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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괴로워라, 국보법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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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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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잃는 폐지당론에 흔들리는 열린우리당 농성파… ‘강경파’로 찍히기 싫지만 ‘대체입법’ 선택도 난감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국가보안법 폐지 당론을 그대로 고수할지, 대체입법이라도 받아들일지, 선택의 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내부 동력이 떨어진 상황에서 당론 고수를 외치면 강경파로 몰려 더 고립되고, 결국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날 것 같아 솔직히 괴롭다.”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중진그룹이 한나라당과 절충해온 ‘대체입법안’을 온몸으로 막아냈던 열린우리당의 ‘국회 농성파’를 대표하는 한 의원은 새해 들어 이런 고민을 하소연했다. 2월 임시국회에서 보안법 폐지를 위해 계속 돌진할지, 한나라당과 적절한 절충점을 찾아야 할지 고민스럽다는 것이다.


폐지론 버리면 실패 인정하는 꼴?

농성파 의원들의 딜레마는 ‘폐지론’과 ‘대체입법론’으로 맞붙었던 지난해 12월30일 의원총회를 기점으로 여권 내부의 역학구도가 보안법 폐지 당론을 계속 고집하기 어려워졌다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농성에 참여했던 다른 한 의원은 “지난해 12월30일 의총에서 중진그룹의 주장대로 ‘폐지당론’과 ‘대체입법안’을 놓고 비밀투표를 벌였다면 7 대 3 정도로 대체입법안이 채택됐을 것”이라면서 “당시 명분상 우위와 일관성 유지를 근거로 당론을 지켜냈지만, 앞으로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당시 국회 밖 단식농성단의 힘과 대의명분을 근거로 중진들이 추진한 ‘대체입법안’ 관철을 저지했지만, 이미 지난 연말을 거치면서 열린우리당 의원들 사이에 한나라당이 결사반대하고, 김원기 국회의장이 직권상정을 거부하는 보안법 폐지안을 강행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현실론’이 대세를 이뤘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 내에서 국보법 폐지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힘을 잃어가면서 농성파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사진/ 한겨레 탁기형 기자)

이런 당내 분위기를 반영하듯 그동안 ‘단일대오’를 형성해온 폐지론자들 안에서도 지난 1월4일 여의도 한 중식당에서 열린 농성파 의원 오찬 이후 3개의 서로 다른 대응 기류로 세분화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김원웅·임종인 의원 등은 “2월 국회에서 보안법 폐지안을 강행 처리해야 한다”는 원칙론을 고수하고 있다. 이들은 4월 재보선에서 열린우리당의 원내 과반 붕괴가 확실한 만큼 2월 국회에서 보안법을 폐지하지 못하면 노무현 정권 아래서 다시 이 문제를 꺼내들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다. 여기에는 2월 임시국회에서 보안법 폐지에 총력전을 펼치지 못할 경우 그나마 버티던 여당의 핵심 지지층이 이탈하면서 당의 기반이 와해될 것이라는 불안감도 깔려 있다. 임종인 의원은 “80년 광주항쟁이 신군부의 학살로 사람들이 죽는 것으로 끝났지만 그게 과연 실패였느냐”면서 “국회 앞에서 단식을 하며 보안법 폐지를 외쳤던 1400여명의 사람들, 이들이 대변하는 시대적 요구가 있는데 그것을 실패로 끝나게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반면, 장영달·유시민 의원 등은 사실상 여야 의원 161명이 서명해 추진한 보안법 폐지안은 지난 연말 정치적 사망을 선고를 받은 것으로 보고, 이후 폐지를 위한 정치·사회적 여건이 성숙될 때까지 기다리자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농성’은 지나친 처방이었나

2월 임시국회에서 한나라당과 절충해 대체입법을 추진할 경우 한나라당과 보수세력이 받아들일 수 있는 몇개의 조항을 손보는 수준에서 그칠 것이고, 이것은 주검 상태인 현행 보안법을 새로운 이름의 악법으로 부활시키는 과오를 저지르는 것이라는 게 이들의 주요 논리다. 장영달 의원은 구체적으로 ‘보안법 고사작전’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얼치기 대체입법으로 또 다른 이름의 ‘보안법’ 탄생을 용인하느니, 국회와 정부 차원의 남북교류 확대, 남북 정상회담 등 보안법 고사를 위한 정치·사회적 조건이 형성될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이다.

