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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청와대에 빚 받으러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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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12-2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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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43억원 빚 변제’ 촉구 나선 민주당… 열린우리당선 갚으려 했으나 실무자 반대로 불발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지난 12월16일 청와대 앞에서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색적인 피켓이 등장했다. ‘청와대는 메리 크리스마스, 민주당은 성냥팔이 소녀’ ‘대통령님, 빚 갚고 편히 주무세요’….

한화갑 대표와 손봉숙·이상렬 의원 등 민주당원 300명이 지난 2002년 대선 때 민주당이 떠안은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 빚 43억원을 여권이 변제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실무자들 “빚의 1/10도 인정 어렵다”

지난 9월24일에 이어 두 번째 열린 시위를 지켜본 청와대 관계자들은 곤혹스럽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청와대의 한 핵심 관계자는 “우리도 그저 답답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빚을 해결해주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반면 민주당쪽은 감정이 상당히 격앙됐다. 장전형 대변인은 “열린우리당과 청와대가 대선 빚을 갚아주겠다고 해 잔뜩 기대를 했는데 이게 뭐냐”며 “결국 우리가 속은 것 같다”고 말했다. 한화갑 대표도 최근 목포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 “과거 민주당 대표경선 자금 수사를 미끼로 나를 회유하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내가 쓰러진다 해도 그 운명을 베개 삼아 당을 지킬 것이다”라며 여권을 강하게 비난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권이 자신을 협박·회유해 민주당을 붕괴시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다.

“빚 빨리 갚아라.”12월16일 청와대 근처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열린 ‘민주당 대선 빚 면제 촉구 집회’. 한화갑 대표(가운데). 이협 전 의원(왼쪽에서 세 번째)등의 얼굴이 보인다. (사진 / 연합)

한동안 우호적 분위기가 흐르던 양쪽의 감정이 다시 뒤틀린 것은 지난 11월10일부터 추진돼온 대선 빛 변제를 통한 화해 전략이 여권 내부의 반발로 위기를 맞은 것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청와대와 열린우리당 핵심부의 교감 속에 여권이 전격 추진돼온 ‘대선 빚 변제 프러포즈’는 최근 성사 단계까지 왔었다. 열린우리당쪽 협상 창구인 정세균 의원(국회 예결위원장)과 민주당 정책위의장인 김효석 의원이 막후협상을 통해 민주당이 요구하는 대선 빚 가운데 상당액을 열린우리당이 민주당에 빌려주되 이를 갚지 않는 ‘대여금 제공’ 방식으로 처리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하지만 어렵게 마련한 타협안은 뜻밖의 복병을 만났다. 당 살림을 책임진 최용규 사무처장과 사무처 실무자들이 타협안 수용을 거부한 것이다. 여권의 한 핵심 관계자는 “정세균·김효석 두 의원 사이에 합의한 대여금 제공 방식의 변제 계획을 받아든 최용규 사무처장과 몇몇 당직자들이 ‘별개의 정당인 열린우리당이 민주당에 돈을 제공할 수는 없다’면서 강한 거부 의사를 밝혔고, 당 지도부도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민주당이 변제를 요구한 43억원의 대선 빚을 실사한 실무자들 가운데는 10분의 1도 인정하기 어렵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고 덧붙였다.

우리당쪽의 이런 해명에 대해 민주당은 강한 배신감을 토로한다. 민주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우리도 열린우리당과 화해에 대한 당 안팎의 반발 등 부담이 컸지만 50년 정통 민주세력의 한 뿌리라는 생각을 갖고 상당한 양보안을 냈다”면서 “사무처의 반발 때문에 양쪽의 합의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게 제대로 된 정당이냐. 결국 민주당을 흔들려는 한편의 사기극 아니냐”고 말했다.

강한 화해의지 여전하지만…

민주당은 열린우리당과 협상에서 전체 빚 가운데 절반인 20억원을 몇 차례에 나눠 갚는 방안 등 몇 가지 절충안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전남도의회(의장 김철신) 의원 40명이 12월14일 성명을 내 “민주당과 우리당의 통합론은 민주당을 와해하려는 음모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반발했지만, 이를 무마하며 12월16일 청와대 앞 시위에 앞서 “시위 계획을 철회할 최소한의 계획이라도 제시해달라”고 여권 핵심부에 요구했다. 그러나 내부 반발에 부닥친 여권 핵심부는 민주당에 만족할 만한 답을 주지 못했고, 민주당의 분노는 다시 폭발했다.

여권은 빚 변제 계획이 완전히 물건너간 게 아니라며 여전히 강한 화해 의지를 보이고 있다. 정세균 의원은 “연말까지 변제 계획을 밝히겠다”는 뜻을 민주당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의 한 핵심 인사도 “당 실무선에서 법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정한 대여금 변제 방식을 고집할 수는 없다”면서도 “언론 등 제3자가 공개적으로 감시·검증하는 합리적인 변제 방법을 곧 찾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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