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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성장보다 ‘약자 지원’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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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1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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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눈에 띄는 여론지형 변화…국보법 폐지 막아낸 한나라당 오히려 지지도 떨어져

▣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연말과 연초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의 여론 지형에 주목할 만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과거 성장과 분배 논쟁이 좌우 이념대립으로 변질되곤 하던 것이, 양극화가 극심해지면서 서민층 중심으로 ‘경제·사회적 약자 지원’ 목소리가 부쩍 높아진 것이다. 또 연말 정기국회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강경투쟁으로 막아냄으로써 ‘전술적 승리’를 거둔 한나라당이, 국민들의 눈높이에선 지지도가 떨어지는 현상도 발견됐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www.ksoi.org, 소장 김헌태)가 전국 성인남녀 700명을 상대로 1월11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95% 신뢰수준에 오차범위 ±3.7%)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지지율 하락은 부산·경남 지역에서 두드러졌다. 11일 한나라당 운영위원회. (사진/ 이용호 기자)


중소기업 중심으로 가야 84%

이 조사에선 앞으로 우리 경제의 나아갈 방향을 질문한 결과 ‘다소 성장이 지연되더라도 빈부격차를 해소하는 것이 우선이다’ 60.1%, ‘빈부격차를 감안하더라도 일단 성장하는 것이 우선이다’ 38.4%로 나타났다. ‘빈부격차 해소가 우선’이라는 응답은 열린우리당(58.6%), 한나라당(56.2%), 민주노동당(67.5%)으로 지지 정당에 관계없이 고루 찬성 의견이 우세했다. 과거 여론조사들에서 ‘성장 대 분배’ 도식을 제시할 경우 한나라당 지지자에게서 ‘분배 경계 심리’가 발견됐던 것과 흐름이 달랐다. 또 저소득(월 150만원 이하)·중간소득(151만~250만원)층에서 ‘빈부격차 해소 우선’ 지지도가 더욱 높고(각각 62.4%, 67.4%), 고소득층에서 지지 강도가 그보다는 덜한(51.9%) 흐름도 발견됐다.

이런 결과는 양극화에 따른 서민층의 박탈감이 위험수위에 이르렀기 때문으로 일단 해석된다. 아울러 이 연구소 한귀영 연구실장은 “과거에는 소득이 낮은 서민층이 ‘박정희 향수’에 젖은 가운데 ‘보수 성향=성장주의 신봉’ 도식이 발견됐으나, 최근 양극화가 극심해지면서 서민층 중심으로 ‘분배 요구’가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난다”고 밝혔다.

이런 변화가 앞으로 후속 조사를 통해 일관되게 확인된다면 우리나라도 계층간 이해관계를 놓고 정책대결을 벌이는 유럽형 사회로 이행한다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선 지금까지 저소득·저학력층·블루칼라 등이 보수정당을, 고소득·고학력층·화이트칼라가 개혁 표방 정당을 많이 지지하는 기이한 여론 흐름이 꾸준히 관찰돼왔다.

또 이번 조사에선 앞으로의 경제정책 방향과 관련해 ‘현실적인 경쟁력을 고려해 대기업 중심으로 가야 한다’는 응답이 13.3%, ‘균형 있는 발전을 위해 중소기업 지원 중심으로 가야 한다’가 84.3%로 나타났다. 이런 결과는 “대기업 중심 경제구조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이 연구소는 해석했다. 전반적인 경제난 속에서도 일부 대기업들은 유례가 드문 호황을 누린 것으로 나타난 지난 연말 결산 결과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실업 등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임금을 다소 줄여 일자리를 늘리는 방안에 대한 생각’을 묻자 ‘찬성’ 79.3%, ‘반대’ 18.9%로 나타났다.

박근혜 대표 지지도 하락 일로

그러나 양극화 문제 해결을 위한 올해 정부의 노력에 대해선 ‘기대된다’가 29.3%, ‘별로 기대되지 않는다’가 69.5%로 나타났다. 노 대통령이 최근 양극화 해소를 거듭 외치지만 국민들의 다수는 아직 정부 정책을 믿지 않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 연구소의 정창교 수석전문위원은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가 낮은 탓이지만, 정부가 설득력 있는 정책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원론적 의지 표명’ 수준에 머물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이 연구소의 지난해 11월25일 조사에서도 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깊은 불신감이 확인된 바 있다. 당시 참여정부의 정책은 ‘양극화를 늘리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 국정운영 지지도는 이기준 파문 때문에 주춤세로 돌아섰다.13일 신년 기자회견. (사진/ 이용호 기자)

56.3%, ‘양극화를 줄이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29.5%로 나타났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직무 수행과 관련해선 ‘한나라당을 잘 이끌고 있다’ 48.9%, ‘잘못 이끌고 있다’ 36.5%로 아직 긍정적 평가가 우세했다. 그러나 그의 직무수행 지지도는 17대 총선 직후인 지난해 5월25일 73.5%로 ‘인기 절정’을 기록한 이래, 8월17일(70.3%), 9월8일(58.6%), 10월5일(53.3%)로 하락 일로를 걷고 있다.

박 대표의 지지도 하락은 부산·경남 지역에서 두드러졌다. 지난해 10월5일 64.5%에서 이번에 55.0%로 9.5%포인트 떨어진 것이다. 반면 대구·경북은 10월5일(66.7%), 올해 1월11일(66.7%)로 같았다. 그 밖에 호남 지역에서도 박 대표의 지지율이 39.3%(10월5일) → 26.0%로 떨어졌다.

박 대표의 지지율 하락은 정기국회 당시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4대 입법 저지투쟁을 벌이면서 ‘강경 보수’ 회귀 흐름을 보인 결과로 해석된다. 보안법 폐지를 막아냈다는 ‘전술적 성과’와, 국민들의 ‘눈높이 점수’가 다른 셈이다.

열린우리당, ‘악재’ 맞아 다시 하락

비슷한 흐름은 리서치앤리서치가 1월6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이 기관의 월간 단위 조사에서 박 대표에 대한 부정적 의견은 41%로 40.7%인 긍정적 의견을 앞섰다. 박 대표 취임 이후 처음 발생한 일이다. 한나라당의 지지율도 22.1%로 지난달의 29.8%보다 7.7%나 빠지면서 1위 자리를 23.8%를 얻은 열린우리당에 빼앗겼다. 손학규 경기지사(한나라당)는 1월13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낙동강만 사수하면 된다든지, 보수세력만 모이라고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는데, 바로 이런 대목을 파고든 것으로 읽혔다.

그러나 이기준 교육부총리 파문 발발 이후에 실시된 이번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에선 한나라당 26.3%, 열린우리당 23.9%, 민주노동당 14.8%로 한나라당이 정권쪽의 악재에 힘입어 선두를 회복했다.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는 ‘잘하고 있다’ 28.0%, ‘잘못하고 있다’ 58.5%로 지난 조사와 비교해 긍정 평가가 1.8%포인트 하락했다. 지난해 11월 이후 상승세가 이기준 파문 때문에 주춤세로 돌아선 것이다. 정당·정치인간 여론 주도 경쟁은 ‘우리가 잘해서’라기보다 ‘상대방 실책에 의해서’ 더 크게 움직인다는 공식이 재확인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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