 상당한 책임이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그리고 이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현재 한국 시민사회가 겪고 있는 ‘배신감’과 일맥상통한다.

2003년 11월 <한겨레>에서 주최한 참여연대 김기식 사무총장과의 1대1 논쟁에서 유시민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너무 과도한 기대를 하지 마세요" 라고 말한 바 있다. (사진/ 한겨레 김종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