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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밥그릇 싸움, 숟갈 들고 덤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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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2-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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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구 예산 따내기 경쟁하다 끝난 국회 예결위… 정쟁과 지역감정 자극 지루한 공방

(사진/2002년 새해 예산안에 대한 부별심사가 진행중인 국회 예결위장. 국무위원들이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국민 혈세의 올바른 쓰임새를 심사해 궁극적으로 납세자의 세부담을 경감시켜줘야 할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위원장 장재식·민주당)가 올해도 “정쟁과 사욕만 판친다”는 오명을 벗지 못했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정기국회 회기가 끝날 때까지도 새해 예산안을 처리하지 못한 예결위’라는 불명예를 떠안은데다, 그나마 열린 예산 심사조차 정쟁과 밥그릇 싸움으로 허비한 때문이다. 정부제출 예산안의 효율성을 따져 재편성 및 삭감을 추진하는 본래의 기능을 거의 수행하지 못한 것이다.

건설교통위 예산 부풀리기 극심

먼저 예결특위의 본격심사에 앞서 진행된 상임위별 심사는 오히려 예산을 부풀리는 창구가 됐다. 보건복지위가 7748억원, 교육위가 4393억원을 증액하는 등 의원들이 앞다퉈 민원성 예산을 끼워넣는 바람에 2002년 새해 예산 규모가 애초 정부가 제출한 101조800억원보다 4조5천여억원이나 늘어났다.


특히 도로, 교량 건설 등 의원들의 지역구 사업과 직접 관련된 예산을 다루는 건설교통위의 예산 부풀리기 행태는 극심했다. 건교부는 애초 14조2267억원의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건교위 심사과정에서 이재창 의원(한나라당·경기 파주)이 파주 두포∼진천 구간 도로사업비 269억원, 이희규 의원(민주당·경기 이천)은 345번 지방도 이천시 무촌리∼광주군 궁평리 구간 사업비 21억6천만원, 송영진 의원(자민련·충남 당진)은 탑동 4거리∼당진읍 사이 석문국가산업단지 진입도로 사업비 160억원을 반영하는 등 너도 나도 ‘밥그릇 챙기기’에 나서면서 애초보다 2조1082억원이 늘어난 16조3349억원이 됐다. 그러나 건교위 예산심사소위 위원장을 맡았던 윤한도 의원(한나라당)은 “경기를 살리기 위해 사회간접자본 기반을 확충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지난 11월27일부터 12월15일까지 정회와 속개를 거듭하며 예산안을 본격 심사해온 예결특위의 모습은 더욱 꼴불견이다. 상당수 여야 의원들이 대부분 시간을 ‘경찰청 편중인사’나 한나라당의 ‘대권전략 문건’ 등 예산안과 관련없는 문제를 놓고 말싸움을 벌이는 데 허비했다. 그나마 이뤄진 예산관련 질의도 대부분 영·호남간 지역감정을 자극해 자기 지역구의 민원 예산을 따내려는 퇴행적인 행태로 변질돼 나타났다.

12월12일 밤, 자정을 넘기며 계속된 재정경제부·건설교통부 등을 상대로 한 예결특위 부별심사에서 권기술(한나라당·울산 울주), 정철기(민주당·전남 광양·구례) 의원과 정종환 철도청장 사이에 벌어진 철도청 신규사업 예산 시비는 ‘지역감정 자극전술’의 대표적 사례다.

“철도청의 내년도 신규사업 총액이 2조7271억원인데 호남선 사업비가 87.4%인 2조3822억원이다. 호남편중 예산이며 특혜다. 결국 (이익이) 대통령에게 가는 것 아니냐?.”(권기술)

“아무 근거없이 사사건건 영·호남만 단순비교해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 존경 못 받는다. 그러지 말아라. 경부선은 (그동안) 몇 십조가 들어가지 않았냐?”(정철기)

“몇 십조가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 지역편중이란 얘기가 나오지 않느냐. 철도청장 시정하세요.”(권기술)

민원예산 따내기, 읍소에서 협박까지

정종환 철도청장은 “위원님, 저도 설명할 기회를 좀 주세요”라며 애원했다. 그러나 권 의원은 “됐어요. 가만히 계세요. 여기가 광고장인 줄 알아요?”라고 철도청장의 말을 막으며 (건설부)차관을 상대로 “앞으로 시정시키라”고 다그치기 시작했다.

