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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변함없는 초심, 현장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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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2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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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인물 다시 보기 | 단병호]

머리띠 대신 금배지를 단 단병호 의원…무노조 소신 버릴 때까지 삼성 문제 제기할 계획

▣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민주노총 위원장 시절 단병호(55·민주노동당 비례대표) 의원의 이름 앞에는 항상 ‘투사’라는 말이 붙어다녔다.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의장 때부터 그는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생활을 반복했다. 불법 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된 기간만 5년2개월. 사람들은 ‘단병호’ 하면 으레 붉은 머리띠를 질끈 동여매고 격한 구호를 토해내던 모습을 먼저 떠올렸다.


하지만 2004년 4·15 총선 이후 언론에 비친 그의 모습은 달라져 있었다. 비례대표 의원으로 당선된 그는 노동자와 민생에 귀를 닫는 여느 의원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비정규직 문제로 노동계는 극한 상황에 내몰리고 있지만 그를 포함한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무기력했다. 지난 7개월여 동안 언론을 통해 본 그들의 모습은 그랬다. 큰 실망은 곧잘 격한 분노로 바뀌곤 한다. 그들을 두고 ‘초심을 잃었다’는 음해성 비난도 심심찮게 흘러나왔다.

‘노동운동의 맏형’ 단병호 의원. 그는 요즘 현장 노동자들에게 비정규직 법안의 문제점을 알리는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사진/ 이용호 기자)

3일째 ‘현장 투어’ 중

단병호도 변한 것일까. <한겨레21>이 그를 만난 것은 대한 추위로 세상이 꽁꽁 얼어붙은 지난 1월20일 밤 9시였다. 그는 이날 충북 청주에서 열린 한 노조 간부 수련회에 참석하고 막 돌아오는 길이었다. “현장의 동지들을 만나 정부의 비정규직 법안이 얼마나 위험한지 토론하고 왔습니다. 현장 노조원들은 비정규직 법안의 문제점을 자세히 모르고 있더군요.” 그는 이날 3일째 ‘현장 투어’ 중이었다. 그랬다. 실제 그의 모습은 현장의 목소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초심’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단 의원이 최근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 삼성전자의 노동 탄압 실태를 고발한 것도 현장을 중시하는 그의 초심에서 나온 작품이다. 그는 예전부터 삼성의 ‘무노조 경영’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삼성그룹 계열사에서 노조 설립을 시도하다 무참히 깨진 사례를 수없이 목격했다. 하지만 뚜렷한 증거를 잡지 못해 구체적인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대로’ 걸려들었다. 삼성전자가 금속노조에 가입한 직원 홍아무개씨를 돈으로 회유해 노조를 탈퇴시킨 증거가 확보됐다. 단 의원이 입수한 삼성전자 수원공장의 ‘희망퇴직처우표’에 따르면 홍씨의 명예퇴직금은 9천여만원에 불과한데도 실제로는 1억3천여만원을 더 받았다. 그리고 이 돈은 3개월에 걸쳐 ‘분할 납부’됐다. 홍씨에게 이를 확인해주는 내용의 인사팀 직원이 서명한 각서도 확보됐다. 홍씨는 삼성전자를 부당노동 행위로 검찰에 고발했다. 노동3권이면서 시민권적 기본권이기도 한 단결권을 인정하지 않는 삼성의 태도는, 노동자를 기업 경영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 구시대적 발상을 우리 사회에 고착시키고 있다. 이는 유럽 선진국들이 기업과 노동의 파트너십을 중요시하는 추세와는 정반대다. 단 의원은 “노동자가 생산의 결과에서 소외되는 사회는 더 이상 비전이 없다”고 단언한다. “삼성이 세계적인 모범 기업이라면 노조에 대한 시각도 선진 기업들의 수준에 맞게 바뀌어야 합니다.” 그는 삼성이 무노조 경영 방침을 포기할 때까지 ‘삼성 저격수’의 소임을 다할 생각이다. 삼성의 막강한 로비력에 밀려 슬그머니 ‘친삼성 인사’가 되는 노동계 출신의 다른 의원들과는 다른 길을 걷겠다는 것이다.

정리해고 도입 당시 파업 철회한 ‘과오’

그의 ‘현장주의’는 지난해 4·15 총선 때도 빛을 발했다. 그는 민주노총 위원장 임기를 마친 뒤 한동안 쉬면서 재충전의 시간을 갖기를 간절히 원했다. 정신적으로 지쳐 있었고 건강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현장은 그에게 국회 입성을 요구했다. 제도권 안에서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싸워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는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표현대로 “정말 달기 싫은 금배지”를 단 것이다.

2003년 8월19일 주5일근무제 정부안에 반대해 양대 노총이 시한부 파업에 돌입한 가운데 단병호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왼쪽에서 두번째)을 비롯한 조합원들이 ‘국회 통과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한겨레 이정용 기자)

이처럼 현장의 요구에 충실하다 보니 노동계 안에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 전국연합 등 비노동계 세력이 막강한 세를 이루고 있는 민주노동당 내에서 그가 탄탄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유다. 최근에는 그와 함께 일했던 옛 민주노총 동료들이 ‘전진’이라는 외곽 조직까지 만들었다. 단 의원은 이 조직에 대해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지만, 민주노동당 내에서는 이 조직을 단 의원의 ‘친위부대’로 해석하는 시각이 있다.

현장의 목소리를 중요하게 여기던 그도 큰 ‘과오’를 저지른 적이 있었다. 그는 지난 1997년 DJ 정권 출범 직전의 ‘노·사·정 대타협’ 때 민주노총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있으면서 한 일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당시 민주노총 지도부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인한 거센 여론에 밀려 정리해고 도입에 합의하고 말았는데, 이 때문에 지도부가 총사퇴하고 단 의원을 위원장으로 한 비대위를 출범시켰다. 민주노총 대의원들은 정리해고 법안 저지를 위한 총파업을 결의했는데, 비대위원장인 단 의원이 총파업 돌입 하루를 앞두고 돌연 이를 철회한 것이다. 단 의원은 “당시 파업을 할 수 있는 역량도 없었고, IMF라는 특수성 때문에 여론도 극히 안 좋았다”며 철회를 결정한 배경을 설명하면서도, “지금은 몹시 후회하고 있다. 지금 심정이라면 총파업을 강행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그가 이렇게 후회하고 있는 이유는 정리해고제 도입이 지금의 심각한 비정규직 문제의 원인이 됐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당시 재계는 정리해고 범위를 최소한으로 하고 경기가 좋아지면 다시 고용을 늘리겠다고 약속했지만, 정리해고로 생긴 남는 일자리를 비정규직으로 채우고 말았다.

비정규직 법안의 문제점 알린다

이 사건은 지금도 노동계에서 큰 논란이 되고 있다. 당시 총파업을 강행했더라면, 물론 여론의 거센 비난을 받기는 했겠지만 정부와 재계의 정리해고 도입 공세를 약화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는 비정규직 문제가 지금처럼 심각하게 악화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하게 한다. 그에 대한 ‘노동운동의 맏형’이라는 평가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사건인 셈이다.

단 의원은 ‘정치 비수기’인 요즘 현장 노동자들을 상대로 정부의 비정규직 법안의 문제점을 알리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민주노총 비대위원장 때의 ‘과오’를 만회하려는 듯 그의 ‘현장 투어’는 엄동설한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뜨겁게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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