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고건 대권플랜 가동됐나

543
등록 : 2005-01-12 00:00 수정 :

크게 작게

다산연구소 무대로 공세적 행보 개시… 정치권 움직임 관망하며 ‘카페정치’로 젊은층 잡기 나서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지난 2004년 9월 <한겨레21>의 ‘차세대 리더십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이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정동영 통일부 장관,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등 내로라 하는 잠재적 대권주자들을 제치고 선두를 지키고 있는 고건 전 총리의 최근 행보가 심상치 않다. 특히 다산 정약용 선생의 개혁정신과 실사구시 철학을 시대정신으로 승화시켜보자며 지난해 5월 출범한 ‘다산연구소’(www.edasan.org)를 매개체로 한 고 전 총리의 움직임에 눈길이 쏠리고 있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언론 인터뷰 등 정치적 오해를 살 만한 대외 활동을 극도로 자제하며 ‘조신하게’ 처신해온 그가 지난해 말부터 이 연구소를 통해 공세적인 행동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신년사 통해 현실정치 비판


고 전 총리와 가까운 박석무 전 의원이 이사장, 김용정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대표를 맡고 있는 다산연구소는 지난 5월 법인 출범 직후부터 고 전 총리에게 고문직을 맡아달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고 전 총리는 당시 자신의 움직임이 정치적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며 고문직 수락을 끝까지 사양했다.

그런데 지난해 하반기부터 고 전 총리의 태도가 적극적으로 바뀐 것으로 알려졌다. 고 전 총리를 부를 마땅한 호칭이 없다고 말해온 이 연구소 핵심인사들에게 자신의 호를 지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연구소에 몸담은 학자들은 이런 요청에 따라 ‘우민’(又民·다시 또 백성일 뿐이다)과 ‘우민’(于民·스스로 민초면서 민중과 함께한다) 두개의 호를 지어 고 전 총리에게 선택을 권유했다. 하지만 고 전 총리는 선택의 어려움을 호소했고, 결국 연구소 회원 등 네티즌을 상대로 한 의견 수렴을 통해 결정하기로 합의가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김용정 다산연구소 대표는 두 가지 호의 차이에 대한 설명과 함께 고 전 총리의 상세한 이력, 소신 행보를 소개하면서 그를 ‘능력이나 관운만이 아닌 지성, 절제하는 처절한 자기와의 싸움을 벌였다’고 극찬하는 글을 올리는 등 고 전 총리를 적극 홍보했고, 연구소를 중심으로 사실상 ‘고건 아호 지어주기 운동’이 전개됐다. 결국 고 총리는 1천명이 넘는 네티즌들이 의견을 보낸 뒤인 지난 12월24일, “편이상 ‘또다시 민초를’이라는 뜻의 우민을 선택했다”며 감사의 글을 연구소 게시판에 띄웠다. 연구소 고문직 수락의 의미도 담겼다.

고 전 총리는 이후 연구소를 통해 발언 폭을 확대하면서 이곳을 근거지로 ‘2007년 대권 플랜’을 가동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까지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12월31일 이 연구소 홈페이지를 통해 현실 정치를 강도 높게 비판하는 사실상의 신년사를 발표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동안 은인자중하던 고 전 총리는 이 글에서 “정치권을 비롯한 사회 제 세력들은 21세기 미래 전략을 모색하려는 노력보다 ‘힘겨루기’ ‘제몫 챙기기’에만 골몰했고, 실용주의보다는 이념과 명분의 허상을 좇느라 분주했다. 이래서는 우리의 미래가 밝을 수 없다”고 집권 여당을 겨냥한 듯한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냈다. 2004년을 “지역·빈부·노사·계층 갈등에다 이념·세대 갈등까지 겹쳐 사회적 대립과 분열은 해방 공간의 혼란한 사회상을 떠올리게 한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정치적 리더십쪽에서 미래 비전과 전략을 명확히 제시하고 국민통합을 이끌어낼 수만 있다면 민주화 이후의 선진화된 미래를 이루어내기란 결코 어렵지 않다고 확신한다”며 “을유년을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는 새로운 해로 만들어가기 위해 우리 모두 함께 노력하자”는 말로 글을 끝맺었다.

연구소쪽 관계자들은 송년회 모임에서 고 전 총리에게 다산 사상 확산을 위해 도움이 될 만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고 전 총리가 정치적 메시지가 상당히 짙은 글을 올리면서 연구소 홈페이지와 정치권 안팎에서 고 전 총리가 본격적인 대권 행보에 앞서 여론 조성에 나선 게 아니냐는 평가도 나온다.