이에 민주당의 정세균, 배기선 의원 등이 분을 참지 못하고 발끈하면서 국회본관 2층의 예결위장은 순식간에 여야간 감정싸움판으로 돌변했다. “답변도 안 들으려면 뭐하려고 해요?”(정세균) “권 의원님, 왜 경상도에 편파해서 하는 것은 그렇게 말을 막습니까. 경상도는 쌀밥만 먹고 전라도는 보리밥만 먹어야 합니까?”(배기선) 결국 여야 의원들은 1시간 가까이 상대의 말꼬리를 잡는 심야논쟁만 벌이다가 밤 1시11분 정회했다.

이와 비슷한 행태들은 예결위가 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반복됐다. 이보다 하루 앞선 12월11일, 김일윤 의원(한나라당·경북 경주)은 “도로, 고속철도, 공항 등 하늘, 땅, 바다 할 것 없이 사회간접자본 예산이 닥치는 대로 특정지역으로 몰리고 있다”면서 “왜 경주 경마장, 감포 관광단지 등 영남지역에서 여러 정권에 걸쳐 수년 동안 일관되게 추진해온 국책사업을 중단시키냐”고 지역감정을 자극했다.

아예 지역구의 민원 예산을 따내기 위해 읍소하거나 협박하는 사례도 심심찮게 드러났다.

정우택 의원(자민련·충북 진천·괴산·음성)은 읍소형. 정 의원은 예결특위 부별심사 마지막날인 12월14일 오전부터 이무영 경찰청장과 박봉흠 기획예산처 예산실장 등을 상대로 충북경찰청 신축예산을 반영하기 위해 읍소를 시작했다. “충북(경찰)청이 73년에 지어졌다. 가보면 비가 샌다. 부지까지 사놓고 98년부터 3년을 내리 설계비 하나 넣어달라고 하는데도 충북도가 너무 작아서 그런지 이것이 안 들어간다. 아무리 양보해도 내년에는 설계비가 들어가야 한다.” “저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이무영) 이 청장이 이렇게 공감을 표시하자 이번에는 박봉흠 예산실장에게 사정을 늘어놨다. “설계비 3억원조차 깎아버리고 왜 안 넣어주는 것이냐? 거짓말인가 한번 가보십시오. 비오면 밑에다 양동이 갖다놓고 있다. 나중에 계수조정 할 때 또 말씀올리겠지만 예산실서 잘 감안해 달라.”

오장섭 의원(자민련·충남 예산)은 협박성 질의를 벌인 경우. 오 의원은 12월11일 정종환 철도청장을 상대로 장항선 공사 부진 이유를 따지면서 “거기에 앉아 있기가 얼굴 뜨거울 것이다”, “답변할 양심이 있느냐”는 등의 모욕적 발언을 계속했다. 오 의원은 특히 답변 기회를 달라는 철도청장을 향해 “당신이 그 자리에 언제까지 있을지도 몰라! 그러면 내년에 1천억원이라도 넣어봐라”는 식의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예결위의 부실심사와 구태는 이뿐이 아니다. 김용균 의원(한나라당·경남 산청·함양)은 12월14일 예산 심사를 명목으로 각 부처 공직자들을 잔뜩 불러놓고 개인의 변호사 업무와 관련된 사건을 물고늘어지면서 여야간 감정싸움을 촉발시켰다. 김 의원은 이날 스스로 “자신에게 변호사 선임을 상의했다”고 밝힌 구속중인 한 음주운전 뺑소니 교통사고 사건 피의자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시작했다. “사망자 가족이 항의하니까, 희생양이라도 잡아넣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전화기록을 뒤졌다. 경찰이 조사를 잘못했다.”

이에 이무영 경찰청장은 “당시 김용균 의원님이 국회의원인지, 또 변호인 관계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법적 근거가 있어 조사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김 의원은 “왜 간첩사건도 아닌데 그 사람(피의자)이 본인에게 전화했다는 이유로 전화를 계속 추적하느냐”며 불법 도·감청 논쟁으로 몰고 갔다.