2004년 폐지안 처리가 무산되자 12월31일 여의도에서 시민단체들이 항의 집회를 열었다. (사진/ 한겨레 류우종 기자)

또 다른 기류는 현실 여건의 변화를 인정하고 대체입법으로 방향을 전환하자는 것으로, 농성파 의원들 가운데 절반 정도가 이런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농성파 의원은 “2월 임시국회에서 지금처럼 폐지당론을 고수할 경우 아무 결실이나 기약도 없이 보안법에 손을 대지 못하는 상황이 올 것”이라며 “고민스럽지만, 안팎의 현실을 보고 좀더 컴다운하는 게 맞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들은 ‘보안법 폐지론’의 버팀목 구실을 했던 천정배 의원이 원내대표직을 사퇴하고 계파연합 성격의 임시지도부가 등장하면서 폐지당론을 지켜낼 내부 동력 확보가 어려워졌다는 점, 이부영 전 당 의장, 문희상 의원 등이 농성파 의원들을 “의식 과잉의 강경세력”으로 몰아붙이는 상황에서 원칙론을 강조할 경우 완전히 고립될 수도 있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지난 4일 농성파 의원 오찬에서 일부 참석자는 이부영 전 의장 등이 부당하게 ‘강경파 책임론’으로 몰고 가는 데 따른 정치적 부담을 거론하며 “더 이상 보안법 폐지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는 주장까지 펼쳤다.

스스로 주장해온 논리를 뒤집자는 논의까지 제기되는 이런 현실에 부닥친 농성파 내부에서는 전술적 오류에 대한 뒤늦은 반성의 기류도 일부 형성되고 있다.

가장 큰 문제의식은 처음부터 농성이라는 고단위 처방을 내놓고 원칙을 강조한 전술이 과연 적절했냐는 것이다. 농성파쪽의 한 핵심 관계자는 “폐지당론 관철을 위해서는 낮은 차원의 투쟁을 통해 우리 주장에 동조하고 참여하는 의원들을 늘리고 이를 토대로 지도부를 압박·견인했어야 하는데, 처음부터 농성이라는 고단위 처방을 내놓고 농성에 참여하지 못한 의원들 다수를 당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세력으로 보이도록 한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천정배 당시 원내대표가 한나라당과 ‘4자회담’ 등 협상을 벌였다는 이유로 섣불리 인책론을 제기한 것도 주요한 패착으로 지적된다. 당 지도부 안에서 가장 강하게 폐지당론을 견지해온 천 대표를 너무 급히 몰아세워 힘을 빼면서 한나라당과 협상력을 약화시켰고, 당 지도부에서 대체입법론자들이 득세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가 당내 침묵하는 동조 의원들이나 초기 농성단에 참여했던 의원들 사이에 재야파와 개혁당그룹이 현 지도부를 흔들고 당권 장악을 위해 농성을 주도한다는 역선전에 귀를 기울이도록 했다는 뒤늦은 진단도 나온다.

새해 들어 과거 전술에 대한 반성과 이후 전략을 둘러싼 분화 조짐을 뚜렷이 보이고 있는 농성파들이 2월 임시국회에서 보안법 돌파를 위한 묘수를 내놓을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일단 농성파 내부에서 대체입법론이 세를 확산하는 듯한 분위기지만 대체입법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농성파 의원들이 당론 변경에 수긍하는 순간 스스로 당권 투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모험주의적 벼랑 끝 전술’을 고수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이 경우 이들을 의식 과잉의 모험주의자로 비판해온 당권파와 중진들, 중도보수 성향 의원들은 비판의 퍼부을 것이고, 자칫 ‘선명 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던 이들이 정치적으로 파산하거나 극도로 분열되는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 당장 1월5일 임채정 의원을 중심으로 각 계파가 임시 당지도부 구성 이후 농성파들이 목소리를 낮추는 듯한 기미를 보이자 당권파쪽의 반격이 시작됐다. 당권파에 속한 한 의원은 “농성파의 주장이 그토록 순수하고 당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결단이었다면 좀더 당당하게 전면적인 노선투쟁을 진행해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결국 임시로 구성된 집단지도 체제에 자파 지분이 확보되자 침묵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비판했다.

2월 임시국회 묘수가 있을까

1월 말 보안법 폐지 단식 농성 재개를 예고한 시민사회단체들도 농성파의 앞날에는 부담스런 대목이다. 여야 의원 161명의 국보법 폐지안 서명을 사실상 주도해온 임종석 의원은 “지난 연말처럼 시민단체 등 바깥분들의 폐지 요구가 거세지면, 우리는 폐지론을 고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면서도 “쉽지 않겠지만, 일단 시민단체 등 바깥에 계신 어른들을 만나 설득하는 절차가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연말 국회에서 중진의원들의 ‘대체입법’ 시도를 좌절시키면서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을 지켜냈다고 자평해온 농성파 의원들, 국보법 폐지법안을 전면에서 주도해온 개혁성향 의원들이 이제 현실과 대의명분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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