대학로 카페에서 ‘호프 쏘기’

실제, 고 전 총리의 12월31일자 글이 올라온 뒤 연구소 게시판을 무대로 ‘고건 띄우기’가 본격화하는 등 고건 전 총리에게 적잖은 정치적 이득을 안겨주고 있다. ‘어두운 세상에 희망을 주시라’(아이디 울산인), ‘다산을 본받아 오늘 한반도에 뜻을 세워라. 본인을 바쳐라’(아이디 nobleage), ‘님의 어깨 위에 우리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아이디 장훈재)…. 그의 ‘정치적 결단’을 촉구하는 글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지난 5일에는 보수적 목소리의 대변자를 자처하며 지난해 4월 창간한 인터넷 언론 <데일리안>의 김진영 기획위원의 ‘2007년 고건 독자 집권 가능성’을 언급한 글까지 퍼올려지면서 고 전 총리의 주가는 한층 뛰고 있다. 일부 네티즌들이 ‘대권 욕심이 지나치다. 총리로 제대로 한 일이 뭐가 있냐’고 고 전 총리를 비판하지만 ‘노빠들이 이 나라의 마지막 희망인 고건님까지 해치려 한다면 더 이상 좌시하지 않을 것’(아이디 노빠잡이)이라고 반격을 당한다.

고 전 총리의 핵심 측근은 다산연구소를 매개로 한 고 총리의 공세적 행보에 대해 “다산연구소에서 호를 지어줘, 그 고마움의 표시로 글을 쓴 것일 뿐 다른 정치적 의미는 없다”고 말했다. 다산연구소를 ‘고건 띄우기 창구’나 ‘싱크탱크’로 활용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에 대해서도 “사조직이나 대권 전략팀, 연구소를 만들면 금방 탄로나고 비판의 화살을 맞을 수 있다”면서 “박석무 이사장, 김용정 대표 등은 고 전 총리가 과거 전남지사 시절 오지였던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 등 다산 유적을 정비해 각광받는 문화재로 살리는 인프라를 구축한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일 뿐”이라고 말했다.

연구소의 박석무 이사장도 “연구소 게시판을 무대로 고건 총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연구소와 고 전 총리의 대권 플랜을 연결짓는 것은 소설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산의 사상과 정신을 대중적으로 확산해 역사의 변혁을 추진하려는 연구소의 활동 목표와 공직자로서 오랜 경륜을 쌓으면서도 부정·비리에 연루되지 않은 고 전 총리의 이미지가 부합된다고 판단해 고문으로 영입한 것일 뿐이며, 고 전 총리의 글도 원론적인 것으로 본다”며 “고 전 총리가 어떤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든 그것은 연구소의 지향점과 무관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고 총리가 이곳을 무대로 계속 발언권을 높일 경우 논란은 더욱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고 총리가 최근 개인 사무실이 있는 대학로 주변의 카페를 무대로 젊은 층과 접촉을 늘리고 있는 것도 심상찮은 대목으로 읽힌다. 그는 매주 두 차례 정도 모짜르트 등 몇몇 카페에 들러 젊은이들과 격없이 대화하고, 기분이 좋을 때는 호프를 사주는 ‘호의’도 베풀고 있다. 일종의 ‘카페정치’가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고 전 총리쪽은 이런 행보에 대해 “무엇을 의도한 이벤트는 결코 아니다”라면서도 “과거 20~30대 젊은 층에서 고 전 총리를 ‘올드’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대안에서) 배제하는 분위기였지만, 여론조사에서 1위를 거듭한 뒤부터 먼저 말을 걸고 사인을 요구하는 등 우호적 분위기가 현실화되고 있고, 이를 고무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아직 구체적인 방법은 밝힐 수 없으나 젊은 세대와 호흡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측근들 사이에서는 고 전 총리의 권력 의지는 확고한 만큼 국민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고 전 총리를 대안으로 인정하는 기류가 얼마나 형성되느냐가 실제 대권 도전 결심을 판가름할 핵심 변수라고 보는 분위기가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 전 총리는 또 민주당이 자신을 대권 후보로 영입하겠다고 강력한 ‘러브콜’을 보내는 것에 대해서도 “열린우리당과 합당하는 과정에서 많은 지분을 인정받으려는 민주당의 언론 플레이로, 고려 대상이 아니다”라고 부정적 태도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고 전 총리쪽 관계자는 “현재 국면에서 정치인 몇 사람 더 엮는 것은 무의미하고, 그 반대 세력들이 뭉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면서 “경솔한 행보는 오히려 치명적 실수로 연결될 수 있는 만큼 상황을 좀더 관망하면서 내실을 다지는 데 힘을 쏟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엔 시큰둥… 팬카페도 암중모색

고 전 총리는 오히려 오는 3월 미국 하버드대학 케네디스쿨에서 북한 핵 문제, 한-미 동맹 등을 주제로 강연을 하는 등 국제적이고 젊은 감각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며 기회를 엿볼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지난해부터 인터넷 공간에서 활동해온 고건 팬카페(cafe.daum.net/ilovegogun)도 최근 적극적인 세 확산 의지를 보이고 있다. 현재 회원 수 200여명 수준에 불과한 이 카페는 ‘적은 숫자가 노사모의 백만대군을 이길 수 있다’면서 고건 바로알기 등 고건 띄우기에 적극 나서고 있다.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