예산심사는 뒷전이었다

(사진/예산편성의 최종 칼자루를 쥔 계수조정소위. 속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 마지막 밀실흥정이 이뤄진다)
이에 정세균·정철기 위원 등은 “예산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변론하는 자리가 아니다”, “다른 경로를 통해 다투라”며 여러 차례 발언 자제를 요청했지만 김 의원은 멈추지 않아다. 오히려 김문수, 송석찬 등 한나라당 의원들이 “왜 김 의원에게 신상발언 기회를 안 주느냐?”, “불법 감청 의혹을 밝히자는데 왜 범법자를 두둔하는 것처럼 발언하느냐?”고 지원사격에 나서면서 “반말하지 말라”고 맞고함친 여당 의원들과 지루한 감정싸움을 벌였다.

한편 이번 예결특위에서는 정치적 현안을 둘러싼 정쟁이 어느 해보다 극단적으로 표출됐다. 12월1일에는 장재식 예결위원장이 민주당 김경재 의원에게 ‘오늘 김용갑 의원이 어떤 미친 발언을 할지 모르는데, 그런 말이 나오면 즉시 강력히 항변하고 박살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의 메모를 전했다가 한나라당 의원들은 “위원장 사퇴”를 요구하며 예산심사를 거부하는 바람에 예결위가 4일 동안 공전됐다.

12월7일부터 12일까지는 박금성 서울지방경찰청장 임명 문제 등 경찰수뇌부 인사가 도마에 올랐다. 7일 민봉기, 권오을, 김문수 등 한나라당 의원들이 “호남이 경찰인사를 독식했다”고 주장하며 “경찰인사가 당면 과제인데 경찰청장과 차장이 오만방자하게 모두 출석하지 않았다. 이런 오만방자한 자세를 국회가 고치겠다”면서 집단퇴장하는 등 파행을 겪었다. 이 문제는 박금성 서울청장의 학력위조 사실이 밝혀지면서 퇴진당한 이후인 12일까지도 김용갑 의원의 “목포공화국” 논쟁 등 후폭풍을 일으키며 예결위를 정쟁의 도가니로 계속 몰아넣었다.

급기야 12월12일 민주당 김성순 의원은 예결위 속기록을 분석해 중복질의과 정치공세 실태를 집중 분석·제시한 뒤 “같은 예결위원으로 국민께 죄송하다”고 사죄했다. 그리고 동료 의원들을 상대로 “정치공세를 과감히 중단하고 본연의 예산심사에 나서자”고 제안했지만 그저 응답없는 외침으로 끝났다.

그동안 “한나라당이 예산안과 관련없는 문제를 빌미로 정쟁을 일삼는다”고 잔뜩 목청을 돋우던 민주당 예결위원들이 정작 한나라당의 ‘대선관련 문건’이 언론에 공개된 13일부터 똑같이 정치공세에 나선 때문이다. 민주당 의원들은 김한길 문화부 장관과 오홍근 국정홍보처장 등을 불러내 “야당 총재가 비판적인 논조를 가진 언론들의 비리를 파악해 대처하는 식의 약점잡기로 언론을 주무르는 게 정상적이라고 보느냐”는 등의 질문을 퍼부으며 분풀이를 시작했다. 한나라당도 때마침 불거진 ‘청와대 총기오발 사건’을 물고 늘어지며 예결위 부별심의 마지막날까지 계속 맞불을 놓았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정기국회 회기안에 예산안도 처리하지 못한 예결위가 그나마 예산심사보다는 정쟁과 밥그릇 챙기기로 시간을 허비한 것이다.

이강준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간사는 “예결의원들은 예산안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통해 정부의 예산 편성기조에 비판을 하고 우선순위를 따져 재편성하는 등의 일에는 관심이 없거나 이를 수행할 전문적인 능력이 없다는 게 여실히 드러났다”면서 “예산안을 제대로 심사하는 국회를 만들기 위한 국민적 강제수단을 찾아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신승근 기자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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